공주, 선비를 탐하다 3

지은이 : 서은수
표지 일러스트 : 래빗제이
펴낸곳 : 도서출판 가하
홈페이지 : www.ixbook.co.kr

copyright ⓒ 서은수, 2019
ISBN : 979-11-300-3432-4 05810

이 책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무단전재 및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작품 소개


“너는 나를 우선순위 신붓감으로 고려해보겠다, 약조하였다!”
“그때는 자가의 신분을 몰랐기에 그리했던 것입니다.”
“공주면 달라지느냐? 어찌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느냐!”


그대가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다가갈 것입니다. 법도에 어긋난다 하였습니까? 내게는 그대가 법도이고 숨입니다. 그대가 웃어야 나도 웃고, 그대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나니. 내일 죽더라도 오늘 후회하지 않고자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것입니다.


“자가와 저는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냉정하십니다.”
“서운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열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혹여 그런 일이 생겨 자가 외에는 다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집을 부리면 어찌하시렵니까?”
“그럴 수는 있는 것입니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자꾸 두드리지 마십시오. 품고 있는 감정을 몰아내시고 저에게는 손톱만큼의 마음도 내어주지 마십시오.”

작가 소개


서은수

▣ 출간작

공주, 선비를 탐하다
윈터 블루스
고백의 이유



15. 마지막 선물


세자가 잡아먹을 듯 서율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국본의 위엄에 기가 질려 고개라도 넙죽 조아리기 마련인데 서율은 그런 것도 없다. 바른 자세로 자리에 앉아 세자를 떳떳하게 마주 보았다. 그 덕에 눈치가 보여 죽어나는 것은 곁에 있는 애꿎은 희립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중간에 끼어서는…….
살벌한 동궁전의 분위기에 정한군은 진즉에 내뺐으나 그럴 만한 위치가 못 되는 희립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신경을 말려야 하나,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천우신조로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왜 이리 소식이 없는 것이냐?”
서율과 대치하면서도 기다리던 소식이 없자 세자께서 버럭 역정을 내셨다. 갑작스러운 고성에 화들짝 놀랐던 희립은 곧 정신을 차리고 호기를 잡았다.
“직접 가서 알아보고 오겠나이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재빨리 줄행랑을 놓았다. 이제 방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세자와 김서율. 서율에게 한시도 고까운 눈을 떼지 않았던 세자는 노기가 그득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너는 내가 뭐로 보이느냐?”
“이 나라의 국본이시옵니다.”
“그렇게 잘 아는 인사가 어찌 감히 국본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는단 말이냐?”
분기를 누르며 조곤조곤 위엄 있게 말을 잇던 세자는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말해보라, 언제까지 그렇게 팽팽 놀아댈 것이냐?”
“도성에 올라온 이후 저하께서 아시는 이유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었사옵니다.”
“한데 어찌하여 사헌부에서 네 코빼기를 본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냐?”
“사직상소를 처결하여주십시오. 저는 더 이상 조정에 뜻이 없사옵니다.”
반년 전 서율은 분명 사직상소를 올리고 도성을 떠났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사직이 아닌 밀지를 받고 암행감찰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부친이야 그런 점에선 워낙 깔끔하시니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분뿐이다. 하나밖에 없는 동복누이를 비정하게 내친 이 나라의 국본.
작년 겨울, 공주께서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났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자선당을 찾아왔었다. 전하께서 효경왕후마마를 지키셨던 것처럼 저하께서 공주 자가를 지켜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 그럼에도 세자께서 하신 말씀이라곤 짤막한 한마디가 고작이었다.
“지금은 침묵해야 할 때다.”
아무리 사정을 해봐도 세자는 꿈쩍도 안 했고, 급기야 서율을 동궁 밖으로 내쫓았다. 이날 이때껏 세자를 향한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잠시간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자네가 사직을 청한 게 정선에 있는 그 아이와의 관계 때문이라면 내 여기서 분명히 말하지.”
“…….”
“너는 절대로 부마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공주와의 사적인 관계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한 세자의 발언에 서율은 잠깐 동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중전도 아는 사실을, 더욱이 유배지까지 쫓아갔는데 세자라고 모를 리 없다. 공주의 소식에 세자 앞에서 소란을 피워 저 스스로 마음을 내보인 적도 있었다.
평소 공주의 행적을 매일같이 보고받는 세자였으니 어쩌면 중전보다 먼저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감출 것도 없다는 판단에 서율은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저는 이미 공주 자가와 정혼하였습니다.”
“내 허락도 없이 내 누이와 정혼을 하였다?”
“저하께서는 오라버니의 자격을 스스로 버리지 않으셨사옵니까. 이미 폐위당해 왕실의 명부에서도 지워졌으니 앞으로 공주 자가에 관한 모든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례하였기에 이 자리에서 경을 친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어차피 단단히 각오하고 내지른지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서율은 담담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자의 표정이 어쩐지 오묘했다.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오후의 볕을 쬐는 배부른 고양이와도 같은,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언뜻 스쳤다. 뭘 잘못 보았나 싶어 무엄하게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세자에게서 조금은 누그러진,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매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말대로라면 그 아이는 이제 공주가 아니다. 앞으로도 결코 복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여 그 아이와 혼인하는 사내는 죽는 그날까지 의빈이 될 수 없다. 너는 무엇 때문에 조정을 떠나려고 하느냐?”
서율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세자의 표정과 음성은 태연했지만, 너무도 많은 뜻이 함축된 발언이었다. 서율은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저하, 그 어인…….”
하지만 자세히 캐물을 새도 없이 밖에서 내관의 급한 전언이 들렸다.
“저하, 도승지와 부수찬 들었사옵니다.”
왔다!
방 안의 분위기는 삽시에 일변했다. 서율과 세자는 사소하게 투덕대던 기류를 싹 지우고 오직 하나의 뜻으로 뭉친 동지로 되돌아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들라 하라.”
조금 전 의금부로 달려갔던 희립이 도승지를 따르며 세자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한 세자는 시치미를 떼고 도승지를 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도승지. 이 시간에 어인 일입니까?”
“저하, 의금부로부터의 전갈이옵니다. 도주한 의천상단의 대방이 스스로 의금부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하옵니다.”
세자는 도승지에게 적당히 놀란 빛을 내보이곤 서율에게 시선을 돌려 근엄하게 명령했다.
“지평은 속히 사헌부로 복귀하라. 당분간 바빠질 것이다.”
드디어 반격할 차례였다.

◇ ◆ ◇

피둥피둥 살이 쪄 개기름이 흐르는 양병수의 얼굴에 음흉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상단을 차지하고 배가 부른 요즘, 그는 청월관에 거의 살다시피 하다가도 때가 되면 눈을 비비고 집무실로 나왔다. 밖에서 움직이는 상단 소속의 누군가를 지켜보기 위함인데 공적인 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그가 천박하게 입맛을 다시며 훔쳐보고 있는 사람은 저 멀리 새로 들어온 물품을 확인하며 열심히 수기 중인 아정이었다. 올해 열여섯, 한창 꽃망울을 틔울 나이로 반가의 여식이라 그런지 행동거지와 말씨가 음전해 보면 볼수록 군침이 돈다.
“처음 봤을 땐 비썩 말라 막대기 같더니 언제 저리 물이 올랐을꼬.”
마음 같아선 청월관의 기녀로 만들어 마음껏 품어주고 싶지만 양반이랍시고 또 얼마나 뻗대며 피곤하게 할까.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쩝쩝 다시는데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차 행수가 슬그머니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어르신, 아정이 저 아이를 데려올깝쇼?”
“뭐야?”
엉큼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차 행수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기분을 맞췄다.
“대방 어르신께서 곁에 두고 어여삐 여겨주시면 저 아이도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양반이 뭐 대수겠습니까, 제 주제에 횡재한 것이지요. 소인이 가서 은밀히 불러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반년 넘게 애태우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던 참이다. 그냥 일을 칠까 싶다가도 양반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이 마음에 걸려 선뜻 저지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부추기니 구미가 당겼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꼴로 봐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차 행수가 알아서 뒤처리를 감당할 태세였다. 그렇다면 양병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망측한 상상을 하며 그의 입가에 혐오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바깥에서의 일을 모두 끝낸 아정은 대행수의 방으로 건너와 그의 일을 도왔다. 한양 지점의 상단에서 유일하게 준혁을 충성스럽게 모시는 분이라 아정도 대행수와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그도 자신도, 양병수가 아닌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올 상단의 진짜 주인을 위해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열심히 붓을 놀리다가도 한 번씩 떠오르는 준혁에 관한 생각은 막을 수 없었다. 어찌하여 아직까지 이렇게 조용한지 걱정도 되었다.
그제 오후, 일을 마치고 귀가하니 집 안이 어수선한 게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은 듯 모두가 들뜬 모습이었다. 부엌에 계시는 어머니는 고깃국에 부침까지 준비하며 한바탕 잔치라도 벌일 분위기였다.
“어머니, 이것들이 다 뭐예요?”
귀한 식재료에 아정이 놀라서 물었더니 어머니는 반가운 소식을 알려주셨다.
“대방 어르신께서 가져오신 것이다.”
아정은 그가 있다는 뒷마당으로 한달음에 달려갔고, 건강한 모습의 준혁과 재회했다. 그의 얼굴에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편안함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곧 의금부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알렸다. 아정이 까무러칠 듯 놀라자 그는 평온하게 웃으며 안심시켜주었다.
“곧 상단으로 돌아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 어떠한 소식이 들려도 동요하지 말고 네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된다. 이미 여러 번 말하였듯 문제가 생기면 대행수에게 의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혹 그조차도 감당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거든 사헌부의 지평, 김서율 나리를 찾으면 된다.”
“김서율…… 나리요?”
“그래. 그분이 공주 자가와 나의 역할을 대신해줄 것이다.”
의금부란 말에 괜스레 겁부터 났지만 차분한 그의 태도에 아정도 안도했다. 정확히 오늘 아침까지는 말이다.
그가 의금부로 향한 지 거의 이틀이 되어간다. 당장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이렇다 할 소식 없이 시간만 흐르자 아정은 차차 안절부절못했다.
내색은 안 하지만 대행수도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아무도 없으니 그에게 살짝 말을 꺼내볼까, 아정은 망설이는데 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차 행수가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대방 어르신께서 아정이를 잠시 찾으십니다.”
“아정이를?”
뜻밖의 전언에 대행수와 아정은 마뜩잖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파렴치한 작자가 아정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대행수는 호락호락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무슨 일로 말단 서기인 아정이를 찾으신단 말이냐?”
“대방께서 상단의 사환을 찾는 것이 무슨 일이겠습니까. 심부름시킬 일이 있으신가 보지요.”
답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였다. 대행수를 대하는 차 행수의 태도는 시간이 갈수록 정도를 벗어났다. 그는 대행수를 끈 떨어진 뒤웅박 정도로만 취급했다. 어차피 얼마 뒤면 상단에서도 쫓겨날 테니 더는 굽실거릴 필요도 없다는 자세였다.
“대행수님, 제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차 행수의 무도한 말투에 보다 못한 아정이 나섰다. 사람이 그득한 한낮의 본관인데 별일이야 있겠느냐 싶었다. 지금으로써는 쳐다보기도 싫은 양병수를 피하고 싶다는 바람보다 속절없이 당하는 대행수가 안타깝기만 했다.

대방의 집무실엔 청에서 들여온, 쓸데없이 크고 고급스러운 책상과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이 방은 고매함이 묻어나는 멋스러운 곳이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 은은했던 향취는 사라지고 사리사욕에 찌든 양병수의 역한 냄새가 곳곳에 깃들었다.
아정은 양병수 특유의 체취가 거북해 속이 메슥메슥하였다. 게다가 되도 않는 그의 황당한 제안에 우지끈 두통까지 얻었다.
“지금 총서기라 하셨습니까?”
“그래. 내 지난 일 년 너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모든 일 처리가 야무지고 꼼꼼해 아주 쓸 만하더구나. 어떠냐, 내 밑에서 총서기 일을 한번 맡아보지 않겠느냐?”
보면 볼수록 음흉하고 탐욕에 전 아주 징그러운 낯짝이다. 그리 말하면 누가 좋다고 할까 봐. 제안부터가 거대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고, 이는 양병수가 엉뚱한 흑심을 품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혐오감과 공포감에 아정은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으나 섣불리 건드렸다간 되레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아정은 냉철함을 되찾고 건조한 어조로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제 말단 서기에 불과한 제가 어찌 감히 총서기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지금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