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선비를 탐하다 2

지은이 : 서은수
표지 일러스트 : 래빗제이
펴낸곳 : 도서출판 가하
홈페이지 : www.ixbook.co.kr

copyright ⓒ 서은수, 2019
ISBN : 979-11-300-3431-7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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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너는 나를 우선순위 신붓감으로 고려해보겠다, 약조하였다!”
“그때는 자가의 신분을 몰랐기에 그리했던 것입니다.”
“공주면 달라지느냐? 어찌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느냐!”


그대가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다가갈 것입니다. 법도에 어긋난다 하였습니까? 내게는 그대가 법도이고 숨입니다. 그대가 웃어야 나도 웃고, 그대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나니. 내일 죽더라도 오늘 후회하지 않고자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것입니다.


“자가와 저는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냉정하십니다.”
“서운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열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혹여 그런 일이 생겨 자가 외에는 다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집을 부리면 어찌하시렵니까?”
“그럴 수는 있는 것입니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자꾸 두드리지 마십시오. 품고 있는 감정을 몰아내시고 저에게는 손톱만큼의 마음도 내어주지 마십시오.”

작가 소개


서은수

▣ 출간작

공주, 선비를 탐하다
윈터 블루스
고백의 이유
설렘의 기억



9. 달물결 위로 바치는 꽃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의천상단의 대방 강준혁에 대해 보고를 마친 치경은 상전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평소 같으면 벌써 꼬치꼬치 캐물으며 자세한 지시를 내렸어야 했다. 한데 상전은 긴 시간이 흐르도록 가타부타 조용하다. 화경궁으로 가셔야 할 시간이 촉박한데도 서두르기는커녕 외려 혼자만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었다.
확실히 이상해지셨다. 근래 들어 상전은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평소보다 일찍 퇴청하셨기에 강론 준비를 하시려나 보다 짐작하였는데, 보고를 하러 들어와봤더니 우두커니 상념에 잠긴 채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치경은 시선을 들어 상전의 얼굴을 살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 듯 눈 밑은 그늘지고, 얼굴은 까칠해졌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웠다.
……설마?
상전을 관찰하던 치경이 눈썹을 꿈틀했다. 혹여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게 아닌지 염려되었다. 몇 년간 평온하셨으니 그럴 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쩐지 불안했다. 치경의 눈가에 안타까움이 스치는데 침묵을 지키던 서율이 강준혁에 관해 확인했다.
“다 죽어가던 그를 살려내 아들로 삼았단 말이지?”
“첩실을 들여도 자식을 가지지 못해 크게 상심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송도 어디쯤 산길에 쓰러져 있던 강준혁을 거두고, 사람들에게 하늘이 보내준 아들이라고 소개하였다 합니다.”
“날랜 자들로 교체해 뒤를 밟았는데도 번번이 강준혁을 놓쳤다고?”
“도련님의 지시대로 뛰어난 자를 추려 뒤쫓게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지금은 고도로 훈련된 자를 붙였습니다.”
“무예가 그리 뛰어나단 말인가?”
“예사롭지 않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실력이 월등하다고는 느꼈으나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당시 도적 떼를 상대하느라 준혁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속단한 게 잘못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강준혁과 양병수의 행적을 쫓되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선 아니 되네.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하나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고했으니 오늘은 이만 쉬라는 인사치레 뒤 상전은 조금 전과 같이 깊은 사념에 잠식되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새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야위었다.

아무리 넋을 놓고 있어도 할 일은 칼같이 해냈다. 지켜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서율은 시각에 맞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말을 이용할까 하다가 이대로는 사고를 일으킬 것 같아 오늘은 화경궁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몸도, 머리도, 눈꺼풀마저도 무거웠다. 특히 요 며칠 잠자리가 뒤숭숭해 섭식에 유의하지 않았더니 두통이 떨어지질 않았다. 서율은 통증을 참으며 현재 조사 중인 선혜청 관리의 배후와 강준혁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얼마 못 가 흐지부지 흩어졌고 지난 며칠 종종 그래왔듯 공주와 송 판관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안 그래도 또다시 시작된 악몽으로 내내 심란한데 원인을 알 수 없는 거슬림이 가슴을 짓눌렀다.
얼마 전, 준혁의 행적을 짚어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놓친 지점이 각각 달랐으나 그곳이 전부 화경궁의 주변이라는 점이다. 서율은 경비 상황을 둘러보고 군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화경궁에 갔었다.
거의 도착했을 무렵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누구인가 봤더니 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린 이는 송 판관이었다. 그는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갔는데 그 도착지점에 공주가 있었다. 익히 알고 지낸 사이인 듯 공주는 그를 보며 반갑게 미소까지 지었다.
순간 뜬금없는 불쾌감이 속을 발칵 뒤집으며 치솟았다. 두 사람이 어떻게 알고 지낼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경궁을 경비하는 군졸의 우두머리로서 공주께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묵묵히 안 보이는 곳에서 순시만 할 것이지, 대놓고 쫓아가 아는 척하는 송 판관이 못마땅했다. 공주도 그러했다. 내외법이 엄연한데 송 판관이 법도도 잊고 쫓아와 말을 걸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잘라야지, 도리어 웃어주고 대화까지 나누다니. 경학이 아닌 내훈부터 익히시라, 따끔히 권해야 하는 게 아닌지 서율은 심히 고민스러웠다.
자신만 보면 찬바람을 쌩쌩 날리면서 다른 이에겐 한없이 관대한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와 변하지 않는 산과 같다고 할 땐 언제고, 그날 일에 관해 생각은 하시는지 안 하시는지.
서율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짜증을 최근 들어 종종 느꼈다. 수양이 부족한 탓인가 싶어 경서를 펼쳐도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론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싶었다. 수사야 지금처럼 하면 되는 것이고, 강준혁은 치경이 빈틈없이 도맡을 것이며, 공주는 원래 은근 오지랖이 넓은 분이었다. 누구를 어떻게 대하시든 그가 상관할 바 아니다.
고민에 잠겨 한참을 걸었더니 어느덧 화경궁이 저 앞이다. 서율은 걸음을 멈추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다. 일일이 신경 쓸 것 없이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자, 재차 다짐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불필요한 잡념을 깨끗이 털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리석게도 그동안 이러한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무려 달포하고도 보름 만에 강론이 재개되었다. 서율이 시각에 맞춰 화경궁에 모습을 드러내자 난이와 수비를 비롯해 최 상궁까지 줄줄 뛰어나와 그를 반겼다.
특히 최 상궁은 그동안 보였던 무뚝뚝함을 지우고 최대한 웃으려 노력했다. 갑작스러운 환대에 서율이 경계의 빛을 띠어도 상냥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목적은 하나, 김 지평을 친절히 맞아들여 그가 되도록 강론을 빼먹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한성부의 판관은 우상의 자제였다. 그 사실을 듣자마자 가슴이 벌렁거려 급히 안채에 아뢰었다. 공주께서도 많이 놀라신 낯빛이었다. 행여 신분이 탄로 날까 외출을 자제하는 대신 서율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는 내내 식사도 못 하시고 하늘만 쳐다보며 어찌나 한숨을 쉬어대시던지. 어린 시절의 상사병이 재발하는 게 아닌가 하여 더럭 겁이 났다. 이러한 때에 김 지평이 이레에 한 번 꼬박꼬박 화경궁에 얼굴을 내밀어준다면 공주께 더없는 위안이 될 터였다.
“오셨습니까! 실로 오랜만에 걸음하셨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최 상궁은 답지 않게 친절한 미소를 함빡 머금고 인사했다. 제법 자연스럽게 지평을 맞았다고 뿌듯해하는데 난데없이 수비가 끼어들어 산통이 깨졌다.
“말도 마십시오, 지평 나리. 자가께서 그동안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
노골적인 나인의 호들갑에 잠시나마 훈훈했던 분위기는 어색하게 급변했다. 서율이 아무런 대꾸 없이 안으로 쓱 들어가자 최 상궁은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수비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찌하누!”
“사실이지 않습니까. 오늘만 해도 지평 나리가 오신다니까 하루 종일 경대 앞에 붙어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한단 말이냐? 공주 자가의 위신을 생각했어야지!”
“송구합니다, 마마님. 소인은 그저 지평 나리가 우리 자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시길 바랐습니다. 생각이 모자라 실수하였습니다.”
마음이 급했음을 인정한 수비가 용서를 구해도 최 상궁은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무언가 미묘하게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공주께서는 어쩐지 다급해 보였고, 늘 공손했던 지평은 오늘따라 눈빛이 메말라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최 상궁은 두 분이 함께 계시는 방문으로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다.

사헌부에 다녀온 뒤 하루하루 힘들게 기다려온 시간이다. 은명은 긴장되면서도 경상 서랍에서 작은 면경을 꺼내 얼굴을 요리조리 비춰 보았다.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안채로 들어서는 듯했다. 곧이어 지평께서 오셨다는 난이의 씩씩한 목소리가 울렸다. 은명은 서둘러 면경을 치우고 출렁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였다. 떨리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혼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서율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간 일이 고되었는지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다.
은명의 고집으로 처음부터 발은 드리우지 않았다. 서율은 그것이 법도에 맞지 않음을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있었다. 맞절하여 인사한 후 미리 준비된 서안 앞에 그가 자리를 잡았다. 은명은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건사하며 안부부터 챙겼다.
“바쁜 일은 잘 마무리하셨습니까?”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
“고단해 보이십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서찰로 미리 언질을 드렸듯 오늘은 대학의 팔조목 중 성의(誠意)에 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은명은 부풀었던 가슴이 맥없이 식는 것만 같았다. 지난번 일과 관련해 특별한 말을 해주길 바랐던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봤으니 조금 더 담소를 나누고 싶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간단한 안부조차 번잡스럽다는 듯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풀이 죽은 은명은 야속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를 따라 서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주자는 격물치지에 힘써 이치를 깨우쳤어도 그것만으로 삿된 뜻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순 없다 하였습니다.”
“문제는 외부에서 빚어져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하여 그러한 문제를 성의와 정심(正心)으로 극복해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성(誠)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무망(眞實無妄). 참되고 망령됨이 없음을 뜻합니다.”
오늘따라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묻는 대로 대답은 하고 있으나 은명은 다른 때처럼 부당하다고 느낀 부분을 반박하지 않았다. 서율 또한 그런 은명을 내버려두었다. 굳이 토론을 벌이고, 각자의 주장을 세우고, 온갖 이론을 끌어다 근거로 제시하는, 여태껏 그들이 지향해온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다. 이전 같으면 벌써 정신 차리시라며 주의를 주고도 남았을 터인데.
평상시와 다르게 모든 게 조금씩 엇나가고 있는데 은명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시각이 얼마만큼 흘렀을까 혼자서 가늠하느라 정신만 분산되었다.
강론이 끝나는 시각에 맞춰 최 상궁이 다과를 들여오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어렵사리 마주한 그를 조금 더 이곳에 잡아두고 싶었다. 그동안 감정을 숨기느라 유독 딱딱하게 굴었던 것을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서율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조바심이 생겼다. 강론이 끝나면 언제나 칼같이 일어서는 그였다. 오자마자 잡담을 삼가고 곧장 강론에 들어간 걸 보면 오늘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시각을 못 맞췄다간 붙잡는 시늉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보낼 게 뻔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이것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밖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서율은 이미 볼일을 끝냈다. 잔칫상을 차리라는 것도 아니고 간단하게 준비하면 될 것을 뭘 이렇게 뜸을 들이나, 애가 달았다. 당장에라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아 은명은 급한 대로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매화차를 좋아하십니까?”
서책을 정리하던 그가 은명을 보았다.
“아시다시피 화경궁엔 매화원이 있습니다. 매년 매화를 따다 그늘에 말려 차로 즐기고 있지요. 매화차는 향이 그윽하고 피부와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강론이 끝났으니 스승님께 그 차를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수줍은 제안에 대답이 없었다. 서율은 은명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음에도 은명은 최선을 다했다.
“어찌 그리 보기만 하십니까. 매화차가 싫으십니까? 그러하시면 국화차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매화와 국화를 특히 좋아하시어 화경궁을 온통…….”
“공주 자가.”
말을 끊는 그의 음성이 매우 차가웠다. 은명은 그 싸늘함에 가슴이 서걱 쪼개졌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가께서는 지금까지 잘해오셨습니다. 강론에 임하시매 중심을 잃지 않으셨고 저를 한낱 스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감정으로 대해주셨습니다.”
“그건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진심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그러고 보니 오늘 그가 이상했다. 이전에도 그리 살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팍팍하게 대응하진 않았다. 은명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까칠하게 마른 얼굴과 어딘지 황폐해 보이는 눈빛.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면서도 은명은 감정을 누르며 그 연유부터 물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래야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셔야 합니다.”
은명의 완고한 거절에 서율은 그보다 더 엄격하게 받아쳤다. 끝내 밀어내기로 했구나, 헤아리면서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은명은 고집을 부렸다.
“제 마음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저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가겠습니다.”
“자가께서는 잔인하고 못된 분입니다. 이기적인 철부지이십니다.”
감정 없이 되받아치는 그의 말에 은명은 눈가가 따끔거렸다. 목 안 깊숙이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 솟구치는 것도 느꼈다.
“제가…… 그렇습니까?”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가겠다. 그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상대의 의중, 기분, 상황 그 무엇도 아랑곳없이 자가께서 내키시는 대로만 행동하겠다, 그런 뜻이 아니십니까.”
보름 동안 노심초사, 이제나저제나 그를 기다렸다. 그가 하루빨리 화경궁으로 찾아와주길, 눈앞에 나타나주길. 하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였을까.
“자가와 저는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연이 닿지 않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끊임없이 마음을 표현하려 하십니까.”
“그러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지난 세월, 혹시라도 그가 찾아오면 어떻게 대해줄까, 불을 끄고 침수에 들어 밤을 하얗게 지새우도록 온갖 상상을 해왔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분명 기다림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지난 6년, 단 하루도 그를 기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야멸치게 구는 그가 섭섭해 은명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