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 다른 상처

바느질을 하다 말고 목을 쭉 뺀 하령은 휘은이 붙들고 있는 바느질감을 건너다보았다.

「세상에. 역시 바느질 솜씨는 아씨를 따라갈 수가 없네요.」

「원 애도. 네가 더 잘하면서 괜히 그러는구나.」

칭찬이 쑥스러운 듯 휘은이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에 하령의 입꼬리도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휘은이 이만큼이라도 기운을 차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또 기뻤다.

「근데 대체 얜 어떻게 된 거야. 나간지가 언젠데. 안 되겠어요, 아씨. 제가 나가보고 올게요.」

하령은 제가 하고 있던 바느질감을 둥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떨어진 붉은 색실을 가져오겠다며 나간 무연이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하령은 흠칫 놀라 굳어졌다. 이쪽으로 곧장 다가오고 있는 적유와 마주친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내뿜고 있는 살벌한 기운에 저절로 낯빛이 창백해졌다.

「대, 대, 대인.」

하령은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휘은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 준 것은 분명했지만, 이제야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그녀를 다시 자극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아뢰어라.」

하령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명에 따랐다.

「아, 아씨. 대, 대인께서 드셨사옵니다.」

뜻밖의 소식에 옷감 위에서 움직이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그날 이후, 적유가 이곳에 발걸음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까.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안으로 드시!」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화들짝 놀란 휘은은 재빨리 바느질감을 한쪽으로 미뤄두고 일어나 예를 갖췄다.

「어서 오시옵소서.」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적유의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또 무엇에 저리 뒤틀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

그는 이번에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자에 몸을 묻는 것으로 그녀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이젠 제법 좋아 보이는군.」

적유는 비스듬하게 몸을 튼 채 그녀를 올려보았다.

「배려해주신 덕분이지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인 휘은은 다소곳이 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하령, 차 한 잔 부탁하자꾸나.」

그녀의 말에 적유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조금 전의 일로 휘은에게도 따끔하게 주의를 줘야겠다 싶어 찾아온 길이었으나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치밀어 올랐던 분기를 애써 가라앉힌 참이었다. 그러나 하령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다시금 심기를 긁었다.

「예, 아씨.」

하령이 잽싸게 사라졌다. 적유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고구려에선 하인을 대하는 법이 어떠했는지 모르나, 하인에게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휘은은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다.

「그저 그런 하녀가 아니옵니다.」

완고한 말투 앞에 미간 사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대인께 서우님이 그러하시듯, 하령 또한 저에게는 자매와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그녀는 얌전히 눈을 내리깐 채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했다.

「하령이란 아이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고로 아랫것들이란 여지를 주는 순간 하극상을 일삼기 시작하는 법. 네가 이렇듯 무르게 구니까 아랫것들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구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사옵니다.」

꽝!

적유의 주먹이 원탁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실패들이 우수수 흩어졌지만 휘은은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냥 그리 하라면 그리 해라.」

굳이 눈을 들지 않아도, 살갗이 따끔거릴 만큼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공연히 한 마디 더 보탰다가 그의 화를 부추기게 될 것 같았다.

「그리, 하겠습니다.」

휘은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제야 인상을 푼 적유의 눈이 원탁 위에 있는 바느질감에 꽂혔다. 장문 가의 사병임을 알리는 적갈색 옷. 고구려에서 돌아온 뒤 떠날 사람은 다 떠났지만 끝까지 떠나길 거부한 십여 명의 사병들이 남은 상태였다.

「듣자하니 요즘 집안의 바느질이란 바느질은 다 네가 하고 있다지?」

바느질감에 고정되어 있는 그의 눈이 휘은의 얼굴로 옮겨갔다.

「그저 파적삼아 조금 거들고 있을 뿐입니다.」

「누가 네게 이딴 걸 하라 하더냐?」

적유는 단 한 번의 동작으로 탁자 위에 있던 옷가지들을 쓸어버렸다. 옷가지들이 저만큼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휘은은 침착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제가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인지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연에게 일러 바느질감을 찾아오도록 한 것이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도 무료했거니와 공짜로 밥을 축내기도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