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단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둘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단비 우산, 기빈이 우산, 우리 둘 우산.”' “단비야, 단비야. 너 그거 알아? 원래 신데렐라가 백설 공주였다는 거. 백설 공주가 신데렐라 왕자님한테 반해서 신데렐라한테 너 백설 공주 하라고 하고 자기가 신데렐라인 척 해서 왕자님이랑 결혼한 거래.”' “단비야, 우리 외삼촌 집에 이따만한 강아지 있다. 진짜로 이따 만큼 크다니깐! 내가 우리 엄마한테 말해서 다음에 너도 데리고 가자고 할게. 진짜로 이따만해.”' “단비야, 우리 결혼하자! 내가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거래. 그래서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너랑 나도 할 수 있댔어. 우리 꼭 결혼하자!”' “단비야, 괜찮아? 감기 걸렸다며. 너 방에 침대 밑에 꼬마 도깨비 잡았어? 그거 안 잡으면 꼬마 도깨비가 계속 아프게 한데! 넌 겁이 많으니까 내가 가서 잡아줄게! 기다리고 있어!”' “어이, 송단비! 여중 가더니 좀 얌전해졌어? 나 교복 진짜 잘 어울리지. 형이 그러는데 교복이 잘 어울리면 무슨 옷이든 다 잘 어울리는 거라더라.”' “괜찮아, 쏭. 힘내. 일단 해보는 거야! 시험 좀 못 봤다고 누가 잡아먹어? 겁먹지 마. 세상에 견디지 못 할 고통은 없어. 신이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니라니깐. 하면 다 된단다.”' “여, 쏭. 고등학교 원서 어디 넣었어? 넌 얼굴도 별로 안 예쁜 게 공부도 못하면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갈라고 그러냐. 미리미리 대책을 세워야지. 뭐 특별히 모난 짓 안 하면 내가 데리고 살아줄 수도 있고.”' “쏭, 그거 먹어서 배가 불러? 많이 먹어, 많이. 난 뭐든 크고 많은 게 좋아. 동물도 코끼리가 제일 좋아. 야, 몰라서 그렇지 호랭이랑 사자랑 코끼리랑 싸움 붙이면 코끼리가 다 이겨.”' “쏭, 넌 중학교 때 이후로 키가 안 커? 나는 이렇게 멈출 줄 모르고 쑥쑥 자라는데. 내가 그만 커야지 네가 너무 밑에 있어서 힘들다.”' “야, 쏭! 너 치마가 너무 짧다? 너희 학교는 이런 거 단속도 안 해? 귀찮아하지 말고 말 좀 들어! 뭐, 네 다리가 예쁘면 얼마나 예쁘다고 이렇게 다 보여주고 다녀. 내일 당장 치마 늘려.”' “쏭, 너희 반에 유진희라고 있지? 걔가 우리 학교 애들이랑 미팅 하자고 하던데 너 나갈 거야? 아니, 너 나간다고 하면 나도 나갈까 해서. 야, 거기까지 가서 너랑 내가 왜 짝을 하겠어? 그냥 너 미팅 나가면 나 심심하니까 그렇지. 내가 왜 널 감시 하냐!”' “쏭, 너 나 말고 너를 쏭이라고 부르는 사람 있어? 없어? 그냥, 물어봤어. 그냥 혹시나 해서 그러는 건데 누가 그렇게 불러도 대꾸하지 마. 그냥 그러려니 해!”' “야……! 송단비!”' “하아……단비야……. 울지 마……울지 마…….”' 삐―' 19살 늦은 가을. 비가 내렸다.' 태어나서 처음 겪은 시련. 그와 함께 동반한 괴로움. 아픔. 슬픔. 아련함.' 기빈의 얼굴을 다 가려버린 하얀 천이 왜 그토록 깨끗한지 그 천 앞에서 오열하는 기빈의 부모님 눈치를 보며 이를 악문 나는 왜 이토록 더러운 건지. 세상은 왜 이따위로 돌아가는지.''1.' “단비, 담배 피우니?”' 단비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름도 잘 알 수 없는 선배가 웃으며 흡연실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단비는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담배 각을 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거…… 리틀 시가니?”' 담배 각을 넣은 가방을 내려다보던 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담배의 종류라던가,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단비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독하지 않아?”' 단비가 손에 들린 담배를 바라봤다. 갈색의 필터가 빨간불을 반짝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 “독해요.”' 뭔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지 선배의 입술이 들썩였다. 하지만 단비는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자 선배가 원래 묻고 싶었던 것과 다른 걸 묻는 듯 무심한 투로 말했다. ' “수업 없어?”' “늦어서 쉬는 시간에 들어가려고요.”'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잠에서 깨어 보니 9시 반이었다.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학교에 오긴 왔는데 강의 중간에 들어가기가 싫어 별관 옥상에 마련되어 있는 흡연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 이 흡연실은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한 겨울에는 감히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불기도 했다. 처음엔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시간은 늘 여기서 때웠다. 하지만 자꾸만 담배 연기를 맡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담배가 궁금해졌다. 누군가가 담배 연기는 눈에 보이는 한숨이라고 했다.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제대로 숨을 내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시중에서 구하기 쉬운 담배들을 피웠다. 그러다가 리틀 시가라 불리는 블랙스톤 체리 향을 맛보곤 그 뒤론 늘 이 담배만을 피워왔다. 독하지만 달짝지근한 맛이 나쁘지 않았다.' 말이 끊기고 난 뒤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시간은 짧지만 어색한 사람과 둘이 있을 땐 담배는 잘 타지 않는 것 같았다. ' “안 내려가니?”' 담배를 다 피웠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묻는 선배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가 다시 건물로 들어가고 벤치에 앉은 단비가 불어오는 바람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어디야!>' 문자 메시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귀에선 문주가 소리치는 게 들리는 것 같았다. 등골이 오싹해진 단비가 텅 빈 흡연실을 한 번 둘러보고 답 메시지를 작성했다.' <흡연실. 쉬는 시간에 전화해, 그때 들어갈게.>' 이종사촌으로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다니고 있는 문주는 단비에겐 귀찮은 존재였다. 매번 간섭이 심하고 항상 잔소리가 늘어져 단비를 괴롭혔다. 아무리 단비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지만 받아들이는 단비가 내키지 않는 이상 둘의 사이가 좋아질 수는 없었다. '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도대체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단비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진동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했더니 전화가 걸려왔다. ‘소심한 스토커’ ' “여보세요.” ' [어디야?]' “학교.”' [수업 안 해?]' “지각해서 그냥 시간 때우고 있어.”' [이따 학교 앞으로 갈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냥 공원에서 만나. 끝나고 갈 때 연락할게.”' [그럴래? 그럼 전화해.]' 어수룩한 음성이 끊어지고 단비는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교제 두 달째에 접어들고 있는 장민의 태도는 늘 단비를 답답하게 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장민은 언제나 단비에게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는 장민의 모습은 단비의 숨통을 죄었다.' 애초에 이런 교제를 왜 시작했는지 죄책감이 단비를 사로잡았다. 반 년 정도 자신을 쫓아다닌 장민과 이제 조금씩 다른 사람을 만나 보라는 문주의 호들갑이 단비를 그런 기분이 들게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고, 자신의 마음을 줘야 한다는 기분에 덜컥 사귀기로 했지만 후회는 조금의 틈도 없이 바로 밀려왔다. 곧바로 이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불안함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장민을 보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장민이 먼저 말해줬으면 했지만 그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 의자 위에 축 늘어진 단비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흐릿해지는 기빈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기빈의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 망연자실해서 손을 내린 단비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문주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 “쉬는 시간이야?”' [수업 끝났어. 내려 와.]' 차가운 문주의 음성에 단비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아직 수업이 끝나면 안 되는데 당황스러움에 잽싸게 가방을 챙겨 들고 비상계단을 통해 과 사무실이 있는 5층으로 내려갔다. 과 사무실 앞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문주의 날카로운 시선에 단비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주의 옆에 앉았다.' “왜 끝났어? 아직 시간 안 됐잖아.”' “교수님 일 있으시대. 너 학교 졸업할 마음은 있어?”' 단비가 어떻게 그렇게 당연한 걸 물을 수 있냐는 시선으로 문주를 쳐다보다가 기지개를 켜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짜증낸다고 해결 되는 거 아니잖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야, 송단비.”' “알았어. 내일부턴 지각 안 하고 잘 나오면 되잖아.”' 문주는 하고 싶은 잔소리는 많지만 한다고 들을 단비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단비의 뒤를 따랐다. 아닌 것처럼 보이려 하지만 단비에게선 여느 사람들에겐 없는 고독이 보였다. 어쩌면 단비의 사연을 알기에 그런지도 몰랐지만 자신이 보고 있는 고독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니까 과에서 누구도 단비에게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오늘 뚝배기 불고기 나왔으면 좋겠다. 메뉴 마음에 안 들면 학교 앞에 나가서 먹고 올까?”' 단비가 식당이 있는 학생관에 들어서며 뒤따라오는 문주를 돌아보고 얘길 하다가 학생관에서 나오던 사람과 부딪혔다. 고개를 꾸벅 숙여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데 뒤에서 문주가 단비와 부딪혔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 “이번에 복학 하시는 거예요?”' “응. 너 지금 몇 학년이지?”' “2학년이요. 선배님도 2학년 2학기 복학 하시는 거죠?”' “글쎄. 상황 좀 봐서.”' 계단 난간에 기대 문주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등 뒤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인상의 남자를 보며 누구였는지 고민에 빠진 단비를 보며 문주가 한숨을 내쉬며 인사를 시켰다.' “서재하 선배님. 알지?”' 단비가 알 턱 있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재하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볼 일은 끝났으니 메뉴 확인을 하러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한 단비가 등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오르다가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쟤, 누구지? 송단비? 맞나? 송단비, 쏭?”' 머뭇머뭇거리며 차근차근 뱉은 재하의 음성에 단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단비가 맞는다는 문주의 확인에 재하가 다시 단비를 불렀다. ‘송단비’라든가 ‘단비야’라든가 ‘어이’라든가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많은데도 재하는 마치 애초에 단비를 부르는 호칭은 그것뿐이라는 듯 당당하게 단비를 불러 젖혔다.' “쏭! 선배를 보고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단비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문주가 단비를 질책하는 소리를 해도, 어째서인지 커다란 소리로 호탕하게 웃는 재하 선배의 소리도 무시한 채 계단을 올랐다. 이대로 이 계단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데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자주 학교에 드나들었기에 재하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말을 섞은 적도 없었고, 문주를 제외한 사람들과의 교류는 없었기에 자신을 알릴 일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긴 하지만 문주 역시 단비 외의 사람과 관계가 자유로운 건 아니기 때문에 단비에 대해 얘기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은 친근하게 자신을 떠올리고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쏭’이라는 호칭을 골랐을까. '*' “무슨 생각해?”'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자신의 팔을 치는 문주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진 단비가 고개를 저었다. ' “오늘 저녁에 떡볶이 해먹을까? 이모 오늘도 늦으신대?”' “몰라. 나 장민이 만나기로 했어.”' “데이트? 뭐 할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