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대 외곽 클럽 샤인.'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태주의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여기 물 왜 이렇게 나빠졌어? 수질오염인 거냐.”'그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클럽의 음악 사이로 금방 파묻혔지만 그 내용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 말을 주워들은 클럽 매니저와 웨이터들이 다가와 태주의 일행 앞에 굽실거렸다.'“대체 무슨 일이십니까?”'클럽의 매니저는 성난 매의 눈을 하고 어지러운 클럽 안을 낱낱이 살폈다. 성태주의 눈에 거스를 만한 문제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태주 씨, 왜 그래?”'태주의 곁에 있던 미현이 팔짱을 끼었다. 쀼루퉁한 미현의 얼굴은 상당히 귀엽고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태주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더 깊어졌다. 매니저는 직감적으로 미현이란 이 여자 때문에 성태주의 심기가 나빠졌다는 것을 짐작했다.'“물이 나빠졌어, 물이!”'성태주는 검은 슈트를 열어젖히고 목을 죄던 스트라이프 셔츠의 단추를 마구 풀어헤쳤다. 하지만 매니저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도 미현에게 손도 대지 못했다.'빌어먹을, 배경이 다냐. 태주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미현이 숱한 가수 지망생들 중 하나이고 동시에 모 기업 사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술맛이 확 떨어졌다. 냉수를 단번에 들이켜자 미현은 태주의 어깨에 한쪽 팔을 얹으며 다른 한 손을 그의 가슴팍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태주의 셔츠 사이로 들어가 태주의 맨가슴 쪽으로 이동했다.'“태주 씨, 오늘 밤에 뭐 해?”'짙은 향수 냄새가 가득하다. 태주가 고개를 숙이자 미현의 깊게 패인 탱크 탑 사이로 하얗게 솟아올라 있는 풍만한 가슴이 보였다.'“태주 씨, 오늘 나랑 같이 안 갈래?”'미현이 그의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그는 무신경했다. 전혀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셔츠 사이를 헤집는 미현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과 손을 잡아 빼며 그는 미현을 옆으로 밀쳤다.'“저리 가.”'“태주 씨.”'“꺼지지 못해?”'그의 말은 낮았지만 위력이 강했다. 미현은 불만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뒤로 물러나 태주의 기분이 나아지길 기다리려는 듯했다. 마침 홀에서 춤을 잔뜩 추고 돌아온 친구, 이호가 태주의 심상치 않은 상태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왜, 너 무슨 일 있냐?”'댄스 음악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휘황찬란한 사이키 조명 덕분에 내려다보이는 1층 홀은 너무나 어지러웠다. 음악 소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고막을 찢을 것처럼 쿵쾅거렸고 실내의 밀폐된 공기 때문에 머리가 저절로 띵해졌다. 더 커진 음악 소리와 현란한 조명 때문인지 태주의 기분이며 몸 상태는 최악으로 변했다.'왠지 모든 것이 성가셨다. 건드리면 그는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젠장.”'태주는 벌떡 일어났다.'“어디 가냐?”'친구들이 일제히 합창을 하듯 물었다.'“집.”'태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킷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뒤에서 후다닥 쫓아오는 하이힐의 굽 소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보자 숨을 헐떡이며 아찔한 스트랩슈즈에 휘청거리는 미현이 서 있었다.'“태주 씨, 정말 이러기야?”'태주는 멀뚱히 미현의 앙증맞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풍만한 몸매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길고 아찔한 다리. 가수 지망생이었던가, 모델? 아니면 탤런트?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미현의 섣부른 행동은 거슬렸다.'태주는 미간을 짓누르며 미현을 응시했다. 자신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저 눈매.'기분 나빴다.'“나, 너 놀이 상대 아냐. 너희 집 배경이 빵빵하면 스폰서 찾는 것도 아닐 테고 하룻밤 놀다 치울 거면 아서라. 그딴 거 재미없거든?”'“뭐?”'미현의 말문이 막힌 듯했다. 태주는 말을 계속했다.'“아, 그리고 내가 얼굴 반반한 건 사실이지만 너랑 엮일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나랑 사귄다고 설레발치지도 마라. 당하는 사람 기분 나쁘니까.”'태주의 인상은 더 일그러졌다.'“내가 조폭 아들인 건 맞고 여기저기서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게 맞긴 한데, 너랑 나랑 무슨 사이기나 하냐. 잠을 같이 자길 했어, 사귀길 했어? 막말로 잠을 잤다 한들 원나잇 스탠드고 엔조이지, 마누라 같이 굴면 짜증나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화장실에서 떠드는 거 다 들었거든. 소미현, 나 너한테 돈 주고 몸 주고 할 만큼 풍요롭고 시간 많은 인생이 아니라서 말이야.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오케이?”'미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할까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큰 보폭으로 사라져 가는 태주의 등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야, 성태주! 넌 뭐가 그리 잘났냐! 반반한 건 면상뿐이잖아! 너야말로 천벌이나 받아라!”'태주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화답했다.'미현아, 엿 먹어라.'멀리서 미현이 발을 동동 구르며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성량도 작고 목소리도 곱기는커녕 녹슨 듯 빽빽거리니 가수로 데뷔하면 말아먹을 것 같다고 태주는 생각했다.'그는 어느새 지상 주차장에 도착했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태주는 미간을 짓누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지만 지상 주차장의 낮은 펜스 너머로 클럽 의상을 화려하게 빼입은 젊은 남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들이 갸웃대는 걸로 봐선 초대장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고급 클럽 샤인을 구경이라도 해보려는 모양이었다. 태주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호주머니에서 아우디의 차 키를 꺼냈다가 잠시 멈췄다.'머리가 아픈데 운전을 제대로 할 자신도 없는데다 몸에는 잔뜩 술 냄새가 배어 있었다. 대리라도 불러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샤인의 매니저 황치수와 그 부하들이 다가왔다.'“도련님, 벌써 돌아가십니까.”'“불편하신 데가 있으셨다면 수정하겠습니다. 좀 더 노시다 가시지요.”'태주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됐어. 오늘은 몸이 안 좋으니 집에 갈 생각이야.”'클럽 매니저 황치수는 태주의 뒤를 힐끔거렸다.'“혼자 오셨습니까요? 형님은?”'형님이란, 채성파의 행동대장인 강성일을 말했다. 현재 강성일은 채성파의 막내 도련님이라 지칭되는 성태주를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태주는 도끼 강성일의 험악한 면상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아, 도끼를 말하는 거지? 지금 그 녀석 할 일 많아. 나 같은 놈 신경 쓸 겨를 없을걸.”'태주는 저도 모르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반듯하고 준수한 얼굴에서 나오는 미소는 연예인이나 모델과 견주어 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채성파의 핏줄을 부정하는 외모만큼이나 그가 내놓은 자식이라는 점은 꽤나 유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통으로 인해 태주의 미소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황치수는 태주의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했는지 무척이나 상냥한 목소리를 내었다.'“도련님, 차를 준비할까요.”'“됐어, 대리운전이나 불러.”'황치수는 자신의 뒤에 있던 어깨에게 고갯짓을 했다.'“비싼 차니까 조심해서 몰도록 해.”'“알겠습니다!”'태주는 차 키를 넘겨주고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석에는 클럽 샤인을 드나들며 몇 번 얼굴을 본 황치수의 부하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부드럽게 시동이 걸리자 태주는 피곤해진 나머지 눈을 감고 낮은 좌석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그리고 잠이 들었다.''국내 온건파 조직중 하나인 채성파의 회장, 성파호에게는 본부인에게서 얻은 두 아들과 몇 명의 사생아가 있었다. 성파호와 화류계 출신의 여성에서 태어난 태주는 외조부와 외조모 아래에서 자랐다. 10대가 되자 친부의 존재를 통보받고 친부의 호적에 입적되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생모 역시 몇 년에 한번 얼굴 보는 것조차 어려웠기에 성파호 회장과 친모 사이에 어떤 거래나 밀약이 있었는지도 전연 알지 못했다. '사실 누가 봐도 태주는 조직폭력배의 후계자 감은 아니었다. 외모가 반반하고 싸움을 잘 했지만 성파호 회장에게 후계자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태주는 무엇보다 머리가 나빴다. 부친인 성파호는 둘째 아들의 오른팔인 강성일을 태주에게 붙여주었지만 태주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조직보다는 음주가무에, 평생의 목표인 기둥서방이 되는 것에 관심을 썼다. '성태주는 노는 것만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그것도 눈만 높아서 똑똑하고 부잣집인 미인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태주는 호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깨어났다. 휴대폰을 꺼내 반사적으로 플립을 열고 귀에 대자, 강성일의 묵직하고 낮은 음성이 들렸다.'-거기 어디십니까?'“집으로 가는 거지. 삼성동의.”'태주는 잠에서 덜 깨어 머리가 멍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후 강성일이 대꾸했다.'-그 방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위치추적기라도 달아 놓았냐고 반문하려 했지만 성일의 당혹해하는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도 모를 위기감에 잠기운이 모두 달아났다.'차는 멈춰 있었다. 운전석에는 사람도 없고 운전석의 문이 열려 있었다. 새벽시간, 고급 주택가의 인근도로에는 차도 없고 사람도 하나 없었다. 그 흔한 교통 표지판이나 길을 알려주는 팻말, 편의점조차 보이지 않았다.'태주는 위험을 느끼고 재빠르게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건 뒤 빠르게 차를 후진시켰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채 20미터도 벗어나지 못했을 무렵,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검은 세단 한 대가 태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재빠르게 핸들을 돌리며 후진했지만 반대편 차선으로도 차가 접근해 오며 퇴로를 막았다. 핸들을 거칠게 돌렸지만 등 뒤에서 돌진해 오는 차를 미처 보지 못했다.'쿠웅!'뒤차가 자신의 차를 들이받았다. 태주의 몸이 흔들렸다. 안전벨트를 했지만 등 뒤에서 전력으로 전달되는 충격을 무시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젠장!”'자신을 추격해 온 자들만 해도 차량으로 두 대 이상. 아니, 더 있을까.'-괜찮으십니까, 도련님!'성일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대꾸할 수 없었다. 태주는 핸들을 다시 거칠게 꺾었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아우디의 뒤쪽 범퍼에 다시금 온몸을 들이박는 차 덕분에 액셀러레이터를 헛발질했다.'끼이이익!'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속도를 내고야 말았다.'아우디는 곧장 전신주를 들이받았다.'콰앙!'그리고 에어백이 터졌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에어백의 압박이 그의 폐를 짓누르는 동안, 누군가 차 문을 열고 빈사상태의 태주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자들이 몇인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태주는 기억해내려 했지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등진 몇 개의 실루엣들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 사이로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보인다. 환각일까, 아닐까.'그들이 태주를 쓰러뜨리고 일제히 발길질을 했다. 의식이 언제 끊어졌는지 그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를 지켜보던 눈이 큰 소녀는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너는 누구지?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의식을 놓았다.''태주는 자신이 감금된 사방이 캄캄한 밀실을 둘러보았다. 창문도 없이 유일한 통로인 철문은 굳게 닫혀 있어 몇 번이나 몸을 부딪쳐도 부서질 기색 따위는 없었다. 철문 아래로 간혹 빛이 새어들기는 했지만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각이 돌아오면서 그는 더 고통스러워졌다.'어딘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았지만 움직이려 할수록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지독한 통증이 뒤따랐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고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몸을 약간이나마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대고 열을 식혀 보는 것이 태주가 할 수 있는 치료의 전부였다. '게다가 외부와 연락 가능한 휴대폰은커녕 끈으로 쓸 넥타이마저 없었다. '태주는 이를 갈았다.'“빌어먹을, 날 납치한 놈들에 대해서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납치범들이 채성파의 적이라 해도 태주는 조직의 내부 사정에 대해선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아니, 일부러 관심도 두지 않으려 했는데. '“21세기에 왜 조폭 가업을 물려받으란 거야? 이래서 싫었다고!” '멋대로 중얼거리며 태주는 어둑어둑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말하는 것마저 목이 깔깔하게 느껴진다. 시야가 멋대로 흔들리는 것이나 찰과상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문제는 심각한 두통과 온몸에서 나는 지독한 열기였다. 설마, 천하의 성태주가 감기나 폐렴으로 앓다가 죽는 건 아니겠지? '“하아.”'탈출해야겠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지?'태주는 몽롱한 상태에서 벽을 디디고 일어났다. 문으로 다가가자 잡혀 올 때부터 느꼈던 이질적인 냄새만큼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비린내, 강한 소금 내.'바다가 지척에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