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같은 얼굴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진한 눈썹 아래에 자로 잰 듯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눈과 긴 속눈썹, 오뚝한 코와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은 아무리 봐도 현실감이 없다.'그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아예 기억 속에서 사라진 존재였다.'어린 날, 잠깐 품었던 동경.'아무런 접점이 없어 졸업하는 동시에 끝나게 될, 이름과 얼굴만 아는 사이.'그게 그와의 관계였다.''' + + +'''해가 뜰 때까지 원고를 수정한데다가 감기 기운까지 있어서, 휴대폰 울리는 소리에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 어떡해.'아이유의 귀여운 목소리에,'‘정말 어떡하냐. 잠이 안 깨는데.’라고 생각하며 베개 근처를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스마트폰으로 바꾼 후엔, 잠결에 전화를 받는 게 더 힘들어졌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간신히 액정에 뜬 통화 버튼을 미는 걸 성공했다.'“여보세요…….”'정돈되지 않은 쉰 목소리에, 전화를 건 상대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자는 중이었어?]'“아니, 이제 일어났어. 영진 오빠야?”'영진은 용랑 출판사 기획팀 팀장으로, 최근에는 여성 잡지 기획을 맡고 있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아련은 전에 영진이 기획했던 맛집 정보 잡지에서 일한 걸 계기로 영진과 ‘오빠, 동생’하는 사이가 됐다.'[그래, 인마. 뭘 이 시간까지 자냐? 어제 또 밤 샜어?]'“그렇지, 뭐. 무슨 일이야?”'아련은 상체를 일으키며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커피 잔 두 개, 아직도 켜져 있는 넷북, 재떨이에 쌓인 꽁초, 빈 담배 케이스. 지난밤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가 남아 있었다.'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붙이고, 한 손으로 넷북을 끄며 다른 한 손으로 담배 케이스가 정말 비었는지 확인했다. 탈탈 털자 떨어지는 건 부스러진 갈색 담뱃잎뿐이다.'[이번에 기획하는 게 있어서 일을 좀 맡기고 싶은데…….]'아직도 잠이 덜 깬 귀로 영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련은 “응, 응.” 건성으로 대답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담배를 못 피우니, 커피라도 마셔서 잠을 좀 깨야겠다.'어제 내려놓은 식은 원두커피를 머그잔에 한가득 부어 꿀꺽꿀꺽 마셨더니, 잠이 좀 깼다. 맛은 없지만, 미리 내려두길 잘했다.'영진의 목소리가 한결 또렷하게 들렸다.'[어때? 같이 해보자.]'중요한 부분은 다 놓쳤다.'아련은 다이어리와 펜을 들고 와 바(bar)형 테이블에 앉아 물었다.'“다시 한 번 말해 줘.”'[너 잠 덜 깼지?]'영진은 자기 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는데도 불쾌한 기색을 비치진 않았다. 그저 “어쩌겠냐. 너만큼 글을 맛깔나게 쓰는 사람을 구하기가 힘든데.”라고 혀를 차며 지금까지 했던 얘기를 다시 한 번 하기 시작했다.'[요샌 여성들도 창업에 관심이 많잖아. 그래서 요새 뜨고 있는 CEO들을 인터뷰하려고 하는데, 이왕이면 젊은 남자 CEO들이 관심을 끌지 않겠냐?]'“응, 그렇겠네. 섭외는 해놨어?”'[응. 여섯 명.]'“한 번에 다 실을 거야?”'[두 명이나 세 명씩 나눠서. 기획 괜찮지? 같이 해볼래?]'“좋아. 재밌겠네. 젊은 CEO라니. 이참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확 물어 버릴까?”'[하하하하. 그래, 그래. 넌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정말 미인이잖냐.]'“닥치시고요. 기획안 메일로 보내줘. 읽어 보고 출판사로 갈게. 오늘 저녁 어때?”'[좋지. 술도 한잔하자.]'전화를 끊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산 지 꽤 된 컴퓨터는 부팅 시간이 오래 걸렸다. 꽤 성능 좋은 컴퓨터였지만 지속적인 게임 플레이 때문에 많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웅웅, 힘겨운 소리를 토해내며 모니터가 밝아졌다.'넷북이 더 빠르긴 하지만 문서를 확인할 때는 데스크톱으로 하는 게 훨씬 편하다. 대부분 게임용으로 사용하는 데스크톱이긴 하지만.'‘이번에 돈 들어오면 컴퓨터 바꿔야겠네.’'어제 이불을 제대로 덮고 자지 않아서 감기 기운이 살짝 있었다. 목이 칼칼해서 음, 음, 헛기침을 하며 메일함을 열었다.'영진이 보낸 파일은 두 개. 하나엔 이번 기획의 원대한 목표와 취지, 주의사항 등이, 두 번째 파일엔 인터뷰할 CEO의 인적사항과 그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것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아련은 인터넷에 CEO들의 회사에 대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선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갈 필요가 있었다.'CEO들은 자기 회사의 업무와 중요성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관심을 보일수록 더 신나서 인터뷰에 임해 준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CEO라도 결국은 칭찬에 약한 인간일 뿐이다.'젊은 사장들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 이제 서른 살이 된 아련과 비슷한 나이였다. 특히 게임 개발을 하다가 게임 회사를 차려 성공한 26살의 CEO는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연봉 2억 이상을 번단다.'“좋겠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내로라하는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와, 장학금까지 받아가며 공부한 끝에 연 3, 4천만 원을 겨우 버는 프리랜서 아련과는 차원이 달랐다.'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런 고액 연봉자들을 보면 기분이 착잡해졌다.'“흐응. 이 남자는 나랑 같은 나이네.”'국내 최대의 기업 GS그룹의 자회사인 스포츠용품 전문 회사 KGS를 2년 만에 급부상시킨 서른 살의 CEO. 알려진 게 많지 않지만 GS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님.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아, 언론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음.'김시우라는 이름이었다.'흔한 이름이라 그런지,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한 번 해본 적 없는 남자였기에, 인터넷에서도 사진을 구할 수가 없었다.'“되게 못생겼나?”'젊은 나이에 성공한 CEO라고 하면 현빈이나 원빈처럼 멋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만, 사실 이번에 인터뷰하는 CEO들 중에 그럴싸한 인물은 별로 없었다. 게임 회사를 차린 26살짜리가 그나마 나았지만,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남자들 정도의 외모일 뿐이다.'그러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못생겨서 외모를 공개하지 않는 CEO도 존재할 법 했다.'“그런 인간이 웬일로 인터뷰를 다 응해 주셨대?”'어쨌든 GS그룹은 국내에서 가장 큰 기업이다. 전자 제품에서 시작해 이불이나 그릇 같은 생필품까지, GS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KGS는 GS의 자회사이니, 김시우라는 CEO의 능력이 대단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더욱 커질 게 틀림없다.'“잘 보여 둬야겠네. 하여간 대단들 하셔. 나랑 비슷한 나인데 이렇게 많이 벌고. 아, 부럽다, 부러워. 집도 엄청 크겠지?”'자신의 방을 돌아봤다. 전세로 얻은 18평짜리 오피스텔. 보안이 잘 되어 있다는 것과 빛이 잘 들어온다는 것 빼고는 내세울 게 없는 집이었다.'18평이라도 깨끗하게 치우고 살면 넓어 보이겠지만, 아련은 청소와는 거리가 멀었다.'좁은 거실에 간신히 들여놓은 소파 위는 며칠 전 입고 나갔다가 그대로 벗어 놓은 옷들로 앉을 곳을 찾아볼 수 없었고, 바닥엔 먼지가 굴러다녔다. 거실 한 면을 다 차지하는 넓은 창문 앞은 과자 봉지와 맥주병들이 굴러다녔다.'저절로 썩소가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던 아련은 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걸 깨닫곤 욕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