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장을 봐서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쳐 정성스레 제사상을 준비하느라 아주 허리가 댕강 끊어지겠다. '사실 엄마는 전이며 나물 같은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뚝뚝 뜯어 넣은 얼큰한 고추장 수제비나 피자, 그리고 탕수육 같은 걸 좋아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사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는 걸.'근데 누가 만든 법인지 참 고루하다. 어차피 죽은 사람을 위해 상을 차리는 거면 그 사람이 살아생전 좋아했던 걸로 음식을 준비해야지, 왜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과 별반 다름없는 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다면서 또 작년과 똑같이 제사상을 차리고 있다. 아무튼 나도 웃긴다.'“엄마, 내년엔 엄마 좋아하는 걸로 차려 줄게.”'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있을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뭐 그런다고 기죽을 내가 아니다. '상 위에 미리 갖다 놓은 엄마의 사진을 향해 씨익 웃으며 V자를 날렸다. 철썩, 하고 등짝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영 허전하긴 하다.'동네 아줌마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눈부신 미모의 소유자였던 엄마는, 당신을 닮지 않은 평범한 나를 참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나를 미용실이며 시장으로 어지간히도 끌고 다녔다.'여자는 자고로 죽는 날까지 꾸며야 하는 거라며 징그럽게도 잔소리를 해 댔다. 아마 엄마에게 돈이 많았다면 중학교 졸업 선물로 전신 성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빠지지 않는 외모인데 엄마는 늘 못난이라고 놀렸다. 가끔 길에서 만나면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암튼 특이한 엄마였다. '딩동.'싱크대에서 접시를 꺼내다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그릇을 전부 깨뜨릴 뻔했다.'“엄마야, 애 떨어질 뻔했네.”'간신히 접시들을 식탁에 내려놓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다독였다. 초인종 소리에 놀라기는 또 처음이다.'딩동.'신성한 제삿날 누가 경박스럽게 초인종을 눌러 대는 건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마당으로 나갔다.'“누구세요?”'“옆집인데 잠깐 문 좀 열어 주세요.”'옆집? 아파트도 아닌데 옆집이라고 하면 누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문을 열었다. '“무슨 일…….”'대문을 열자 생전 처음 보는 여자 둘이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두 여자는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장 나를 밀치고 구두를 신은 발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가 없어 황급히 두 여자들을 따라 들어가자 주인처럼 두 여자가 거실을 차지하고 서 있었다.'“이것 봐요, 누구신데…….”'짝!'내 머리가 홱하니 돌아갔다. 생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과 동시에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뺨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얼얼하고 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 '“남의 가정 파탄 낸 년이 그깟 따귀 한 대 맞았다고 억울해?”'남의 가정은 뭐고 또 파탄은 뭐란 말인지,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웬 미친 여자가 한밤중에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라고밖에는.'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침을 꿀꺽 넘겨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아직도 뺨이 얼얼하다.'“누군지, 왜 여길 찾아와 이런 행패를 벌이는 건지 설명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침착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너무 놀란 탓인지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행패? 너 지금 행패라고 했어?”'내 따귀를 때린 삼십 대 초반의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씩씩거리던, 따귀를 때린 여자보다 더 짙은 화장에 화려한 꽃무늬 투피스를 입은 여자가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해 댔다. 손가락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나는 움찔했다. '“당신 뭐, 뭐야? 미친년이야?”'“미친년? 그래, 쓰레기 같은 년하고 바람난 남편 때문에 미친년이다, 왜?”'순식간에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얼떨결에 머리채를 붙잡힌 나는 방향을 잃고 비틀거렸다.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웨이브 머리의 치맛자락을 손으로 잡았지만 이내 놓치고 말았다. '“네까짓 게 감히 내 남편을 홀려?”'“아악! 이거 놔!”'눈이 뒤집혀 내 머리채를 휘어잡은 웨이브 머리에게 나도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닥치는 대로 손을 휘젓고 머리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웨이브 머리는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았다. '발버둥을 쳐도 벗어나지지 않는다. 머리칼이 다 뽑힐 것 같은 통증에 살갗이 아리다. 악을 쓰는 여자 때문에 골이 울리고 귀가 먹먹하다. 머리채를 잡은 것도 모자라 옆에서 구경하던 꽃무늬 투피스의 여자도 덩달아 내 등을 후려쳤다. '“안 놔? 놔!”'거실에 내다 놓은 과일이 여자들의 발길질에 내동댕이쳐졌다. 좋은 과일 사려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농수산물 시장까지 가서 사 온 건데.'“놔!”'있는 힘껏 웨이브 머리의 가슴을 밀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웨이브 머리가 넘어지듯 벽에 부딪쳤다. 꽃무늬 투피스가 놀라서 넘어진 여자에게 달려갔다. 괜찮으냐고 물으며 넘어져 있던 여자를 부축하던 꽃무늬 투피스가 살벌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손톱에 칠해진 빨간 매니큐어만큼이나 섬뜩한 눈빛이다.'“당신들 뭐야? 뭐냐고!”'원래 억울한 일을 당해도 대놓고 말도 못하는 숙맥인 내가 고막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내 소리에 나도 놀랐다.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 당장!”'한 번 소리를 지르고 나니까 무서울 게 없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두 여자를 노려봤다. 한 번도 이런 어이없는 꼴은 당해 본 적이 없다. 기가 막히고 살이 떨려 눈이 돌아가겠다.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면서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112를 눌렀다.'“거기 경찰서…….”'“박동석.”'웨이브 머리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핏발이 선 눈으로 경찰을 찾던 나는 웨이브 머리에게 시선을 돌렸다.'“박동석이가 내 남편이라고.”'뚜뚜뚜뚜…….'내 손가락이 어느새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박동석이 내 남편이라고!”'웨이브 머리가 소리를 지르면서 내 앞에서 무너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우는 여자를 나는 멍하니 쳐다만 봤다. 그때서야 멍한 내 눈에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러 온 사람치고는 꽤나 단정해 보이는 여자의 차림새가 들어왔다. '아마도 남편의 여자 앞에서 꿀리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 같다. 보드라운 소재의 블라우스와 다리 라인이 매끄러워 보이는 짝 달라붙는 스커트를 입은 여자를 망연자실한 눈으로 오래도록 쳐다봤다.'“네가 좋다고 만나고 다닌 놈이 얘 남편이라고!”'꽃무늬 투피스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불과 몇 시간 전에 통화를 했던,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 남자 박동석이가 유부남이라는 말이었다. 지금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울고 있는 저 여자의 남편……. 느닷없이 뺨을 맞았을 때보다 더 황당하다.'“아아아악!”'웨이브 머리가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서 미친 듯이 울어 댔다. 이 상황이 그 여자에게 피를 토하게 가슴 찢기는 일이고 자존심이 쩍쩍 갈라지는 상처겠지만 나 역시도 그녀 못지않다. 그 사람이 유부남일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단 한 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이건 지독한 악몽이다. ''웨이브 머리, 그러니까 박동석의 와이프와 꽃무늬 투피스가 한 번 더 박동석을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돌아가고 엉망이 된 거실을 치웠다.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진 것들을 품 안에 주워 담았다. 움푹 생채기가 난 사과를 손으로 집어 드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머릿속이 하얗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까지는 전달이 덜 됐다. 여자들이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간 거실이 눈물에 가려 흐릿해졌다. 나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품에 끌어안고 있던 것들이 또르르 바닥을 구른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얻어맞은 뺨은 얼얼하고 머릿속은 아릿하다. 그리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아프다. 고장 난 수도처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손등으로 훔쳐 내도 그치질 않는다. 하하, 소리가 나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전히 심장이 아프다.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퍽퍽퍽, 가슴을 치는 소리가 머리까지 울린다. 꽉 막혔던 덩어리가 토해져 나오고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에 멋대로 뒤엉킨 숨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