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갑자기 자신 앞을 가로막고 서 버린 검은 차량에 깜짝 놀란 도희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교정 안이었다. 서행하던 차량이라 그나마 큰 사고는 없었지만 멍한 정신으로 걷는 자신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르바이트를 줄여야겠다! 생각하며 차량을 돌아 지나가려던 도희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자신 앞에 서 있던 차량의 운전석문이 열리더니 검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내렸기 때문이다. '“멋지다.”'남자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나온 말이었다. 다행히 목소리가 작았는지 남자는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크다. 자신 앞에 거목처럼 서 있는 남자로 인해 그늘이 생겼다. 입을 벌리고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도희는 순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나랑 싸우려고 차에서 내린 건 아니겠지?’'덜컥 겁이 났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자신에게 소리칠 것만 같아 어깨를 움츠린 도희의 귀에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희 씨?”'“네? 네. 제가 나도희…….”'예상을 빗나가서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어 당황스러웠다. 누구지? 이렇게 멋진 남자는 기억이 없다. 더구나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아르바이트에 치여 소개팅 한 번 해보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낯선 남자는 점점 경계심을 품게 만들었다.'“모시러 왔습니다. 타시지요.”'“저를요? 왜요?”'앞뒤 설명도 없이 차에 타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리 잘생긴 남자가 타란다고 냉큼 차에 오를 쉬운 여자는 아니었다. 물론 아주 조금은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아주 잠깐…….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예에?”'회장님? 자신이 알고 있는 회장은 학교 학생회장이 전부이다. 자신 주위에 눈 씻고 찾아봐도 제일 높은 직책은 아르바이트 가게 사장님까지였다. 그러니 회장님이라는 말은 생소한 단어일 뿐이다. '“저기……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 말씀하시면 다 이해하거든요. 이렇게 앞뒤 내용 다 자르고 결론만 말씀하시지 않으면 말이죠.”'이제 조금씩 짜증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잘난 용모에 정신이 팔렸지만 지금은 졸음이 싹 달아난 상태였다. 대화 또는 말싸움까지 가능한 상태였다.'“도희 씨 할머님께서 찾으십니다.”'띵하고 머릿속이 울렸다. 기가 막히다. 할머님이라니 세상 천애고아가 자신이었다. '“음…… 이름은 맞는데요. 번지수가 틀린 것 같군요. 전 고아거든요.”'“나도희. 나이 스물다섯. 태어나면서 버려져 열일곱 살까지 천사들의 집에서 컸고 그 뒤로 독립해서 지금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사학년 재학 중. 등록금 마련으로 세 학기를 쉬고 이번 가을학기 졸업. 더 말씀드릴까요?”'듣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려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뭐! 맞긴 하지만 틀린 것도 있네요. 저 태어나면서 버려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거예요. 두 분 다 친척이 없어서 고아원으로 간 것뿐이라고요!”'어느새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듣고 있던 그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가 뒷좌석 차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그러니 타시지요. 아가씨, 번지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한 도희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낮이었다. 가방을 메고 학생들이 지나다녔고 차량 통행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관심 가져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아는 사람도 없었다.'“안 타요!”'조금 세게 밀었나 보다. 차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차문을 열었다.'“강제로라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추한 꼴은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허! 지금 누구에게 협박이에요. 제가 그쪽 뭘 믿고 말 한마디에 따라가요. 이러는 거 분명 납치 아닌가요?”'“양복 잘 차려입고 대낮에 교정 안에서 고아를 납치한다고요? 저 역시 바보가 아닙니다. 아가씨, 조건이라면 납치당할 일 없을 겁니다.”'그의 말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내 조건이 어때서? 그녀의 표정은 딱 이러했다.'“이제 그만 하시고 빨리 타시지요. 퇴근 시간하고 맞물리면 도심을 빠져나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저녁 식사를 식기 전에 맛보고 싶다면 궁금한 것이 있어도 지금은 참아 주십시오. 모든 것은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이 남자 결론은 무조건 자신을 데리고 그 회장님 댁으로 갈 모양이었다. 도희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납치범이 아닌 것은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흔적은 남겨 두어야 했다.'“휴대폰 좀 빌려 주세요. 전화 한 통화만 하고 따라가죠.”'도희를 태운 차량은 도심을 빠져나와 시원스레 달리고 있었다. 봄이다. 한낮에는 조금 더웠으나 저녁노을을 보게 될 시간이면 활동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차 창문을 내리고 밖의 공기를 만끽하던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느긋함은 처음이다.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시험에 쫓겨 살아온 것이 전부인 그녀에게 잠시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회장님이라는 할머니의 친손녀가 아니어도 그만이었고 맞는다면 앞으로 고생은 끝일 것이다. 도희는 다만 이런 여유의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남자는 말없이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그쪽은 저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데 나는 그쪽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적어도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줘야 공평하지 않나요?”'꼭 궁금해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심심하고 불편할 뿐이었다.'“구 실장으로 부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