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째깍 울리는 초침 소리가 귓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날카롭다. 잠이 든 적이 없으면서도 눈을 뜨지 않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지 가늠해 본다. 사위가 어두운 것을 보면 해가 진 것은 분명했다. 좋아하는 달이 떴을 테고 어쩌면 얇은 구름이 허리에 걸쳐졌을 수도 있겠다. 눈을 뜨면 시계를 볼 수 있고 창밖의 달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하린은 쉽게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마도 엉망으로 감긴 실타래의 끝을 찾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무엇을 피해 달아났을까. 답은 가족도 선우도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마음에서 몰아치는 풍랑이 스스로를 가장 힘들게 하고 있었다.'“난 왜 여기에 있는 걸까.”'처음의 목적은 우리 관계의 재정립이었다. 선우를 사랑하고 선우도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은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선우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보통의 여자 혹은 사람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은 비슷한 사람들뿐이었고 지극히 개인주의를 추구하며 살았다. 물론 개중에는 마음이 맞아 친구가 된 이도 있지만 그들이 일반적이라고 믿고 살아온 하린에게 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단순한 문화의 차이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남을 순순히 믿는다는 것이 하린에게는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먼저 선을 긋고 감정을 차단한다. 그러면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선우를 만나면서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매 순간 확인한다. 지윤과의 다툼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릴 여자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가 자신을 나무라면 그것은 큰일이 되고 만다. 자신은 잘못한 것 같고 반성을 해야 하며 행동을 고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너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돼. 커다란 결함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매일 깨달아.’'예전에는 이대로도 좋았고 변하리라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 무의식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말을 듣지 않는 주인이 미워서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린은 쓰라린 가슴을 느끼며 명치끝을 살짝 문질렀다. 그래 이 느낌이다. 그 집에 가거나 이결을 만날 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와 같은 느낌이 지금도 들었다. 가족이 아니라고 울부짖으면서도 발가락 하나를 걸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내가 달라질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너와 나누는 온기를 타인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선우야. 난 자신이 없어. 내가 달라졌는데도 사람들이 그대로이면 어떡하지. 안 되는 것을 쉽게 납득하고 예전의 나로 돌아올 수 있을까. 더 단단한 갑옷을 장만하고 날카롭게 칼을 벼려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을 수 있을까. 내가 도망친 건 네 탓이 아니야.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무서웠던 거야.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하고 무신경한 얼굴로 살아왔지만 하나도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어. 나야말로 문제를 외면하고 숨기며 그렇게 살아온 거야.’'선우의 곁에 있으면 변하고 싶다는 갈망을 느끼게 된다. 아마 선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행복한 척 살았을지도 모른다. 돈이 많으니 죽을 때까지 고생할 일은 없을 테고 몇몇의 사람들만을 만나며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온기를 알아 버린 심장이 더 큰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행복이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하린은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 흐릿한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두꺼운 커튼이 창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쿡, 바보나 다름없네.”'하린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활짝 열었다. 서울과 다름없는 대도시의 야경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이라고 착각할 수 없도록 빨간빛의 도쿄타워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파리의 에펠탑과 흡사한 도쿄타워를 보며 하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너랑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어. 다른 사람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사람 말이야. 하지만 빨리 변하지는 못할 거야. 어쩌면 내 나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네가 계속 내 옆에서 용기를 줘.”'변화를 원하지만 얼마나 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조금씩 변할 수도 있고 끝내 고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넓은 세상으로 손을 뻗어 보고 싶다. 선우가 있는 곳으로 한 걸음 발을 떼면 몽글몽글한 따뜻함이 확 안길 것 같다. 문득 선우가 보고 싶어졌다. 눈 속을 파고드는 도시의 화려함보다 선우의 환한 웃음이 보고 싶었다. 하린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다시 돌아가자. 선우가 있는 따뜻한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