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오겠습니다!”'“이혜민! 아침은 먹고 가야지!”'“미안, 언니. 나 지금 출발해도 늦었어. 미안! 내일은 꼭 먹고 갈게!”'아침부터 우당탕거리며 2층을 뛰어 내려오는 혜민 덕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침 아침식사를 하던 중이라 식탁에 모여 앉아 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아빠 오늘부터 출장인데 인사도 안 드리고 갈 거야?”'“아! 맞다!”'혜민은 들고 있던 카디건과 파일, 가방 등을 모두 내려놓고는 얼른 아빠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식사를 잠시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를 뒤에서 꼭 끌어안은 뒤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아빠 조심해서 다녀와야 돼. 알았지? 내 초콜릿도 빼먹으면 안 되고요.”'“알았으니까 얼른 나가 봐. 늦었다며.”'“아 맞다! 나 늦었지. 아빠 도착해서 전화 꼭 해야 돼!”'집안의 활력소나 다름없는 막내딸이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를 잃어서 행여나 주눅 들고 자랄까봐 노심초사 했던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엄마의 빈자리까지 채우고자 사랑을 쏟아 부은 터라 아직도 어디 내놓기 불안했지만, 그래도 이 과장에게는 제일 눈에 밟히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먼저 일어나겠습니다.”'“너 다 먹었어?”'“아침이라 별로 생각 없어. 일찍 가서 봐야 할 것도 있고.”'은재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혜라는 알 것 같다는 식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은재를 따라 나섰다.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으니 척 보기만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뛰어 봤자 서로의 손바닥 안이라는 이야기였다.'“어제 듣기론 오늘 아침 수술은 없다고 들었는데 말이지.”'“누가 수술 있대? 일찍 가서 봐야 할 게 있다는 거지.”'“그게 뭘 까나. 나 갑자기 너무 궁금해. 어떻게 하지?”'“나간다. 먼저 나가겠습니다.”'먼저 나간다는 은재의 말에 이민호가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했다. 아무래도 볼 일이 있어 급하게 나가는 것 같아 보였으니 어차피 조금 뒤 병원에서 다시 볼 거 말이 길어질 필요 없었다. '“아빠! 저 배웅하고 들어올게요.”'배웅을 하고 들어오겠다면서 혜라가 따라 나서자 이민호의 입가에 괜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하도 붙어서 싸우기에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더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왜 따라 나와?”'“혜민이 아마 지하철 타러 갔을 거야.”'“…….”'“빨리 안 따라 가면 놓칠 텐데.”'“시끄러워. 참견쟁이 아줌마.”'“뭐? 아줌마! 야! 장은재!”'혜라가 반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은재는 차를 출발시켰다. 나이를 먹더니 괜한 참견만 늘어서 편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 단 하나 있었다. 오지랖 넓게 이것저것 다 간섭을 해서 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듣는 것. 이것 하나를 제외하고는 정말 편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혜라의 말대로 지하철을 타고 갈 예정이었는지, 역 근처에 다다랐을 쯤 은재는 혜민을 발견할 수 있었다.'은재가 경적을 크게 울리자 혜민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익숙한 차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시 걸어가려는데 이번에는 핸드폰이 울렸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은재였다. '“아! 늦었는데……. 여보세요?”'- 태워다 줄게.'“오빠 어딘데? 나 진짜 태워다 줄 거야?”'- 옆에. 늦었다며, 얼른 와.'낯익은 차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은재의 차였다. 혜민이 조수석에 오르자 은재는 말을 이었다.'“안전벨트.”'“아! 맞다. 오빠 근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오늘 아침 수술 없다고 하지 않았어?”'“볼 일이 생겨서.”'볼 일이 생겼다는 은재의 말에 혜민은 더 묻지 않고 들고 있던 파일을 꺼내어 들고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하려고 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혜민이 조용하다는 생각에 신호대기를 하던 중 은재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더니,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뭔가를 하는 것 같더니 꽤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어렸을 때부터 꽃을 좋아한다 했더니 결국 그 관련된 전공을 택한 것을 보고 ‘참 그녀답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저렇게 덜렁거려도 꽃을 다루고 있을 때 보면 더없이 세심했으니 말이다.'어느덧 혜민의 학교 앞에 도착을 했다. 은재의 병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 가는 길에 태워다 준 것이라 말을 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기에 아침에 조금 서둘러 나온 것인데 보람이 느껴졌다.'“이혜민. 일어나. 학교 다 왔어.”'“……응?”'“아까 늦었다고 했잖아.”'“아! 몇 시지? 오빠 고마워. 이따가 집에서 봐!”'후다닥 차에서 내려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는 혜민을 보고 은재는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 좋게 시작했으니,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나 지각 아니야!”'“웬일이야? 지각을 다 안 하고?”'그녀에게 있어서 지각은 삶 그 자체였다. 혜민이 지각을 하지 않고 제시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오히려 놀라울 따름이었다. 항상 지각을 하는 혜민이 덕에 커피나 음료수를 얻어 마시던 재미도 쏠쏠했는데, 오늘은 그게 없다고 생각하니 더 아쉬운 것이었다.'“은재 오빠가 데려다 줬거든.”'“은재 오빠? 아! 그때 너희 집에서 봤던?”'“응. 오늘 병원 일찍 나간다고 하더라고.”'유나는 폴짝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일주일 전쯤이었다. 혜민이 포트폴리오를 놓고 오는 바람에 유나의 차로 다시 집에 왔었다. 공강 시간이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잠깐 들어왔다가 가도 된다며 혜민이 문을 열어 주어서 유나도 따라 들어왔었다. 그리고 혜민은 제 방이 있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고 유나는 목이 말라서 물이라도 마실까 하는 마음에 주방으로 들어섰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도 없다더니 웬 훤칠한 남정네가 머그잔을 들고 돌아서서 나오려 하고 있었기에 유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넋 놓고 그 남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누구시죠?”'“유나야, 뭐 마시고 갈래? 주방에 보면……어? 오빠. 오늘 출근 안 했어?”'“응. 오프.”'오프라고 짧게 답한 은재는 혜민에 손에 들린 파일을 보고 또 덜렁거리다가 놓고 갔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유나에게로 시선을 한 번 주고는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는 혜민의 머리에 손을 얹은 뒤 말을 하며 주방을 벗어났다.'“덜렁이. 아침에 잘 좀 챙기라니까.”'“이씨! 챙긴 줄 알았단 말이야!”'은재가 헝클어 놓은 머리를 다시 정돈하며 혜민이 대꾸했다. 그리고 은재가 늦지 않게 가라는 말을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자 유나는 그제서야 ‘땡’이 된 듯 더듬더듬 말을 이었었다.'“누……누구야?”'아직도 그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유나는 혜민을 붙들고 또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해도해도 먹히지 않을 그 얘기를.'“뭐가 어려워? 다른 것도 아니고! 동생 친구 밥 한번 사 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돈도 잘 번다며!”'“뜬금없잖아. 차라리 혜준 오빠면 내가 당장 말하겠다. 말했잖아. 아빠 친구 아들이라고.”'혜민이 낙천적이고 웃음이 많게 자란 것은 삼남매 중 막내이기 때문이라고 유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낙천적이라 옆에 있으면 도움을 많이 받고 힘이 되어 주는 친구였다. 그런데! 왜 밥 한번 얻어 먹자는게 그렇게 안 된다는 얘기란 말인가.'유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파이팅을 외치며 마음을 다잡았다.'“뭔데? 그렇게 괜찮아? 최유나가 이럴 정도면 인물이 보통이 아니란 얘기잖아.”'자타가 공인하고 과 사람들 전체가 인정하는 안목이었다. 바뀌는 남자마다 어찌나 인물이 훤칠하신지……. 하도 얼굴을 많이 봐서 혜민이 우스갯소리로 ‘넌 결혼해서도 얼굴만 뜯어 먹고 살 거야.’라고 말까지 했겠는가.'“장난 아니야! 그리고 그 포스! 어쩔 거야. 내가 꿈에 그리던 바로 그분이야!”'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하는 유나를 보고 인물을 운운하던 은미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