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 밤이 깊어서도 별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별당 마루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가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기왓장이 부딪히는 소리와 땅을 딛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그가 온 것이다. 윤은 얼른 별당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별당 계단을 밟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별당 마루에 검을 내려놓는 소리도 들렸다. 이 때다. 윤은 문을 열고 살금살금 별당 마루를 걸어갔다. 순간 그의 검이 자신의 눈앞에서 정확하게 멈췄다.'“윤. 접니다.”'그를 놀래어줄 계획은 완전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그의 검에 놀라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밝히고 있었으니.'“안다.”'알면서도 검을 겨누다니. 하여튼 성격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것보다 자신이 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는데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어떻게 제가 오는 줄 아셨습니까?”'“그건 비밀이다. 그런데 왜 발걸음을 숨기고 걸어오느냐? 평소처럼 깡충깡충 오지 않고.”'“제가 언제 깡충깡충 걸었습니까?”'“너 그런다. 누가 밖에 있는지 확인도 안하고. 밤바람 쐬고 달 보는 걸 좋아라 하면서.”'“예? 언제 그걸 다 보고 계셨습니까?”'윤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그는 순간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매일 밤 이곳에 와 있었다는 것을 들킬 위기였다.'“뻔하다. 너 그러는 게 눈에 선하지.”'“수상쩍습니다. 저를 바보로 여기지 마세요.”'“뭐?”'그는 더 당황하여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렀다.'“여기에 밤마다 오시는 것이지요?”'“뭐, 내가 언제?”'하지만 윤은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저를 바보로 여기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깐만 기다리셔요.”'당황한 그를 별당 마루에 그냥 두고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 그에게 건넸다.'“자, 선물입니다. 그 때 부채를 주신 데에 대한 답례입니다.”'그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둘둘 말려진 종이였다. 그는 조심스레 그것을 펼쳐 보았다. 그림이었다.'“이게 무엇이냐?”'“예?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그 쪽 윤 아닙니까?”'그도 그 것을 몰라서 물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렸다는 것이 놀라워서였다.'“내가 이렇게 못생겼냐?”'“본인이 굉장히 잘 생기신 줄 착각하시는 거 아닙니까?”'“뭐? 네 그림 솜씨를 탓해야지. 누구 얼굴을 탓해.”'그 말에 그녀의 입이 삐죽 나왔다.'“됐습니다. 싫으시면 다시 돌려주십시오.”'윤이 그의 손에 든 그림을 향해 손을 내 밀자, 그는 얼른 그림을 고이 접어 가슴 안에 넣으며 말하였다.'“싫다고는 안 했다.”'구름에 가려진 달이 얼굴을 내밀었고, 그의 얼굴이 달빛에 비췄다. 그의 날렵한 콧날이 드러났고, 그 콧날에 이어진 입술과 턱선은 숨 막힐 정도였다. 그의 말대로 그림 솜씨가 문제 인지도 모르겠다. 붓으로는 잘생긴 그의 얼굴을 다 담지 못했다. 담을 수 없었다.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봐 얼른 고개를 돌려 달을 바라보았다. '“나 손잡아도 되냐?”'윤은 처음 만나자 마자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던, 자기 마음대로 입을 맞추던 그 사람이 지금 그녀 옆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의아해했다.'“예?”'“네 손을 잡고 싶다고.”'그 말에 윤의 마음이 떨렸다. 그리고 그녀도 그의 손을 잡고 싶어졌다. 윤은 대답 대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짓더니, 얼른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윤은 슬며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별당 마루에서 손을 잡고 달을 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금세 빗줄기가 굵어졌다.'“비가 옵니다.”'“큰일이군.”'신 윤은 난감했다. 비가 이렇게 심하게 오면 집에 돌아가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리고 이 시각에 그녀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녀는 겁도 없이 그의 손을 잡아끌고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비를 우선 피하셔야죠.”'그는 어쩔 수 없이 캄캄한 별당 안으로 들어왔다. 윤은 얼른 초롱불을 켰다. 자신은 이렇게 떨리는데 윤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서책을 읽으시겠습니까?”'무슨 서고에 들어온 줄 아는가. 천하태평인 윤은 서책 한 무더기를 그 앞에 펼쳐 놓았다.'“제가 읽으라고 말씀드렸던 서책 읽으셨습니까?”'오만과 편견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서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였다. 누가 들으면 웃겠지만, 혹시나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아니. 못 읽었다. 요즘 다른 서책을 읽느라.”'“예. 그럼 여기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그녀가 얼른 그 서책을 건넸다. 이렇게 방에 단 둘이 있는데. 거기에다 야심한 밤에. 아무도 오지 않을 비오는 날에. 어느 사내가 서책이 눈에 들어오겠나.'“너는 참 사내를 모른다.”'“예?”'“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그 말에 윤의 눈은 가늘어지고, 입은 삐죽 나왔다.'“제가 남인국에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뭔데?”'“사내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제가 사내를 모른다는 게 큰 흉이 됩니까? 저는 여인국에서 왔고, 제가 가장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사내가 휘와 그 쪽 윤이고, 제가 지금 알고 있는 사내도 두 분 외에 몇 분 더 아는 것뿐인데 제가 사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제 저도 웬만큼 사내를 압니다. 서책에서도 봤고 또…….”'“또 뭐?”'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말끝을 흐렸다.'“어쨌든 저를 그렇게 철부지 취급하지 마세요.”'‘아까는 바보 취급하지 말라더니, 이번에는 철부지 취급을 하지 말라니.’'“알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서책을 보라는 것은 정말로 사내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예? 서책은 사내들이 더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그는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여인이다. 방 안에 온통 꽃 향으로 아찔하게 만들어 놓고 사내가 좋아하는 것은 서책이라니.'“그래. 서책 읽는다. 읽어.”'그는 윤이 펼쳐 놓은 서책을 살펴보았다. 그 전에 보지 말라고 했던 여인국에 관한 서책도 그 안에 있었다. '“너 이거 왜 안 가져다 놨냐?”'“같이 가져온 다른 서책을 아직 다 못 봐서요. 그 서책이 맘에 드시면 그거 보시던가요. 사내들의 지침서라 하지 않으셨습니까?”'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열심히 서책을 보는 저 토끼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게다가 밖의 빗줄기는 더욱 거세져서 창 안으로 빗물이 들어왔다.'“서책이 젖겠습니다. 창을 닫아야겠습니다.”'‘창까지 닫으면 더 위험하다. 차라리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그 사이에 벌써 윤은 창을 닫고 다시 서책을 읽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에게 눈을 두지 않고 오만과 편견에 눈을 돌렸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비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도 들렸다.'“저 말입니다.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응?”'“몰래 숨어 있어야 하고, 바깥에도 잘 다닐 수 없지만, 제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나고. 남인국에 오길 잘했습니다.”'여인국에서 그녀는 원하지 않은 일을 많이 했던 것인가. 답답할 이곳에서의 생활이 가장 행복하다니. 또 다른 윤은 그녀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물었다.'“그 좋은 분들에 나도 포함 되는 것이냐?”'“네.”'그녀가 수줍게 대답했다. 그의 심장이 더 세게 뛰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또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져. 손이, 몸이 또 움직이려고 해. 그녀를 보던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왜 고개를 돌리십니까?”'“보기 싫어서 그렇다.”'“제가요? 왜 또 그런 미운 말을 하시는 겁니까?”'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다. '“네가 보기 싫다는 게 아니다.”'“그럼요?”'“너를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내가 보기 싫어서 그렇다.”'“예? 뭘 하고 싶으신데요?”'“말하면 하게 해 줄 것이냐?”'그녀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대답했다.'“네. 하게 해드리겠습니다.”'무엇을 알고 대답하는 것인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네게 입을 맞추고 싶다.”'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윤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에 닿았다. 지난번처럼 장난으로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그녀의 입술을 억누르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천천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그가 다가왔다. 그의 입술의 움직임에 따라 윤의 심장은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