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우리 어머니하고 서은이 부탁 좀 하자.”''태규는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약속 못해 인마. 살아 돌아오기나 해.”''“살아도…… 10년은 걸릴 거다.”''서혁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래도…… 조심해라.”''태규는 그 말 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우리 서은이 고3이야. 공부도 잘한다. 나랑 다른 녀석이야. 통장, 너한테 맡길 테니까 대학도 보내주고, 유학도 시켜주고 해줄 수 있는 거 다 해줘.”''“그렇게 공부 잘 하냐?”''서혁의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었고 눈까지 빛이 났다. 그는 모르겠지만 동생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목소리가 들뜨곤 했다. 서혁이 건달로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그의 동생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끼고 애지중지하며 그의 삶의 중심에 있는 동생을, 서혁은 태규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그럼. 일류대 갈 거야. 나랑은 다르게 살 거야. 아니, 다르게 살아야지. 절대 나처럼은 살게 안 할 거다. 그러니까 잘 좀 부탁해.”''“깡패 놈한테 부탁하면 뭘 얼마나 잘 돌봐 주겠냐! 나 약속 못한다고 했다. 알아서 일찍 나오기나 해.”''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혁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었다.''“꼭 죽여야 한다냐? 보스, 욕심을 너무 부리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우리가 당하는 거 아닌가, 오히려 걱정이 된다.”''“먹고 먹히는 관계니 선수치는 거지 뭐.”''“그래도 교도소에 있는 상대파 보스까지 제거하라는 건 심한 거 같아.”'더 굳어질 것도 없던 서혁의 얼굴이 숙여지면서 어두워졌다.''“조심해. 나 누구 잘 돌보는 성격 아닌 거 니가 더 잘 알잖아. 걱정되면 살아 돌아와서 니가 돌봐 인마.”''“어머니, 심장도 안 좋아. 화병이 있거든. 술주정뱅이에 망나니 남편 먼저 하늘로 보내고 아들은 깡패 짓이나 하고 있으니 화병이 생길 만도 하지. 그래도 나 잘못했단 소리 들으면 까무러치실 분이다. 웬만하면 알리지 말고.”''“죽으로 가냐? 짜식, 진짜 말 많네.”''태규는 죄 없는 담배만 연신 피워댔다. 발아래 수북하게 쌓인 꽁초를 자근자근 밟으며 착잡한 맘을 누르려 애썼지만 태규의 기분은 서혁을 따라 무거워지고 있었다.''“태규야, 보스 너무 믿지 마라. 뱀 같은 녀석이야. 야비하고, 이익이 되는 거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다. 너무 나서지 말고 목숨 알아서 간수 잘해. 똑똑한 똘마니 안 좋아하니까 적당히 어수룩한 척 해.”''“알아 인마.”''“보스, 아랫사람 안 키운다.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잔인한 사람이야. 조심해.”''“그러는 넌 왜 그런 놈 밑에 있냐?”''“발 빼기 쉽지 않은 거 아는 놈이 그런 건 왜 물어?”''서혁의 주먹이 장난스럽게 태규의 배를 쳤다. 그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는 바람에 태규는 잠시 숨을 멈춰야만 했다. 배를 문지르며 노려보자 녀석은 빙긋이 웃어버렸다. 서혁이 뒷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통장을 꺼내 태규를 향해 훌쩍 던졌다.''“2억이야. 내 동생…… 잘 부탁한다. 일해 주는 대가로 받았어.”''“죽으로 가는 놈처럼 말하지 말라고 했지?”''태규는 서혁에게 점점 화가 났다.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였다. 주먹세계에서 똘마니로 지내며 어울리는 사람들이야 다 뻔하지만 서혁은 달랐다. 소양배양한 놈들과 달리 진중한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여자친구 사진이 아닌 여동생 사진을 수첩에 넣어 다니는 조금은 이상한 놈이었다. 진짜 동생 맞냐고? 혹시 데려다 키운, 피한방울 안 섞인 동생 아니냐고 놀려도 봤지만 서혁은 동생의 이야기만 나오면 마냥 마음이 후해지는지 피식 웃기만 했다.''건달 노릇하면서 돈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 주위 환경이 워낙 방탕하다 보니 생기는 족족 다들 술을 먹거나 향락적인 일에 써버리는 게 보통의 일이었다. 그러나 서혁은 어렵게 모은 돈을 꼬박꼬박 그의 어머니 통장으로 송금했다. 동생만큼은 힘들지 않게,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했다.''딱 한 번 서혁의 동생을 본적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보통의 여학생. 그러나 서혁이 내민 용돈을 사정없이 쳐내는 손은 보통의 여학생의 것이 아니었다.''“깡패가 벌어 온 돈 필요 없어. 이따위 것 필요 없으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난 오빠 없어.”''동생은 매정하게 돌아서서 가버렸고, 서혁은 불쌍한 어깨를 하고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성질 같아서는 가는 동생을 붙잡아 패대기라도 치고 싶었다. 서혁이 지독히도 아끼는 동생이 아니었다면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서혁이 지독히 아끼는 동생이었더라도 사내였다면 서혁과의 주먹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흠씬 패주었을지도 모른다. 계집아이인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 동생을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었다.''“진심이야. 정말 꼭 잘 챙겨줘. 쉽지 않을 거다. 내가 줄 건 이것밖에 없어.”''태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혁을 보내는 마음이 너무도 불안했다. 떠나는 뒷모습이 자꾸만 마지막일 것 같아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3개월쯤 후 조직 내 정보원은 서혁에 대한 소식을 물어왔다. 서혁의 소식을 듣고 태규는 취기가 오르지 않는 술을 밤새 마셨다.''다음 날 신문엔 교도소 내 죄수 간 다툼으로 인한 살인사건이라고 작은 사회면을 하나 차지하는 서혁의 기사가 나왔다.''‘교도소 내 살인사건. 교도소 내에서도 세력다툼.’''서혁이 남긴 흔적은 그것뿐이었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남은 건 짧은 몇 줄의 기사가 전부였다.''서혁의 모친에게 알려야 했다. 뭐라 첫마디를 꺼내 서혁에 대한 소식을 전해야 할까, 달동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내규가 찾아간 날 또한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더니 재개발지구 달동네에는 깡패들임에 분명한 사람들에 의해 남아 있는 몇몇의 집이 부셔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속에서 서혁의 동생을 보았다. 방망이를 피해 도망가는 주민들 속에서 그녀는 집을 부셔대는 깡패들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독설을 내 뱉고 있었다.''“다 갚아 줄 거야. 너희 깡패 놈들 나중에 다 감옥에 쳐 넣을 거야. 우리 집에 손대지 마. 이 나쁜 자식들아 손대지 말란 말이야!”''그녀는 자신을 겁에 질린 모습으로 말리는 어머니만 없었다면 같이 방망이를 들고 휘두를 기세였다. 태규는 나서지 못했다. 구역다툼으로 껄끄러운 다른 조직 녀석들이 해결사로 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얼굴을 디밀었다가는 뼈도 못 추릴게 뻔했기에 잠자코 있었다. 30분쯤 후, 소란은 잠잠해 졌지만 태규가 기대고 서 있는 곳까지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태규도 집을 부셔놓고 간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을 하기에 이들의 울음소리에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태규는 고인 침을 뱉고, 성한 집기를 찾아 고르는 서혁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태규보다 먼저 다가온 양복 입은 사람 때문에 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몇 마디 오가더니 서혁의 어머니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태규가 전해야 할 말을 그 남자가 전한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렸다.''''''저녁, 보스는 발 빠르게 꽤나 커다란 장례식장을 마련했고 화려한 화환을 즐비하게 세웠다. 조직에 충성하면 그 만큼의 보답을 받는 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했다.''“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보스를 노려보는 서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서혁의 어머니는 줄지어 겪는 불행이 믿어지지 않는 듯 넋이 나가 보스의 인사에도 반응이 없었다. 태규의 마음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보스의 뒤에서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살피는데 서은의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절을 하는 보스를 보더니 소리나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일어서서 국화화환을 밀어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정신없이 흩어지는 국화꽃잎은 뭉개져 보스의 발밑으로 나뒹굴었다. 보스의 얼굴색이 금세 하얗게 변했다. 그런 보스를 향해 서은이 이를 악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나가! 누가 이런 꽃 들고 오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할 줄 알았어? 당신 같은 사람들 보기 싫어. 당장 나가!”''“서은아, 그러면 못써. 오빠 마지막 가는 길이다. 우리 서혁이…… 내 아들 서혁이…… 어어…….”''서혁의 어머니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오열을 터뜨렸다.''“잊어버려! 없는 셈 쳤잖아. 뭐가 슬프다고 우는 거야?”''“우리 서혁이…….”''“울지 말란 말이야!”''“서혁아…… 어헉…… 서혁아…….”''“엄마? 왜 그래? 엄마!”''오열을 하던 서혁의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태규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한 서혁의 어머니에게 달려가 붙들어 일으켰다.''“손대지 마! 내가 할 거야!”''“이년아, 입 닥쳐!”''태규의 거친 말에 서은은 정말로 입을 다물었다. 서혁의 어머니를 업고 태규는 응급실로 달렸다. 서혁의 어머니를 침대에 눕히는 곁에서 서은은 엄마가 심장병이 있다고 외쳤고, 의사와 간호사는 알았다는 말로 고개를 끄덕이며 서은을 밖으로 밀어냈다. 두 손을 꼭 쥐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서은의 눈에 불안이 가득했다. 방금 전 심한 말을 한 게 생각이 나 태규는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심하게 말해서 미안하다.”''대꾸가 없다. 미안하다 말하는 태규를 서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야! 미안하다고.”''반복해서 말하자 그제야 한 번 흘끗 봤을 뿐 그게 전부였다.''“아 씨벌, 진짜 재수 없는 년이네.”''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주먹이 올라갈 것 같아 태규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서혁의 동생이라 좋게 봐주려 해도 대놓고 사람 깔아뭉개는 그녀의 태도는 성질을 돋웠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성질을 죽였다. 한 개비를 다 피워도 치솟아 오른 화가 가라앉지 않아 한 개비를 더 피웠다. 두 개비의 담배를 필터만 남겨두고 알뜰하게 피웠더니 30분 정도 지나 있었다.''서은에게 가고 싶지 않지만 서혁에 대한 의리 때문에 태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들어 옮겼다. 응급실에서 또 한 번 태규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사와 간호사가 정신없이 조치를 취하던 침대는 하얀 천이 덮어져 있었다. 그 옆에 서은이 서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안으로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침대로 다가가자 서은이 얼굴을 들어 태규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독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그렁그렁한 눈물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몸이 흔들린다 싶더니 기어코 한쪽으로 기울었다. 달려가 안지 않았으면 바닥에 머리가 부딪쳤을지도 모른다. 서혁의 어머니에게 달려왔던 의사들이 이젠 서은을 향해 달려왔다.''줄초상이었다. 의식을 찾은 서은은 만류하는 의사들을 뿌리치고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조직원들이 모두 돌아간 영안실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서혁의 사진 옆에 서혁의 어머니 사진도 나란히 걸렸다. 태규는 서은의 옆에 앉았다.''그녀는 울지도 않았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기가 막힌 지 서은은 멍한 시선으로 사진을 바라볼 뿐이었다.''“어떡할 거야?”''대답이 없었다.''“야! 돌아갈 집도 없잖아.”''서은은 말을 잃은 사람 같았다.''“당분간만 우리 집에 와 있어. 집 구할 때까지.”''그제야 태규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서은은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렇게 태규의 스물네 번째 여름은 지독히도 더웠고 더디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