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페리티브(Aṕritif):-':서양요리 정찬 식사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 가볍게 마시는 술을 지칭. 다양한 종류의 술이 쓰이며 가볍게 치즈나 올리브, 카나페등과 곁들여 먹기도 한다.-''영지는 이른 아침부터 굉장히 들떠 있었다. 오늘부터 방학이 시작됐지만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옷까지 다 챙겨 입었다. 영지는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었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내려, 할머니가 생일 선물로 사준 분홍색 브러시로 빗는 모습이 제법 계집애다웠다. 하긴, 이젠 꼬마라는 말보다 소녀라는 말이 어울릴 나이었다. 열두 살이 된 영지는 금년 들어 부쩍 크기 시작했다. 몇 주 전부턴 조그맣게 나오기 시작한 가슴에 처음으로 브래지어도 입어봤다.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친구들보다 더 어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영지는 브러시와 세트인 분홍색 방울로 잘 빗은 머리를 촘촘히 묶었다. 삐죽삐죽 뿔도 나지 않고 가지런히 한 번에 잘 묶여 영지의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머리를 다 묶은 후 영지는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 입은 매무새를 비춰 보고 있었다. 앞섶과 칼라에 자잘한 주름의 면 프릴이 달린 분홍색 블라우스와 감색 멜빵 치마, 무릎까지 오는 하얀 타이즈가 썩 잘 어울렸다. 살짝 구김이 간 칼라를 매만지던 영지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와, 오늘 영지 참 예쁘구나. 분홍색 블라우스가 아주 잘 어울린다.’''지난봄에 할머니를 따라 황 회장님 댁에 갔을 때 기하가 해준 말이었다. 기하는 금년에 중학교 3학년이 된, 황 회장 댁 둘째 손자였다. 위로는 두 살 많은 형 인하가 있고 밑으로는 영지와 동갑인 동생 준하가 있었다. 그렇게 3형제만 있는 집안이라 노 할아버지인 황 회장과 그 아들, 성준 내외는 영지를 친손녀처럼 예뻐했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던 영지의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언젠가부터 무뚝뚝하고 심술맞아진 기하 때문이었다. '기하는 영지의 첫사랑이다. 할머니 따라 처음 황 회장 집에 갔던 건 영지가 여덟 살 때였다. 아무것도 몰라서 멍하니 서 있는 영지를 처음 반겨준 사람이 기하였다. 그 때까지 시골에서 살던 영지는 그렇게 하얗고 키가 큰 제 또래 남자애를 본 적이 없었다. 동네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했던 이장 집 오빠도 기하를 따라갈 순 없었다. '첫날, 어색하고 무섭기만 한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하는 금영 대신 하루 종일 영지를 데리고 놀아준 사람이 기하였다. 말이 많은 건 아니지만 준하 장난감도 내주고, 만화영화도 보여주면서 내내 옆에 있어줬었다. 처음 보는 예쁘고 맛있는 간식도 준하는 손도 못 대게 하고 영지만 먹게 해 줬다. 입을 삐죽이 내밀고 있는 준하가 불쌍해서 하나 나눠줬는데 심술 난 준하가 예쁜 과자를 거실 바닥에 던졌다가 할아버지한테 꾸지람만 들었었다. 준하가 혼나는 소리에 놀란 영지가 바짝 얼자 기하는 영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을 꼭 잡아주며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달래주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루 종일 사람과 시간을 보낸 영지는 기하에게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그 때부터 무조건 기하가 좋았다. 무뚝뚝해 보이긴 해도 영지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전부 해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간이 지나며 기하는 영지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