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당당했다. 상대는 무려 청운장의 왕자 전하였다. 하지만 갓 열 살이 좀 넘었을까 싶은 여자아이는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는 폭풍처럼 다그치는 그를 태연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전하께서 제 사촌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면 저도 전하께서 금남(禁男)지역인 한림원에 기별도 없이 들르셨다는 사실이 이 한림원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벽안군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는 것을 보고서 연청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젊은 청년은 좀더 많이 당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연청의 웃음소리에 짜증이 가득 어린 얼굴로 그가 돌아보았다. 연청은 어깨만 으쓱였다. '“저 아가씨 말이 맞습니다. 이 이야기가 폐하께 들어가면 족히 몇 날은 시달리셔야 할 겁니다.”'벽안군의 장점은 한 번 약속한 것은 확실하게 지킨다는 것이었다. 대놓고 세자 자리에 오를 왕자를 비웃었는데도 짜증난 표정만 지을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지 않는다면 청운장으로 올 생각이 없다고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청운장, 벽안군의 사병을 두는 궁 안의 훈련소이자 왕자의 거처. 그곳은 궁의 모든 법률을 거부한 채 독자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승상조차도 왕자의 거처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청 자신 같은 사람이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병졸 출신으로 무려 교위까지 올라온 ‘벼락출세한 기생오라비 같은 놈’ 주제에. 그의 입가에 냉담한 미소가 어렸다.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건 시간 낭비였다. 그 시간에 차라리 서책을 한 권 더 읽는 편이 나으리라.'“이 아이 사촌이면 승상과는 어떤 관계지?”'벽안군은 땅에 떨어진 위엄을 다시 끌어올리고 물었다. 단풍처럼 새빨간 옷을 입은 소녀는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서 대답했다.'“승상 나리의 처조카 됩니다.”'“이름은?”'“성은 정이고 이름은 영소라 하옵니다.”'영소. 이름이 마치 입 안에서 울리는 느낌이다. 이름 역시 그 아이처럼 통통 튄다. 연청은 여전히 비뚜름하니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무례하게도 제멋대로 청운장에 들어와 벽안군의 심기를 건드린 푸른 옷의 계집아이는 뒤에서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서 있다가 벽안군이 말을 걸자 반색을 했다.'열 살 먹은 여자아이가 달려드는 건 사양이야. 그는 벽안군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승상의 딸이라니, 최악의 궁합이다. 세력을 키워 승상을 엎어버리려면 쓸데없는 곳에 한눈을 팔아서는 곤란했다.'하지만 어째서일까, 빨간 옷을 입은 여자아이의 찌푸린 이맛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맛살을 펴고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벽안군이 마침내 등을 돌리고 투덜거리며 가기 시작하자 연청은 몸을 기울여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그의 복부쯤에나 닿을 정도로 조그만 여자아이들이다. 그는 픽 웃고서 푸른 옷의 여자아이를 보았다. '“훈련장에서 뛰어다니고 싶다면 여기서 기본적인 교육 정도는 받고 오라고, 꼬마 아가씨.”'“넌 대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이런. 승상의 딸답지 않게 대단히 호전적이군. 권력자의 외동딸이라면 이런 식으로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낼 게 아니라 손가락을 까딱이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병사를 불러야 마땅했다. 물론 한림원 내부엔 병사들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나오는 편이 어울릴 텐데. 이 아이는 어딘가 이상했다. 호위도 없이 청운장까지 찾아온 것도 그렇고.'그 순간 영소가 그들에게로 다가오더니 여자아이의 뺨을 올려붙였다. 짝 하는 소리에 연청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놀랄 만큼 매서운 손이었다.'“당장 공자(公子)님께 사과드려. 언니로서 낯이 뜨거워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