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누구든지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외할머니의 생각 때문에 우리 집 식구들은 다들 음악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게다가 모든 악기의 기본이라는 피아노는 꼭 칠 수 있어야 했다. 나의 첫 피아노 선생님이 막내 이모였던 것을 보면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항상 집에는 피아노 소리가 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연습을 안 하면 눈물 찔끔 나게 꾸중을 들으면서도 엄마한테 불평 한 번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억지로 배워야 했던 피아노 치기가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도 아니고 4살에 소나타 작곡을 할 수 있었던 실력이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차라리 바이올린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중 꽤 유명한 음대교수였던 막내 이모 앞으로 피아노 연주회 티켓이 몇 장 왔다. '연주회 중간에는 떠들지 말라는 이모의 엄명에 바닥에 발이 닿지도 않는 의자에 얌전히 앉아 할머니가 땋아준 애꿎은 머리만 손가락에 돌돌 말고 있던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슈만 피아노 협주곡 3악장이 시작하고도 일이 분 쯤 있다가 들어온 아르페지오의 전개였다.1악장도 꽤 화려하게 시작하는데도 불구하고 3악장만 유독 귀에 들어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조용하던 2악장 뒤에 잔잔하던 음을 가르고 잠이 들려던 귀를 깨워서 그랬는지도. 화려한 손놀림에 정신이 팔려서 이모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던 주의도 잊어먹고 무대를 더 잘 보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섰다. '경쾌하게 내려오는 스케일. 현악기 활들이 열심히 앞뒤로 반복하며 만드는 음을 가로지르는 피아노 음. 무대 중간 새까만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손가락을 미친 듯이 놀리고 있었다. '“얘가, 환희야. 쉬 앉아!”'놀란 이모가 나를 끌어 앉히려 내 드레스를 잡아당기는 와중 팀파니가 울리면서 마지막 아르페지오가 끝났다. “앙코르! 앙코르!"'일어나서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는 또 파묻혀 버렸다.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폴짝 폴짝. 이모는 의자에서 뛰며 소란을 피우는 조카를 또 잡으려 했고 내가 잡히지 않으려고 앞자리에 서 있던 아저씨의 어깨를 잡았을 때 인사하고 고개를 들던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한없이 반짝이던 까만 눈. '그렇게 내 나이 만5살, 크리스토프 필립 드 바라티에를 본 뒤 이환희, 내 세계의 중심에는 항상 피아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