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겨울아. 너한테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이야.”'“어머. 아니에요, 언니. 어차피 일이 없어 놀고 있었는데요, 뭐.”'대학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선배였다.'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선배였는데, 딱 하루만 ‘판타지랜드’의 퍼레이드 알바를 뛰어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해왔던 것이다. '겨울은 선배의 전화를 받았을 때 사실 딱 잘라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그 선배는 이미 그녀가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천사표’라는 걸 알고 부탁한 것이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몹시도 더운 8월 말이었다. 아무리 일이 없어 놀고 있는 겨울이었대도 땡볕에서 인형 탈을 쓰고 30분간 퍼레이드를 하는 건 말처럼 쉬워보이진 않았다. '“자, 자! 대열 맞추고 행진 준비! 거기, 콩쥐! 뭐 하는 거야! 빨리 탈 써!”'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어디선가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손에 들린 커다랗고 촌스러운 인형 머리를 내려다봤다. '벌레 씹은 표정으로 거대한 인형 탈을 뒤집어쓴 그녀는 벽에 걸린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하고 많은 캐릭터 중에 하필 콩쥐라니.'이럴 때만이라도 팥쥐나 신데렐라 계모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었던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옆에 서 있던 검은 소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고서 밖으로 나왔다.'내리쬐는 햇볕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단 10미터를 걷기도 전에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사우나가 따로 없었다.'도대체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싫어요’ 한 마디면 됐을 일이었는데, 왜 그 말 한 마디를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온갖 후회가 실미도 앞바다에 밀물 들듯 밀고 들어왔다.'그동안 ‘천사표’, ‘순둥이’, ‘착한 여자’, ‘콩쥐’ 등의 별명으로 불리던 그녀는 그 타이틀이 몹시도 괴롭고 짜증났다. 그것들은 마치 자신을 가두고 있는 틀처럼 보일 뿐, 전혀 자랑스럽지도 좋지도 않았단 말이다.'그걸 다 알면서도 그 틀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았다.'한숨을 길게 내쉬는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문득 뭔가가 아른아른 했다.'“……?”'비록 인형 눈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이는 흐릿한 시야였지만 그 실루엣은 너무도 익숙했다. 자신의 애인인 박철수,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한 여자가 낯부끄럽게 이런 데서 적나라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정겨울. 27세. '애인과의 1000일을 맞은 오늘.'자신 안에 살고 있던 콩쥐에게 안녕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