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오전에 있었던 드라이 리허설을 지켜보고 일찍 춘천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춘천 IC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자갈과 모래가 저걱저걱 바퀴에 감기는 일방통행 길로 들어섰는데, 앞에 웬 돼지 한 마리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세우기 전 창문을 내리자 이미 온 동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결국 은수는 참지 못하고 차를 길 한 편에 세운 뒤 재빨리 내려 자전거의 뒷좌석을 손으로 잡았다.'“너 또! 안 벗어 이거? 공은성,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진짜!”'돼지는 말이 없었다. 다만 몸을 조금 움츠린 채 제 얼굴을 손으로 긁어대고 있었다. 은수는 돼지의 손을 잡아서 끌어 내리고 탈을 벗겨냈다. 장난 끼가 가득한 동글동글한 얼굴이 약간의 땀에 젖어있었고, 눈에는 가식적인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듯 보였다. '“이렇게 땀에 절어서 이 짓을 꼭 해야 해? 동네 창피해 죽겠어.”'“이번 건 좀 실패인 것 같아. 땀이 너무 많이 나지? 후…….”'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동생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매 번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잔소리를 들으면 풀이 죽기는커녕 입 꼬리며 눈 꼬리, 꼬리라는 건 다 내리고 웃어버리니 잔소리도 피곤할 지경이었다. '그 때 길 바로 옆에 있는 텃밭에서 상추를 뜯던 할머니 한 분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두 여자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기운들도 뻗쳤다! 아나, 이거 가져가서 입 터지게 한 쌈 씩 싸 먹고 이따 찬이나 좀 데리고 와.”'“잘 먹겠습니다.”'은성은 얌체같이 바구니를 건네받아 차에 던지듯 실고는 자전거에 다시 올라 출발해 버렸다.'“은성이가 벌써 스물여덟이야? 시간 한 번 잘 가네…….”'할머니의 말에 돼지 탈을 들고 서있던 은수의 표정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동생의 엉뚱한 행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잊었던 모양이다. 요즘은 흔하디흔한 그 우울증 대신 엉뚱함을 몰고 온 것이 그나마 다행임을 알면서도 또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지금 도망치듯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 은성의 직업은 이벤트 의상 제작이다. 개업 상가나 병원, 소규모 단체에서 의뢰를 받아 가볍고 희소성 있는 의상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고 있다. 솜씨도 제법이라 적잖게 주문이 들어오는 편이지만 집안일과 병행하다보니 무리해서 일을 받고 있지는 않았다. '“잘 먹을게요, 할머니.”'은수는 뒷좌석을 열어 케이크 상자를 피해 탈을 던져 놓고는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시원한 춘천 어느 동네를 달리고 있자니 몇 시간 전 방송국 어느 구석에서 찌질 한 남자 배우와 언성을 높였던 일들은 바람처럼 잊혀져갔다.'한편 집에 도착한 은성은 자전거를 세워두고 커다란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용도실로 들어가 사료 봉투에서 한 바가지를 꺼내 마당으로 나와서는 반달이의 밥그릇을 가득 채워 주었다.'“반달아, 밥 먹자.”'돼지 탈을 쓴 주인의 몰골에 놀랄 법도 한데 차우차우 견인 반달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며 밥그릇에 코를 박았다.'“훗, 반달아 천천히 먹어.”'대화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은성의 말소리를 뒤로하고 낯익은 차 한 대가 마당을 지나 건물 근처에 세워졌다. 좀 전에 길에서 마주쳤던 은수였다. '“은성아, 들어 와. 김치 볶음밥 해 먹자.”'“큰 언니 들어오면 해 먹자. 손님 모셔 올 텐데.”'“일단 들어와. 더운데 옷 좀 갈아입고.”'은수는 뒷문으로 집 안에 들어가 은성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자매 셋 중에서 제일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은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사고를 함께 했던 아이지만, 그 부모님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기에 억울함 같은 그리움이 남았을 터였다. '“언제 진짜로 웃을 거니.”'늘 엉뚱함으로 중무장을 한 은성 덕에 펜션은 언제나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한 번 들렀던 손님들 역시 잊지 않고 후기를 남겨주었고, 그 후기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역시나 막내와 은성의 이야기였다. 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알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묘한 능력을 가졌다. '은찬을 태우고 참 성실히도 언덕을 오르던 차 한 대가 곰 씨네 하우스 마당 한쪽을 정복해 들어섰다. 담임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어쩐지 가정 집 같지 않은 전경에 선뜻 문을 두드리기 힘들었다.'“은찬아, 내려야지?”'“벨트가 안 풀려요.”'가벼운 한숨과 함께 상체를 숙이며 벨트를 풀어줄 때 쯤, 승합차 한 대가 익숙하게 곡선을 그리며 주차되고 있었다. 그렇게 펜션의 4남매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차 주인인 첫째 은진이 가볍게 운전석에서 내려 손끝으로 앞머리를 헤집었다.'“숙박하시려고요?”'“네? 아, 아니요. 저는.”'“누나, 우리 선생님이야.”'“응? 어머, 몰라 봬서 죄송해요. 큰 누나 공은진이예요.”'“한재혁입니다.”'맑은 음성의 은진을 내려다 본 재혁은 불현듯 드는 설렘에 미소가 지어졌다. 맑은 목소리 만큼이나 여리고 청아한 여자였다. 약간은 뜨거운 태양아래에서도 찰랑거리는 단발머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누나, 손님은? 도망갔어?”'“뭐? 요게, 아니거든.”'재혁은 두 사람의 짧은 대화에 귀를 기울이느라 언젠가 은찬이 그렸던 그림 속의 도끼 주인이 그녀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무생물의 그림은 무시한 채 기분 좋은 가정방문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식칼에서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핏방울처럼 떨어지고 있었고, 재혁은 아주 잠깐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공은성! 너 김칫국물 다 흐르잖아!”'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건물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뒤이어 손 하나가 좀 전의 그 섬뜩한 여자의 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막내 은찬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은찬아, 오늘도……?”'은성은 하던 말을 멈추고 큰 언니의 눈치를 살폈다. '“은찬이 어디 갔다 와?”'“응? 맞다 손 씻어야지. 누나 나 배고파.”'은진은 두 동생의 대화가 미심쩍었지만 이내 가정방문을 목적으로 서 있는 은찬의 담임에게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 언제든 동생 둘을 앉혀놓고 궁금증을 해소하면 그만이었다.'“죄송해요. 더운데 안으로 들어가세요.”'은찬이 안으로 들어간 사이 은성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은진의 등 뒤를 따라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손님들은? 뭐 어디 내려주고 오는 거야? 래프팅?”'은성의 쉼 없는 질문에도 은진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질문이 대답을 요하는 것은 아님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손님들을 역까지 픽업하러 가면 언제나 손님 대신 짐을 한가득 차에 실어오곤 했다. 중간에 계곡이든 강가든 또 다른 목적지에 내려주면 늘 그렇듯 곰 씨네 하우스 까지는 혼자가 되었다.'“너 그거 안 치워?”'아까부터 은성의 손에 들린 식칼이 거슬렸던지 이내 동생의 등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또 매를 벌지?”'은성은 혀를 쏙 내민 채 종종 걸음으로 뒷걸음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