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유리문 밖으로는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해가 점점 짧아져서일까. 하루 일과가 빡빡하게 느껴지는 것이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일이 돌아가는 나날이었다. '여행을 다녀 온 후, 예랑과 선우 베이커리는 특별히 달라진 기운을 느낄 수는 없었다. 다만 재원이 가인을 향해 슬며시 걸어오던 장난이 조금 줄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랑에게 가졌던 관심이며 신경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한가한 틈을 타서 예랑으로 건너와 두 여인의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가인 또한 재원을 향해서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매번 티격태격하면서도 재원에게 오지 말라는 타박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가끔씩 혼자 먹기 싫다며 케이크를 들고 와서 밥을 얻어먹는 재원에게 여전히 밥값은 받아내려고 으름장을 놓긴 한다. 하지만 전처럼 재원이 오기만 하면 안으로 도망가던 행동은 더 이상은 하지 않았다.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한 번도 조용할 날이 없었지만 가끔은 재원이 장난처럼 먹고 싶다고 내뱉은 반찬을 다음번에 은근히 만들어 놓기도 하곤 했다.'여름이 지나고 밖은 벌써 가을바람이 선선히 불어오고 있었다. 계절이라는 것은 딱히 궁금해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민감하게 변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예랑에도 시원한 음료보다는 따뜻한 차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바쁘게 흐르고 있었다.'“대체 일요일마다 어딜 가기에 매번 알람도 끄지 않고 꼭두새벽에 외출을 하는 거야.”'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가인의 알람시계소리의 성량은 대단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재원은 자신의 차에서 가인의 차가 움직일 때를 기다렸다. '이번 주에는 기필코 가인이 주말마다 어디를 가는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꼭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하다가는 가인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재원은 아주 조심스레 주차장에서 가인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인은 평상시의 기상 시간보다도 20분이나 빨리 주차장에 모습을 비췄다. '“몇 시에 일어난 거야. 피곤하지도 않나.”'지난주에는 3시에 주차장을 살펴보았지만 가인의 차는 이미 보이지 않아서 그녀의 행선지를 알아내는 것을 실패했었다. 그래서 재원은 아예 새벽 2시부터 자신의 차에서 가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잠복을 하고 기다리는 형사처럼 말이다.'가인의 차가 천천히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재원은 그녀를 놓칠 새라, 그리고 눈치 챌 새라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차는 예랑 앞에서 멈추었다. 재원도 자신의 차를 주차장의 입구에 세워놓고는 가인을 바라보았다.'키가 크긴 했어도 그리 기운이 세 보이지는 않던 가인이었다. 그런 가인이 상자와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차에 열심히 싣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려서 돕고 싶었지만 재원은 차마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차에 잔뜩 상자들을 실은 가인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뭐가 그리도 신나고 즐거운지 기분 좋은 미소로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녀가 가람빌딩을 떠나자마자 가람빌딩 1층은 가인의 알람시계소리로 요란스러웠다.'“저 소리를 새벽마다 들어야 하니……. 어휴.”'그녀의 뒤를 따른 재원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가인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 따라갔다. 새벽의 어두운 도로에 차는 그리 많지 않았다. 혹시 눈치라도 챌 까봐 재원은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였다.'차는 서울에서 외곽으로 1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낡았지만 아기자기한 손때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로원이었다.'가인이 그 곳에 들어가자 재원은 먼발치에서 차를 멈추었다. 가인을 반기는 한 남자가 그녀와 함께 상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재원은 항상 토요일 저녁이 되면 더욱 바쁘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떡을 반죽하던 가인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매번 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데도 토요일의 그녀는 더욱 생기 있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기도 했었다. 상자를 모두 옮겼는지 입구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양로원의 문패를 쳐다보았다. 재원은 가인의 그런 마음에 새삼 놀라며 그곳에서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가람 빌딩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로 먼발치에서 본 행복한 가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