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헌의 잠자리 상대는 하루를 버티지 못했다. 큰소리 뻥뻥 치던 매화가 실패하고 난향과 국화마저 하룻밤 만에 또다시 내쫓기자 화란은 화병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헌이 누각에서 홍화관을 드나드는 온갖 심부름꾼이며 손님들을 살피며 골똘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화란이 누각으로 올라왔다. '“여기까지 어인 발걸음을 하셨나요? 좀체 바깥출입을 안 하시는 분께서 말이지요?”'화란의 말에 헌이 껄껄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이리 좋은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런 곳에서 한번 놀아 보면 좋겠소.”'“지금 당장이라도 그리하시면 되지 안 될 일이 무에 있습니까? 누굴 불러드릴까요?”'“한번 해본 소리요.”'헌이 난간에 기대 홍화관 안뜰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동안 실컷 놀았으니 이제 일을 보러 나갈까 하오.”'헌이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말에 화란은 가슴이 철렁했다. 고렇게 되도록 놔둘 수야 없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아이들을 성에 안 차시는 듯하여 특별히 경주에 기별을 넣어 아이 하나를 불렀는데 어찌 그냥 가시려 합니까? 아니 됩니다. 그냥 보내드렸다간 오라버니 불호령을 어찌 받아내라고요?” '“오 대행수에겐 잘 말해 줄 터이니 염려하지 마시오.”'“아니 됩니다. 경상 제일미라고 불리는 그 아이를 한번만 만나보소서. 그리하면 나으리의 마음에 꼭 차실 것입니다.” '“좋소. 그리 오 관주께서 나를 위해 애를 쓰는데 좀 더 머무르도록 하겠소. 헌데, 저 아이 ……꽤 고운 걸?”'화란은 헌이 곱다는 가리키는 손짓에 대체 누굴 보고 그러나 싶어 그의 손끝을 따라가 보았다. 그 아이는 얼마 전에 춘설이 부탁으로 들여놓은 계집아이였다. 주로 부엌에서 일을 하는 아이인데 그 아이가 밥상을 들고 어딘가로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양귀비도 울고 간다는 상주 미녀 삼인방을 그리 딱지를 놓으시던 양반이 어찌 저런 아이를 곱다 하시는지요?” '“흠흠! 까무잡잡한 게 퍽이나 귀엽게 생긴 것 같군.”'화란은 헌의 고루한 눈썰미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보는 눈이 없어도 그렇지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않았고 선머슴 같이 덜렁대며 걷는 아이를 어찌 마음에 들어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가 마음에 든다는데. '“호호, 취향도 독특하십니다. 뭐, 하룻밤 흥밋거리는 될지 모르니 오늘 밤 들여보내지요. 그 아이 기생이 아니니 잘 모시지 못해도 흠잡지는 마시구요.”'화란이 하하 웃으며 누각을 내려가자 헌은 방울이가 사라진 국화당 입구를 바라보며 구미가 당기는 듯 엷게 미소를 지었다. '한편 국화당으로 밥상을 들고 들어간 방울은 문이 활짝 열린 채 울고 있는 국화를 발견하고는 놀랐다. 이곳을 늘 지키던 국화의 몸종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아씨, 밥상 들어가요.”'“밥 생각 없다는 데두 그러네. 그냥 물러 가.”'“그래도 한 술은 뜨셔야죠.”'방울이가 밥상을 국화가 앉아 있는 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무슨 일이래요, 아씨? 나리가 뭐 안 좋은 소리 했어요?”'“망할 자식! 기생들을 갖고 놀아도 유분수지. 홍화관 기생들을 모조리 다 상대해 보겠다는 심보가 아니면 어찌 그럴 수가 있어?”'“그, 그게 무슨 말이어요?”'방울은 국화가 헌을 욕하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도 남았다. 어젯밤에도 헌의 코빼기라도 한번 보려고 국화당 앞을 서성대다가 부엌 어멈에게 혼쭐이 났던 것이다. 사실 국화도 국화지만 방울이도 헌 때문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제가 무슨 함정에 걸린 줄도 모르고 밤낮으로 계집을 바꿔가며 즐기고 있는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넌 아직 소문 못 들었구나? 하긴 너 같은 신참이 뭘 알겠어? 있지, 너도 한번 생각해 봐. 이게 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김수로라고 이상한 놈이 하나 굴러들어왔는데 말이야. 그자가 상주 최고 미녀들이라 손꼽히는 우리 삼인방을 모조리 딱지를 놓았단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그 다음 날로 쫑을 내는 거야. 한 번씩 기회를 더 받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어. 화란 언니가 이번에도 실패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쩌면 좋으니? 이러다 우리 모두 내쫓기는 건 아닌가 몰라.”'“무슨 그런 작자가 다 있대요? 한마디로 진짜 웃기는 놈이네요.” '방울은 방울이 대로 헌에게 화가 나 같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오늘 밤엔 글쎄, 화란 언니가 경상 제일미라 불리는 유명한 기생을 경주에서 데려와 들여보낸다더라. 그년도 하룻밤 신세로 확 전락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체면이 좀 서지 않겠니?”'“아까 들어오는 그 여인이 그럼 경주에서 온 기생이란 말여요?”'“어머, 너 봤니? 어때 곱디? 우리보다 더?”'방울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 해도 믿을 만큼 곱고 우아한 자태를 가진 여인이었다. 여자인 방울이가 봐도 한 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헌의 오늘 밤 시중을 들 여자라고 하니 방울이도 국화처럼 밥맛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내 당장 가서 봐야겠다. 어디로 들어가든?”'“홍화당으로…….”'방울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국화가 뛰어나갔다. 하여 방울은 밥상을 그대로 들고 국화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국화가 그 경상 제일미를 보고 온다면 밥이 넘어갈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방울이 밥상을 들고 터덜터덜 부엌으로 들어가자 성깔이 사납게 생긴 한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울이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방울은 멀뚱거리며 그 여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 제가 뭘 잘못 입었나 싶어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지가 뭐 이상한가요?”'“암튼, 웃기는 양반이셔. 도무지 견적이 나오지 않는구만.”'여자가 빈정거리며 손에 든 부채를 탁탁 손에 쳤다. '“에? 무슨 견적이요?”'“됐고. 너 이리 따라오너라.”'여자가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다짜고짜 따라오라고 명을 내렸다. '“왜요? 뭣 때문에 그러시는데요?”'“아유, 거 참 말 많네. 그냥 냉큼 따라오지 않고!”'핀잔을 주며 소리를 버럭 질러대는 바로 이 여자는 홍화관 주인이자 상주 사또 첩실 화란의 치장 몸종이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화란의 외모를 치장하는 일이 주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그리 불렀다. 가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홍화관 기생들 옷이며 머리, 화장을 봐주기도 했지만 그건 특별한 일일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고 그녀는 오직 화란의 치장만을 도왔다. '방울은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쌀쌀맞게 굴며 따라오라고 하자 마지못해 구시렁거리며 따라갔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방울은 화란의 치장 몸종을 따라 홍화당으로 들어섰다. 처음으로 홍화당에 와보는 그녀는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기가 막히게 화려한 곳이었다.'“별천지가 따로 없네요.”'온통 붉은 꽃으로 장식된 벽들과 천정이 사람의 마음을 요상하게 뒤흔들었다.'“오늘은 네가 여기 주인이다.”'여자가 방울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이래요?”'방울은 여자가 하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네가 오늘 여기서 손님을 맞는다는 말이다.”'“아이, 무슨 그런 이상한 말을 하고 그런데요? 쇤네는 기생이 아니란 말이요.”'방울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내 말 잘 들어. 네가 오늘 밤 어찌 하는가에 따라 네 평생 먹고 살 길이 열리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 가능성은 거의 없다만 그래도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잖아?”'방울은 여전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쇤네에게 먹고 살 길이 열린다구요?”'“그래. 부자 나리 마음에 들면 첩실로 들어앉을 수도 있고 그게 안 되더라도 꽤 많은 돈을 아씨가 네게 줄 거다. 그러니 해보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하거라.” '“뭘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요?”'화란의 치장 몸종 최씨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방울이 때문에 이젠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도무지 뭘 알아들어야 일을 하지 않겠는가!'“네가 경험이 없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그냥 넌 내가 해 주는 대로 그냥 잠자코 있어. 뭐 별로 기대하는 거도 없으니 일단 오늘 밤은 그자가 하는 대로 있어. 만약 그자가 널 거들떠보지 않으면 너한테 손해날 것 없고, 또 만약 널 품으면 화란 아씨가 심심치 않게 보상을 해 줄 것이고.”'“네? 푸, 품어요? 누가요?”'방울은 그때서야 뭔가 감이 왔다. 기생들이 하는 일을 그녀에게 시키려는 것이라는 걸. '“걸 내가 어떻게 아니?”'하던 최씨가 기억을 더듬거리며 정보를 흘렸다. '“가만, 한양에서 누가 오늘 내려왔다 하던데……. 사또 나리의 막내아우라고 한 것도 같고…….”'“사또 나리 아우라고요? ………… 연화당 마마 오라버니요?”'“어, 너도 들었니? 그럼, 틀림없나 보네. 야, 너 오늘 잘해. 마마가 뉘시냐? 주상전하의 아들을 낳으신 분 아니냐? 그 오라버니의 첩실로 들어앉을 수만 있다면 목숨까지 내 걸고 덤벼들 기생 년들이 한둘이 아니니라.”'방울은 헌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송빈의 오라비인 종호를 떠올렸다. 사람 좋고 언제나 웃는 인상의 종호 도련님. 그런데 종호 도령이 어떻게 나를……?'“에이, 설마하니 그분이 왜 쇤네를 상대하시겠어요? 절색의 미녀들이 많은데.”'“나도 도무지 이해불가한 일이니 더는 묻지 마. 내 보기에도 넌 아직 덜 익은 못난이에 불과하니까.”'최씨가 그렇게 못을 박았지만 방울은 마음이 불안하기만 하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말이다. 도대체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녀는 한 치도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헌과 희연의 연서들을 중간에서 전달하며 종호 도령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종호 도령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종호 도령이 제 얼굴을 기억이나 할까 싶었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둥근 창을 통과하여 어여쁘게 단장을 한 방울이를 비추었다. 홍화당 첫 번째 방에 앉아 있던 방울은 긴장이 극에 달해 있었다. 붉은 등이 방 곳곳에 매달려 있어 보석이 박힌 가채를 쓰고 있는 방울이를 비춰 주고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그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은은한 향기가 방 안 곳곳에 스며들어 사람을 취하게 했고 뒤로 놓인 병풍엔 무릉도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무릉도원 곳곳에는 아름다운 남녀가 엉켜 그들만의 무릉도원을 즐기고 있었는데 병풍에 눈길이 갈 때마다 방울은 이상한 느낌이 들곤 했다. '꽃단장을 한 방울은 한층 성숙한 모습에 고상한 기운을 풍겼다. 도저히 긴장을 참을 수 없었던 방울은 풍성한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들고 사뿐사뿐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복도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헉! 이를 어째! 방울은 아까 그 여자가 시켰던 대로 다소곳이 앉아 살짝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도도한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쿵쿵쿵…….'걸어오는 소리에 맞춰 방울이의 심장이 쿵쿵 울렸다. 미칠 듯한 불안감이 그녀를 몰아쳤다. 걸음소리가 뚝 하고 방문 앞에서 멈췄다. 그 뒤로 정적……! '방울이의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점점 더 크게 가슴을 울리는 제 심장 소리에 미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는 못 견딜 것만 같은 바로 그때, 방문이 드르륵 소리가 나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