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빈아. 너 정말 이렇게 말 안 들을래?”'희수의 다그침을 무시해 버리고 일에만 코를 박고 있었다. 서류에 치이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 힘든 상황인데 희수까지 나타나서 들들 볶아대니 미칠 노릇이었다.'“야! 사공예빈. 무슨 일 있었던 거야?”'“없었어. 제발 가 주라.”'“아니야. 수상해. 냄새가 난단 말이야.”'“나 매일 샤워하거든. 정 냄새나면 화장실 갈 때 양치 많이 하면 돼.”'희수는 예빈의 대답에 복장이 터지려고 했다. 착하기만 하던 친구의 몰골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 달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렇게 좋아하는 춤을 마다하는 게 여간 수상쩍었다. 물어봐도 아무 일없다며 발뺌하는 것이 더 수상스러웠지만 그것보다 급한 것은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어내 주고 싶었다. 살이 빠진 것인지 볼 살이 많이 파여 있었다. 혹여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집에 무슨 일 있니?”'“아무 일 없어. 희수야.”'“응?”'“나 오늘 이 서류들 모두 끝내야 하거든. 제발 봐주라.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난 야근해야한단 말이야.”'“알았다. 알았어. 계집애.”'희수는 예빈의 엄살에 우선 후퇴하기로 했다. 입을 굳건히 닫아걸어 버린 상황에서는 절대 열 수 없다는 것을 10년 동안 곁을 지켜오면서 터득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순한 양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집불통 같은 구석이 있는 친구였다. 그런 면이 좋아 지금까지 친구로 남아있지만 말이다.'“다 끝나면 전화해.”'“알았다.”'예빈은 희수가 사라지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남들은 점심시간이 되자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니 간단히 먹자 느니 하지만 자신에게는 산더미 같은 파일들이 앞을 가로막아 도저히 점심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제일 만만한 사람이 희수였기에 샌드위치를 부탁했던 거였는데 그 부탁이 이런 부작용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예빈의 입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회사에 입사한 지 3년. 횟수로는 4년이었지만 주변 동료들이 사소한 일들을 떠맡기기 위해 아직은 신입사원과 동급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유별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잠자코 따라주고 있었다. 희수는 싫으면 싫다고 말하라고 하지만 그냥 흐르는 데로 살아가는 게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 여기고 있다.'“어이, 뱃사공. 이 서류 오늘까지 파일 만들어 줘.”'“뱃사공. 여기 자료 산출한 것이 잘못된 것 같아서 말이야.”'“뱃사공. 미안하지만 복사 30부만 해 줘. 급하게 써야하는데 내가 바빠서 말이야.”'모두들 그녀를 뱃사공이라고 부른다. 성이 사공이었기에 놀려먹기에 좋은 먹잇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외모가 어리바리해서 놀려 먹어도 좋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몰랐다. 예빈의 외모는 남들이 보았을 때 한번보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외모였다. 머리는 최대한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뒤로 질끈 동여맸고, 검고 굵은 뿔테안경은 온 얼굴을 가리고도 남았다. 대체적으로 스타일은 면티 위에 큼지막한 체크무늬의 두툼한 셔츠는 168센티의 키였지만 작고 뚱뚱해 보였다. 한 가지 더 있다면 펑퍼짐한 셔츠 탓인지 굴곡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