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는 거울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행히 파우더 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립스틱이 살짝 번진 듯해 지우고 다시 고쳐 바르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돌아가려면 지금 가야 했다. 이 일에서 빠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가 그냥 간다고 해도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돕겠다고 나선 건 자신이었다. 누가 시켜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려다 멈칫 했다. 평소보다 진하게 바른 립스틱 색깔 때문인지 인상이 달라 보였다. 그건 옷차림 때문인지도 몰랐다. '짙은 보라색의 실크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소매가 없는 디자인은 가슴 부근에서 천이 교차하며 봉긋한 가슴을 강조했고, 늘씬한 허리 라인을 살렸다.'치맛자락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자연스럽게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물결쳤다. 오늘 그녀는 화장도 머리 스타일도 모두 공을 들였다.'‘아니.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어.’'승화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파우더 룸을 나섰다. 클러치 백을 닫으며 모퉁이를 돌아가다 그녀는 막 반대쪽 복도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앗, 죄송합니다.”'높은 구두 굽 때문에 비틀거리며 비켜서던 승화의 입술이 남자의 어깨 부근을 스쳤다. 립스틱이 뭉개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얼른 남자의 정장 상의를 보았다. 옅은 그레이 빛 정장 상의에 립스틱 자국이 선명했다. '“이런, 어떡하죠?”'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정장 색깔이 짙었다면 표가 나지 않았을 텐데, 손으로 문대자 더 번지기만 했다.'“죄송해요, 옷에 립스틱 자국이…….”'당황해 남자를 올려다보던 승화의 목소리가 끊겼다. 차갑고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 앞에서 사과의 말이 쑥 들어갔다. 참으로 냉혹한 인상의 남자였다. '상의에 뚜렷이 새겨진 자국을 보는 남자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짜증스런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세탁비라도…….”'“됐어. 그래서 어떻게 됐나? 김 과장은 뭐라고 하지?”'남자는 그녀를 싸늘히 무시하고 지나쳐갔다. 전화 통화 중이었는지, 그는 휴대폰을 오른쪽 귀에 대고 있었다.'“그쪽 반응은?”'그는 머뭇거리는 일도 없이 통화를 계속하며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승화는 괜스레 가슴이 서늘해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로 화장실에 들어가 립스틱을 고쳐 바르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오빠 시후가 입구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미안, 많이 기다렸죠?”'“아니야.”'승화가 화장실에서 지체한 이유를 안다는 듯, 오빠는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승화야…….”'“왔어요?”'오빠가 어떤 말을 할지 짐작이 가기에 승화는 냉큼 시후의 말을 잘랐다.'“아직 안 왔어요?”'“그래.”'시후는 체념한 듯 입을 다물었다. 삼십 분이 지나도 그들 남매가 기다리는 남자는 오지 않았다. '시후가 챙겨준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그녀는 초조함을 달랬다. 오늘 파티는 마루 파이낸셜 그룹이 투자증권과의 업무 제휴 기념으로 VIP 고객만을 초청해 여는 것이었다.'“오늘은 오지 않을 건가 봐요. 공들여 차리고 왔는데 아깝게 됐네.”'그녀가 애써 웃으며 시후에게 말하는데, 입구가 웅성거렸다. 승화는 고개를 돌려 막 나타나 사람들과 인사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설마……. '“저기 왔군.”'승화가 약간 비틀거리자, 시후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오빠, 저 사람이에요?”'‘제발 아니라고 해줘요.’'“그래. KE 백화점, 엘리어트 유통의 사장 지건무. 바로 저 사람이야.”'한쪽 팔에 매달려오는 풍만한 몸매의 미인에게 차갑게 미소 짓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무심히 그녀를 지나쳐 다른 곳을 보았지만, 승화는 아니었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이 저 남자라고?’'아까 화장실 앞 복도에서 부딪쳤던 남자였다. 그 냉혹한 인상의 남자. '승화는 벼랑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