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심 시간이 가까워져 갈수록 노트북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업무보다 시계 바늘을 흘끔거리는 헛된 동작이 주를 이루자, 기태는 마침내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문을 열자 그에게로 비서들의 의아하다 못해 경악에 찬 눈초리들이 쏟아졌다.'"식사들 하세요. 조금 늦을지도 모릅니다."'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의 곁으로 강 비서의 존재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오늘 오찬 스케줄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그러나 기태는 태진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짧게 대답했다.'"개인적인 일이니, 수행하지 않아도 좋아."'승강기가 멈춰 서자, 안으로 들어선 기태는 따르려는 강 비서를 손바닥을 들어 제지했다. 마주친 그들의 눈빛을 가로막으며 스르륵 철제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에 홀로 남겨진 기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울을 통해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밤새 자란 수염을 손으로 쓸어보기도,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 보기도 하던 그는 어린아이처럼 설레어하는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당황하여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너른 로비가 나타났다. 고객들 틈에 묻혀 입구를 빠져나온 그는 인도로 발을 내디뎠다.'식사를 하기 위해 나온 직장인들로 붐비는 거리를 홀로 걸으며 기태는 오랜만에 여유를 느꼈다. 사람들에게 밀리면서도 전혀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백화점 맞은편의 공원을 향하는 그의 표정이 모처럼 맑게 개여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는 평소와 똑같은 나무와 하늘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노부부와 간간이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태는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아닌 척 노력해 보아도, 그의 무덤덤한 눈빛은 끊임없이 공원의 입구를 향했다. 그러나 작은 여자의 흔적은 도통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참다못한 그는 시계를 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눈을 가리는 바람에,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다시 차려 자세를 취하고 마는 기태였다.'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그는 그대로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김샜다는 기운을 팍팍 풍기며 손이 절로 탁 떨어져 나갔다. 슬쩍 미소를 짓던 기태는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던 여인이 아닌 다른 모습이 시야 속에 들어오는 순간,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재미없게 놀라지도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