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6.
17.
18.
19.
20.
에필로그
외전
16.
숙소로 밀려드는 신전 놈들을 서걱서걱 썰어 나갈 때, 3층에 있던 바틴과 마님의 기척이 창밖으로 뚝 떨어지더니 멀어졌다.
파르시오가 앞에서 달려드는 아가토스의 심장에 칼을 박으며 소리쳤다.
“저거 어디 가는 거야!”
가까이에 있던 마부스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아가토스의 손목을 자르다 말고 바깥을 확인했지만, 바틴은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후였다.
“글쎄, 아까 에르크가 위층 창문도 깨졌다며 올라갔잖아. 마님을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려는 게 아닐까?”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아가토스 놈들의 물량 공세가 성가셨지만, 사실 위협적이진 않았다.
저들이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든, 죽을 자리를 찾아온 부나방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덤벼들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정도였다.
한낱 인간이지 않나.
딱 그 정도였다.
목숨을 바쳐 발목을 붙잡고, 그 대가로 단지 몇 초의 시간을 잡아먹는 성가신 벌레.
‘…….’
……시간?
순간 파르시오의 몸이 딱 멈췄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을 약 올렸다.
그는 잠시 멈춰서 숙소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니, 아가토스 놈들도 아까처럼 들러붙어 오지 않고, 가만히 서서 주시하고 있었다.
창문마다 흰 로브를 입은 놈이 두 명씩 붙어 있었고, 마부스나 머핀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도 행동이 기이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앞 동료가 죽으면 빈자리로 들어갔다.
세 번 이상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를 뻔히 보면서도, 숭고한 의식을 치르듯 그렇게 죽을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이쯤 되니 이들의 목적이 뭔지 모르기도 어려웠다.
시간을 끄는 것.
시간을 끌어서 놈들이 얻을 수 있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마님을 확인해야 했다.
“머핀!”
그의 부름만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찰딱 알아들은 그녀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큰소리로 답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가!”
“마부스!”
파르시오는 마부스를 호명하며 손가락을 튕겼고, 그 순간 검은 연기로 변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부스는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대답했다.
“Auju!”
그 역시 곧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타깃을 잃은 아가토스들의 시선이 하나둘 머핀에게 모였다.
무수한 눈들이 이전과 다르게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머핀은 남은 놈들의 머릿수를 확인하곤 픽 웃었다.
이 정도 물량 공세면 아무리 마물이라도 위험하겠는데.
그녀는 검을 고쳐 잡으며 씨익 웃었다.
“왜. 시간만 끌 생각이었는데, 제일 약한 놈만 남으니까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해 볼 만하겠어?”
그러면서 위층에 있는 에르크의 기척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척은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아마.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살아 있진 못하지 싶다.
슬프진 않았다.
임무를 수행하다 죽는 일이야, 비일비재하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오늘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머핀이 무게중심을 아래쪽에 실으며 자세를 낮추자, 아가토스들이 일제히 덤비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날카로운 기세였다.
파르시오와 마부스가 모습을 드러낸 건 시가지의 광장이었다.
바틴의 상황도 머핀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밀려드는 아가토스들을 상대하면서 파르시오의 기척을 느꼈고, 아일라가 옮겨 탄 마차가 떠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뒷모습이 똑같이 생긴 마차는 셋이고, 파르시오와 마부스는 둘이었다.
게다가 마차에 무슨 수를 썼는지, 마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을 새는 없었다.
세 갈래로 찢어진 마차는 이미 점으로 보일 만큼 멀어졌으니까.
파르시오와 마부스는 일단 하나씩 찍어 뒤를 쫓았는데, 둘 다 허탕이었다.
결과적으로, 다른 하나는 완전히 놓쳐 버렸다.
“엉망진창이군.”
오르쿠스가 시가지의 광장에 도착했다.
전투는 일단락된 후였다.
그는 패잔병의 꼴을 한 부하들을 훑으며 물었다.
“누가, 아일라와 함께 있었지?”
바틴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마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르쿠스의 시선이 코끼리 마물에게 닿았다.
“살아 있군.”
주인님의 건조한 목소리에 바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일라를 태운 마차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차 자체의 기척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효과는 있었다.
유사 악마인 파르시오와 마부스조차 아일라의 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으니까.
다만 오르쿠스가 아일라를 느끼는 건 기척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였기에, 사실 그녀가 이 행성에 있기만 하다면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의 영혼이 느껴지니까.
그가 당장 아일라를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확인할 게 있어서였다.
바틴이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갔다.
아가토스가 무력으로 아일라를 데려갔다면, 바틴은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 그녀를 지켰을 터이다.
대충 그녀를 ‘빼앗긴’ 거라면 그는 이미 죽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오르쿠스는 굳이 확인했다.
“아가토스를 따라가는 게, 그녀의 뜻이었나?”
코끼리 마물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고,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다.
***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한한 애정이라고 보였던 그의 행동들이, 잘 짜인 각본은 아니었을까.
원론적인 의심이었다.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됐다.
그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자상했다.
거기에 한 톨의 애정도 없었다고?
아일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자, 브라이트는 심드렁한 척 입을 열었다.
“초월자들은 그냥 재미로 사는 존재들이야.”
그는 의아한 눈을 한 아일라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악마가 몇 년을 산다고 생각해? 무려 수천 년이야. 그러니 황제도 했다가, 거지도 했다가, 용사도 꼬셔 보고 그러는 거지, 뭐.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는 최대한 냉소적으로 말했다.
오늘 소모한 아가토스의 수가 이백에 달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일라와 대화할, 겨우 몇 분을 위해.
목적은 하나였다.
아일라에게 불신을 심어 주는 것.
황제의 사랑이, 사실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너를 가지고 놀며 기만하는 거라고.
뿌리를 뒤흔들어 놔야 훗날 그녀가 칼을 쥘 테니까.
막대한 비용을 치른 만큼, 확실히 해야 했다.
그는 황제가 아일라를 찾으러 오기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가늠하며 열심히 혀를 놀렸다.
“그래도 이번엔 좀 심했어. 제국의 황제가 되어 황궁을 다 삼켜 버렸잖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지. 왜? 이미 귀족들도 다 마물로 교체됐거든. 이게 바로 세계 정복 아니겠어?”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던 아일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했어. 악마도 살 곳이 필요한데, 인간들이 그 터전을 윤택하게 만드니까. 난 그가 황제가 된 이유도, 사회 발전에 힘쓰려고 그런 줄 알았어.”
브라이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놈이 그래? 참 나, 황궁 지하에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가둬 놓고선, 뭐? 인간은 정복할 대상이 아니야? 어이가 없네, 정말. 그래,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고문하고 괴롭힐 대상인가 봐?”
‘황궁 지하’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오자, 오랜만에 예전 아일라의 기억이 떠올랐다.
4년 전.
황궁 지하에서 도망쳤다는 아가토스의 일원 중 한 명을 본 적이 있었다.
황제의 식구에게 잡혔다가 탈출한 아가토스는 처음이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그는 또래의 남자였고, 이름은 디에고였다.
그의 증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황궁 지하엔 아가토스 말고도 무고한 제국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다 죄인이라고 생각할 순 없습니다! 어린아이도 있었으니까요!’
아니, 모든 기억을 좀 한꺼번에 깨울 순 없나?
그랬으면 황궁에 있을 때 어떻게든 지하를 확인했을 텐데.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브라이트가 비아냥을 멈췄다.
그는 한숨을 내쉬곤, 아일라를 향해 맹수의 공격에 상처 입은 어린 양을 대하듯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속인 놈이 나쁜 거니까.”
아일라는 친구의 위로에도 별로 기운이 나지 않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탓일까.
브라이트는 제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이 바보야. 어떻게 악마한테 진심이 있다고 믿었어-. 이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몰라-.”
걱정 반에 농담 반이 섞인 가벼운 말투였다.
“……그러게.”
그녀가 대답과 함께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찰나,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면서 갑작스레 오르쿠스가 나타났다.
브라이트는 곧 황제가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일라는 생각지도 못한 터라 너털웃음을 짓던 표정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와 오르쿠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음기 감도는 아일라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