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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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파티 초대장은 어떻게 구해서 온 건가?”
보통 사교계 파티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속내를 유추하긴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파티장에 왜 왔냐는 뜻인데, 그 속에도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장소는 너에게 과분하다든지, 네 주제를 알라든지, 차림새가 빈곤해 보인다든지, 대체로 낮잡아 보며 비아냥거릴 때 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황태후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왜냐면 머핀에겐 티 파티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예의도 인성도 성격도 개차반인 오르쿠스의 식구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라니.
생각만 해도 종이가 아깝지 않나.
머핀도 그녀의 질문을 사교계 언어로 받지 않았다. 그런 거 모르니까.
분홍 머리의 아담한 숙녀는 황태후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씨익 당겨 웃으며 대답했다.
“황궁 내에서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구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 식구입니다.”
오만한 말이었다.
얼핏 자신의 궁에도 첩자가 있다는 말 같아서, 황태후가 슬쩍 떠보려 할 때.
머핀이 한발 빠르게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선 귀한 곳에서 곱게만 계시니까, 박투의 소리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박투?
박투라면 사람이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을 말하는 것 아닌가.
황태후는 머핀이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몰랐고, 물었다.
“박투의 소리라니.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머핀은 고갯짓으로 살짝 푸른 숲을 가리키며 인심 쓰듯 입을 열었다.
“저 소리가 진짜 나무 쓰러지는 소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황태후의 머릿속에 브라이트의 모습이 빠르게 스쳤다.
머핀의 말은 지금 푸른 숲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다는 말이었고,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머핀은 친절하게도.
그녀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다.
“쥐새끼는 잘 숨기셨어야죠, 마마.”
황태후는 머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어차피 지금 푸른 숲으로 간다고 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가만히 기다릴 수도 없었다.
마음이 불안해서.
머핀은 황태후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그녀가 맡은 일은 여기까지였다.
마님 말씀 잘 듣는 것과 시간이 되면 황태후를 푸른 숲으로 보내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일라가 돌아왔다.
그녀는 비어 있는 황태후의 자리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고, 머핀은 에스코트를 위해 마님께 손을 내밀며 설명했다.
“황태후 마마께선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시는지 푸른 숲의 상황을 알아보러 가셨습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갈까요, 마님?”
주인이 없는 후원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핀의 손을 잡았다.
***
머핀과 바틴은 마물이지만, 지금보다 더 예전엔 동물이었다.
마계의 자연엔 마력장이라는 힘이 흘렀고, 일정한 기준에서 마계의 식물이나 동물들에게 영향을 끼쳐 마물로 만들곤 했다.
그리고 머핀과 바틴은 마력장의 힘으로 마물이 되었다.
하지만 파르시오와 마부스는 달랐다.
마계의 지배자인 악마에게 직접 힘을 하사받은 것이다.
인간계의 계급으로 따지자면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타고난 피가 달라 악마는 될 수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동시에 책임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특권층.
유사 악마다.
게다가 파르시오와 마부스는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동료였고, 브라이트는 한낱 인간이었다.
이곳이 인간계라서 받게 되는 이런저런 제약도 있지만, 그걸 모두 감안한다고 해도 오랜 시간을 끌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엉켜서 쌈박질 중일까.
사실 파르시오와 마부스의 목표는 브라이트를 잡는 것도 아니었고, 그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브라이트의 호흡에 맞춰 적당히 강약을 조절해, 상처 없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브라이트로 하여금 조금 벅차지만 젖먹던 힘까지 짜낸다면 막을 수는 있는 정도의 공격만 가했다는 뜻이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단지, 마님의 친구니까.
나중에 마님이 이놈의 얼굴이 묵사발이 된 걸 보고 깜짝 놀라실까 봐.
더불어 마님께서 친구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범인을 찾으려 들면 조금 곤란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
전투 중에도 계속해서 시간을 재던 파르시오가 마부스에게 신호를 줬고, 둘은 동시에 브라이트와 간격을 벌리면서 소강상태를 만들었다.
브라이트는 손발이 어지러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잠깐의 틈이 생기자, 그는 틈이 왜 생겼는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냅다 튀기 시작했다.
그는 뒤에 따라붙는 기척을 느끼면서 황궁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일단 황궁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놈을 따돌리긴 쉽겠지.
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그만이다.
***
푸른 숲에 황태후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마부스는 브라이트를 쫓아 떠나고, 혼자 남아 있던 파르시오가 황태후를 향해 사무적으로 인사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황태후 마마.”
황태후는 그의 인사를 귓등으로 넘기며 호통을 쳤다.
“내가 제일 아끼는 푸른 숲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어!”
그녀의 말대로 푸른 숲은 여기저기 땅이 움푹 파여 있었고, 허리부터 잘린 나무도 상당수였다.
황태후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기에, 한낱 기사 나부랭이들이 황태후의 궁을 이렇게 헤집나!”
벼락 같은 호통에도 파르시오의 태도는 태연하기만 했다.
원래 인간들은 숨기고 싶은 것이 들킬 위험에 처했을 때, 화를 내곤 하니까.
그는 그녀의 숨기고 싶은 존재를 콕 찍어 끄집어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아일라 님의 호위로 태후 마마의 궁에 들어왔는데,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하고 쫓던 중, 한차례 충돌이 있었던 것뿐입니다.”
침입자라는 말이 나오자 황태후는 여기저기 훑어보는 척하며 브라이트를 찾았다.
평소 같았으면 오르쿠스의 식구 놈이 제 궁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노발대발 난리가 났겠지만, 오늘만큼은 브라이트의 존재만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다 넘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브라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황태후가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때.
그녀는 진짜로 듣기 싫은 목소리를 들었다.
“침입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르쿠스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끔찍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고, 오르쿠스는 눈을 맞춰 오는 황태후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폐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르쿠스는 언제나 그렇듯 뾰족한 목소리를, 언제나 그렇듯 관대하게 넘겼다.
“아일라를 데리러 오는 길이었는데, 소란스러워서 와 봤습니다.”
오르쿠스가 파르시오를 쳐다보자, 그가 상황을 설명했다.
“아일라님의 호위를 서다가, 푸른 숲에서 빨간 머리의 남자가 서성이고 있는 게 수상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잡으러 왔다가 소란이 있었습니다.”
오르쿠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왜 수상하다고 생각했지? 사용인일 수도 있지 않나.”
곧바로 따라붙는 파르시오의 답.
“시종이나 하인의 옷차림이 아니었고, 맡은 일을 한다기엔 태도가 불량했습니다.”
오르쿠스.
“그래도 황태후 마마의 궁인데 주인의 허락 없이 이렇게 헤집으면 어쩌나.”
파르시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황실의 기사이고, 황태후 마마는 황실의 웃어른이십니다. 별고가 발생하기 전에 수상한 자를 잡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시 오르쿠스.
“그래서 잡았나?”
다시 파르시오.
“훈련이 잘된 자였습니다. 도주하였고, 마부스가 뒤따랐습니다. 저 역시 추적하려던 차에 황태후 마마께서 도착하신 겁니다.”
아주 둘이서 쿵짝이 잘도 맞았다.
오르쿠스와 파르시오를 번갈아 쳐다보던 황태후는 빨간 머리의 남자를 봤다는 말에 한 번 움찔했고, 그가 도주하여 마부스가 쫓는 중이라는 말에 한 번 더 움찔했다.
부디 브라이트의 무사 도주를 기원할 때, 오르쿠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파르시오. 지금 당장 궁을 폐쇄하고, 몽타주 그려. 감히 황태후의 궁에 침입한 놈을…….”
“폐하.”
궁을 폐쇄하고 몽타주를 그리라는 말에 황태후는 마음이 다급해져 오르쿠스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작은 목소리를 냈다.
“푸른 숲에 있던 빨간 머리의 남자는 아마, 제가 고용한 사슴 관리인일 겁니다.”
오르쿠스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사슴 관리인요?”
황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 푸른 사슴이 좀 예민합니까. 잘 돌볼 수 있도록 전문가를 고용했지요.”
오르쿠스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속 모를 표정을 지었고, 황태후는 믿음을 더하기 위해 말을 얹었다.
“북부의 설산에서 희귀한 동물들을 많이 취급했던 전문가라 하였습니다. 신분도 확실하고, 무엇보다……,”
그녀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맞은편 숲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중 한 명은 브라이트였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남자였는데, 분위기로 보아하니 아까 파르시오가 말했던 마부스라는 자 같았다.
황태후가 입을 다물자, 옆에 있던 오르쿠스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보다. 다음 말은 뭡니까.”
황태후는 이를 꽉 다물었다.
그녀는 오르쿠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파르시오와 마부스를 번갈아 보았다.
놈들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뻔뻔스럽게 브라이트를 가리켰다.
마치 이것 좀 보라는 듯이.
그들의 행동은 한 편의 연극 같았다. 황태후는 그제야 이 모든 게 오르쿠스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았다.
아일라를 티 파티에 초대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들이 브라이트의 존재를 눈치챘다 해도, 함부로 그를 잡아 자신을 추궁할 순 없었다.
여긴 황태후의 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