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6.
7.
8.
9.
10.
6.
‘그러고 보니…….’
그는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자신에게만은 늘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애인 역할에 충실한 것뿐일 테지만 나름 열심히 기분도 맞춰 주려 애쓰고, 원하는 걸 다 들어주는 것도 사실이지 않나.
그녀가 오르쿠스를 무서워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벨렛 베르바처럼 죽을까 봐.
가까이 있다가 언제 심기를 거슬러 목이 뎅강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가 제 목을 칠까?
왠지 아닐 것 같다.
아일라는 평생의 안전을 보장받은, 오르쿠스가 써 준 계약서를 떠올렸다.
계약서를 받았다고 해서 그를 향한 두려움이 금방 사라지진 않았었는데.
이젠,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초콜릿을 담은 가방을 고쳐 메고 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르쿠스 바이디.
그는 자신에게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곧장 눈을 맞춰 왔고, 그녀는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
두근?
왜?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제 허리춤에 달린 가방을 더듬었다.
작고 예쁜 가방과 고급 초콜릿에 또 콩닥거리기 시작하는 게 어이없었지만, 이제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속물이고, 오르쿠스가 주는 것들이 너무 좋다는 걸.
왜 유독 그가 주는 것들이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메리 부인의 저택에서 얻어먹은 고급 디저트가 오르쿠스의 초콜릿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앗, 혹시…… 황제라는 감투 때문일까?
왜, 그때도 오르쿠스가 서 있는 자태만 보고도 엄청 귀족적이라 생각했었지 않나.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그를 첫눈에 딱 알아봤던 거지.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물질뿐 아니라 사회적 위치까지 재 가면서 두근거리는 심장이라니…….
‘나 정말 어마어마한 속물이었잖아?’
그래, 나는 속물이다.
자신을 인정하니 편했다.
불안하게만 느껴졌던 두근거림은 순식간에 설렘으로 바뀌었고, 이 감각을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오르쿠스는 나의 고마운 물주님이시다. 그냥 오르쿠스가 제공하는 것들을 마음껏 즐기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오르쿠스는 초콜릿 하나로 완전히 기분 좋아진 아일라를 보면서 기울어진 해를 확인했다.
오페라 홀까진 얼마 남지 않았고, 그에겐 소기의 목적이 있었다.
그는 아일라의 어깨와 등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겉옷을 벗으면서 말을 골랐다.
춥지 않으냐고 물을까? 한데, 그녀가 안 춥다 그러면?
그럼 이제 곧 추워진다고 해야겠다.
그녀에게 제 옷을 벗어 준 것이 처음도 아닌데, 순수하게 추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생각이었다.
아일라는 자신이 재킷을 벗어 펼쳐 들자마자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냉큼 팔을 끼워 입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사이즈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손끝까지 다 덮은 소매를 야무지게 접어 올리곤 눈을 맞춰 왔다.
“고마워요.”
그러면서 생긋 웃는데,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오르쿠스는 어쩐지 목뒤가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한 채,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다시 걸음을 옮겨야 할 때가 되었으니 에스코트를 하겠다는 듯.
그녀는 선뜻 움직이지 않고 잠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종종 있는 일이었고, 그는 이번에도 얌전히 여자의 손을 기다렸는데.
도토리 같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자신을 힐끗 올려다본 그녀가 표정을 새침하게 하더니 불시에 팔짱을 껴 왔다.
오르쿠스는 숨이 크게 들이켜졌다.
그녀와 다시 만난 이후 그는 신체 접촉을 손으로 한정했다.
에스코트할 때도, 포크와 나이프 잡는 방법을 알려 줄 때도.
뭐, 습격이 있던 날 잠깐 껴안았던 적도 있었지만 그땐 특수한 경우였으니 논외로 쳐야지.
어쨌든 그가 의식적으로 그녀와의 접촉을 줄인 데엔 이유가 있었다.
왜, 아는 맛이 무섭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의, 또 그 전생의 그녀를 안으며 느꼈던 아찔함을.
제 품 안에서 흐느끼던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를.
한 번 손대기 시작하면 끝을 볼까 봐. 그래서 이 작은 여인에게 상처를 줄까 봐 무던히도 참아 왔는데.
오르쿠스는 제 팔에 얹어진 작은 손가락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백 년도 더 지나 이제 낯설기까지 한 감각에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점차 위로 올라갔다.
작은 손가락에서부터 걷어진 소매를 거쳐 익숙한 재킷의 카라, 그리고 드러난 흰 목덜미.
생각은 욕심의 방향대로 흘렀다.
그는 저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묻고 싶었다.
그러다 가까이에 있는 귓불도 깨물고, 코끝으로 그녀를 간지럽히고 싶다.
‘미치겠군.’
***
오페라 홀은 그 어느 때보다 북적였다.
황제가 애인을 데리고 온다는 말이 돌았던 탓이다.
고위 귀족들과 엘리트로서 궁의 출입을 허가받은 예술가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황제와 그의 애인에 대해 떠들었다.
특히 오르쿠스 바이디는 역대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하면서도 잔인하고…… 어쨌든 온갖 폭력적인 단어와 차갑고 시린 수식어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그런 폭군이 늦은 나이에 만난 여자에게 푹 빠져 선물 공세를 하고 하녀도 예순이나 선발하고 침실처럼 사용하던 집무실을 단지 집무실로만 사용하고 있다 하니, 그 여인이 얼마나 궁금하겠나.
원로원의 일원인 살레오스 체데스 후작은 일찌감치 도착해서 오페라 홀 삼 층에 위치해 있었다.
공연 무대가 아니라, 홀 입구와 로열석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
그 역시 황제의 여인이 궁금했다.
살레오스는 오르쿠스가 황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황궁의 사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본디 몸이 약한 황후는 병이 깊어져 침실에서 나오질 못했고, 그 때문인지 황제는 정치에 집중하질 못했다.
황후가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이 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오르쿠스를 데리고 왔다.
사생아라며.
황태자로 책봉하겠다며.
궁이 발칵 뒤집혔다.
황제 부부에겐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
정치판에 있는 놈들은 원래 인정머리 없는 놈들이었고, 곧 세상을 떠날 황후와 그녀를 끔찍이 사랑한 황제를 걱정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음 황후 자리에 누굴 밀어 넣느냐는 것만이 중요한 화두였지.
각 파벌에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아리따운 영애와 황위 계승 가능자를 동시에 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사생아를 황태자로 책봉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귀족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결과는?
대부분의 귀족 가문에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의문의 독살과 자살, 사고로 점철된 학살이었다.
각 파벌에서 밀고 있던 후계까지 하나씩 죽어 나가자 사생아를 반대하던 목소리는 쏙 들어갔다.
그때 귀족들은 황제의 숨겨진 힘에 혀를 내둘렀고, 결국 오르쿠스는 황태자가 되었다.
오르쿠스 바이디가 여덟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된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황후가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황후는 노발대발 난리를 피웠지만, 소용은 없었다.
이미 책봉은 끝났고, 황제는 황후의 난동을 묵살했으니까.
정통성과는 관계없이, 오르쿠스는 훌륭한 제왕의 자질을 보였다.
수를 읽는 머리도 뛰어났고, 결단력과 추진력 역시…….
황제는 오르쿠스가 황태자가 된 지 꼭 이년 후 서거했다.
그리고 피바람이 일었다.
당시 오르쿠스의 나이 열.
뒷배도 없는 주제에 뻣뻣하게만 구는 나이 어린 황제의 처소엔 매일 자객들이 담을 넘었고, 깜깜한 밤이 되면 황제의 궁에선 쇠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쿠스는 아침 해가 뜨면 정확한 시간에 조찬 회의장에 나타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그런 황제를 보며 소름이 돋았던 건 살레오스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살레오스 체데스가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을 때, 오페라 홀 전체를 뒤덮던 웅성거리는 소음이 잦아들었다.
무자비한 학살자, 폭군 오르쿠스 바이디와 그의 애인이 오페라 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홀 내엔 적막이 내려앉았고, 묵직하고 단단한 황제의 발자국 소리와 작고 가벼운 여인의 구두 소리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을 보던 살레오스는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아니, 지금 저 여인이 입고 있는 게 폐하의 제복 재킷인가?
팔짱을 끼고 있어?
아니, 폐하가 지금 웃어?
***
아일라의 두 눈은 오페라 홀에 들어서자마자 휘둥그레졌다.
오페라 홀의 문이 열리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이게 귀족들의 사교 모임이라는 걸까.
아름답지 않은 숙녀가 없었고, 멋있지 않은 신사가 없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술과 음식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름다운 여성들은 화려한 깃털로 장식된 부채를 나붓나붓 흔들었고, 근사한 남성들은 술잔을 들어 보이며 젠틀한 미소를 지었다.
별세계를 마주친 아일라는 오르쿠스의 손을 잡고서 흥취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건 마치 보이지 않는 결계를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밖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홀 내부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리석 바닥과 섬세하게 조각된 벽면, 멋들어진 수가 놓인 휘장들이 어우러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오페라 홀은 삼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 층은 원형 테이블에 갖은 식음료가 준비되어 있었고, 이 층엔 박스석이, 삼 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르쿠스를 따라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홀 내부의 인테리어와 한껏 꾸민 귀족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짜 멋있는 건 천장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엔 푸른 하늘이 그려져 있었고, 수많은 샹들리에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