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프롤로그
1.
2.
3.
4.
5.
프롤로그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청량한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릴 때면 찬란한 햇빛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황궁의 포도나무 정원은 요정들을 위한 장소인 듯 포근하면서도 신비로웠다.
따사로운 시간을 보내던 아일라는 문득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려고 할 때.
“앞에 봐.”
옆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시선을 멈추자, 커다란 손이 뭔가를 가리듯 자신의 눈가로 붙었다.
곧이어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 터지는 소리.
그 소리는 퍽 불길했고, 그녀는 차마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꾹꾹 누르며 애써 태연한 척 시선을 정돈했을 때, 곧 뒤에서 누군가 잔디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꽤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멀어졌다.
코끝에 비릿한 쇳내가 스치자 아일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누군가 죽은 거라고 직감한 그녀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뒤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그녀는 옆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마치 신의 세심한 걸작인 듯 아름다운 남자의 외형에 홀려 그가 어떤 자인지 잊을 뻔했다.
가지런히 맞잡은 그녀의 두 손엔 땀이 차기 시작했고, 손끝이 약간 떨린다 싶을 때 또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자꾸 떠는지 모르겠네.”
아일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자꾸 주위에서 사람들이 죽어나니 그런 것 아닐까요, 라 답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말은 꼭 이렇게 반응하면 재미없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두 손에 힘을 꾹 쥐고 떨림을 막아 보려 할 때 그가 물었다.
“추워?”
그래, 추워서 떠는 거라 하면 되겠다. 그녀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을 애써 끄덕였다.
“네. 조금…….”
그녀의 대답에 오르쿠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아일라의 어깨에 둘렀다.
두 사람의 체구 차이는 컸고, 그의 옷은 그녀의 작은 몸을 완전히 가렸다.
그는 앞을 꼼꼼히 여미며 제 가슴께에 있던 부토니에 브로치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낯빛을 확인하며 물었다.
“이제 좀 나아?”
아일라는 가까워진 군청색 눈동자를 보며 그의 질문에 다른 뜻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왜 떠는지, 추워서 그러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1.
길고 긴 하루였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두 시.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민지는 익숙한 진동음에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다.
[괴물 황제 : 남자 주인공을 설정하세요! 그리고 로맨틱한 이야기를 즐기세요!]
“괴물 황제?”
내 휴대폰에 이런 게임이 있었나?
평소 같았으면 그냥 무시했을 텐데, 오늘은 평소와 같지 않은 날이어서 그랬을까.
그녀는 잠깐 횡단보도의 빨간색 신호등을 확인하곤 낯선 게임 어플을 터치했다.
지난 이십오 년 동안 한 번도 게임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게 생각나서.
<괴물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공주가 역사상 가장 흉포하다는 정복 군주에게 선물로 바쳐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로맨틱이라는 것을 기대했지만, 가슴을 간질거리게 하는 알콩달콩한 장면은 채 1분을 가지 못했고, 곧 여자주인공이 죽었다.
그것도 남자주인공에게.
‘…….’
이게 뭐지?
민지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면서 휴대폰을 조작했지만, 몇 번이나 반복해도 과정과 흐름만 달라졌을 뿐 여자주인공이 명을 달리한다는 것은 같았다.
남자주인공에게 목이 뎅강…….
왜?!
악당에게 죽는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왜 자꾸 남자주인공에게 죽는 건데?!
그녀는 몇 번이나 신호를 놓쳤지만, 그걸 깨닫지도 못했다.
홀린 것처럼 계속해서 휴대폰을 조작하던 그녀는 갑자기 다가온 커다란 트럭에 치이면서 생각했다.
‘아. 다행이다.’
***
민지는 아주 깊은 곳에 있던 의식이 점점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난…… 살아 있나?’
그녀는 속으로 질문을 하는 동시에 눈을 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주먹도 잘 쥐어지고, 발목도 잘 움직였다.
그게 이상했다.
‘……?’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고,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서울에서 살던 단칸방보다 더 작은 방이었다.
벽지는 꼬질꼬질하고, 바닥에 장판도 없어 회색의 돌이 다 드러나 있는 아주 작은 방에 가구라고는 침대와 협탁, 옷장이 다였다.
현관문 맞은편 벽엔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이, 침대 맞은편 벽엔 거울과 시계가 있었고, 작은 방문이 하나 더 있었다.
방을 훑어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이상했다.
어제 분명 트럭에…….
그런데 어떻게 멀쩡한 몸으로 생판 처음 보는 방에 있게 된 걸까.
그녀는 침대 아래에 놓인 슬리퍼에 발을 꿰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에 붙어 있는 잠금장치는 꼭 안에서 풀 수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녀는 저 문이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거울을 지나쳤다가, 멈칫.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천천히 오른쪽 벽에 있는 거울을 보자, 거기엔 이십오 년을 함께했던 제 얼굴이 아니라 영 다른 사람이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하얀 피부와 보라색 눈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꼬불꼬불하고 새카만 머리카락.
원래 자신의 또래로 보였다. 한, 스물다섯 정도?
그때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쾅쾅!
“아일라! 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얼른 문 열어!”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던 그녀는 자신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에 놀라 완전히 얼어붙었다.
쾅쾅쾅!
“아일라! 어젯밤에 널 봤다는 사람이 있었어! 너 안에 있는 거 맞지! 얼른 문 열어!”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적의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어 문을 열었다.
완전히는 아니고, 맨 위의 안전 고리는 걸어 둔 채로 한 뼘 점도만.
그 한 뼘의 틈새로 불쑥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한참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큰 여자의 눈에는 걱정의 빛이 가득했다.
“너 괜찮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한 달 동안 어디 갔었어? 적어도 나한테는 쪽지라도 남겼어야지! 넌 정말 나쁜 애야!”
우는 소리를 하던 그녀는 정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그러자 옆쪽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웬 남자가 같이 소리쳤다.
“좀 조용히 해! 혼자 살아? 새벽부터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전원주택을 구해서 나가!”
남자가 소리를 지르자 또 다른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잠 좀 자자! 나는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복도가 점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얼른 잠금장치를 마저 풀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아는 듯한 낯선 이 때문에 주목을 끄는 건 사양이었다.
시끄럽게 우는 여자를 안으로 들이고 문단속을 한 후에는 숨을 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정리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여긴 어딜까.
난 어떻게 되었을까.
이 몸은 또 누구고.
저 여자나 나나, 왜 중세 영화에 나올 법한 옷을 입고 있는 건지.
생각을 이어갈수록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의문만 쌓여 갔다.
답이 없는 질문을 그만두기로 한 그녀는 울음을 그치기 시작한 여자를 내버려 둔 채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구석구석 훑던 그녀의 눈에 작은 약병 하나가 들어왔다.
회색의 딱딱한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내용물이 없는 빈 약병.
홀린 듯 천천히 그 약병을 집어 들 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작은 병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입을 떡 벌리더니 소리를 질러댔다.
“이게 뭐야! 마녀들이 불법으로 제조한다는 수면 약이잖아! 너 이걸 먹었어?! 제정신이니? 이걸 먹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넌……! 재수가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 수도 있어!”
민지는 그녀의 외침을 들으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저 약을 먹고 죽었다는 건가? 그다음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이 몸으로 들어온 거고?
***
여자는 마른세수를 하며 아까 보았던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여전했다.
흰 피부, 보라색 눈, 검은색 머리카락.
천천히 뺨과 머리를 만져 보았다.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현실이다.
거울 속 보라색 눈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마치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민지를 떠올렸다.
민지는 큰 죄를 지었다.
충동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현장엔 자신의 흔적이 수없이 많을 터였다.
자신의 미래는 두 갈래로 정해져 있었다.
감옥에 가든지, 십 년을 갇혀 지냈던 시설로 되돌아가든지.
물론 둘 다 인생 끝장났다는 부분에선 매한가지였다.
트럭에 치이는 순간 다행이라고 여겼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과거를 깨끗이 지울 수만 있다면,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친구도 사귀고, 번듯한 직장도 가져 보고, 해가 잘 들어오는 남향집에서도 살아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