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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후, 남주의 내연녀로 빙의했다 4
지은이｜유해령
펴낸곳｜루시노블
투고 및 문의 | lucy@sybook.kr
ⓒ유해령,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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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래서 전 우리가 제법 전우 같다고 생각해요.’
‘주적은 누굽니까?’
‘당연히 이곳을 위협하는 이들이죠.’
사실 다니엘은 그때, 글로리아가 내민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곱게 자란 아가씨가 전우라는 단어의 무게를 알까. 목숨이 깃털처럼 가볍고, 죽음이 사방에 깔린 전장에서. 전우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과연 이 연약한 영애가 알고서나 하는 말일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해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목숨을 빼앗는 일에 망설여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 그게 전장이었다.
그녀를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니었다. 다만, 글로리아의 손을 잡았을 때의 다니엘은 그녀보다 조금 더 무거운 마음이었다.
서늘한 응접실에 서서 클라라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유일하게 에블린의 손이 닿지 않은 공간이었다. 저택에서 유일하게 누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피터의 그림을 액자에 끼워 넣었다. 히아신스의 친모 옆에 아이의 새로운 보호자가 그린 그림이 나란히 걸렸다.
어머니가 영원히 히아신스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준다면 그 감정은 다니엘 안에서 썩어 갈 뿐, 밖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잔인해져야 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클라라가 그걸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초상화 속 누이는 입을 열지 않았고, 현실 속 누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살아 있다면 제 남동생을 말렸을까.
‘어머니를 미워할 순 있어도, 싫어할 순 없어. 우리 어머니잖아. 아무리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도 혈연은 끊어지지 않아, 대니.’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던 클라라였다. 어머니를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이 집을 떠날 거야. 지금은 비록 도망가지만 그래도 각자 다른 곳에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화해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게 다니엘이 기억하는 누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러 왔을 때, 그녀가 무슨 기분이었을지 다니엘은 영원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정확히 알았다. 살아 숨 쉬는 순간마다 어머니를 증오하고 동정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자신을 증오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결국 본인으로 귀결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깟 혈통과 가문, 의무와 지위 때문에.
다니엘은 감정대로 행동하고 싶을 때마다 히아신스를 떠올렸고, 누이의 말을 기억했다. 겨우 건져 낸 생명을 보며 눌러 참고, 또 눌러 참았다.
그러나 피터에게 안겨 있는 히아신스를 보며,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 계기가 필요했다. 어머니가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할 거란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 에블린이 그의 적이 아니라면, 과거의 일을 조금이라도 후회하고 있다면. 히아신스를 찾아내 만나려 하지 않겠지. 무슨 염치로.
응접실에 걸린 그림은 너무나 작은 증거였다. 그걸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히아신스의 흔적을 흘리면 어떨까 싶었다. 어머니가 수도에 머무는 동안에.
그러나 다니엘은 금방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머니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실을 미끼로 삼으면 피터가 위험했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피터는 다니엘의 생각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글로리아가 오기 전, 피터와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을 때 그녀는 말했다.
‘만약 저와 아이 중에서 선택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아이를 선택하세요.’
‘그래도 선생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고요.’
농담 같은 진담에 피터와 다니엘은 잠시 마주 웃었다. 그리고 다니엘이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십니까.’
‘아이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면서요. 어린아이를 구하는 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맞는 말이었지만 충분한 설명은 되지 않았다. 다니엘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피터는 자신의 과거를 조금 들려주었다.
‘지금보다 형편이 좋지 못했을 때, 남동생을 잠시 시설에 맡긴 적이 있어요. 그 애는 몸도 좋지 않아서, 많이 미안했죠. 그런데 어느 날, 그 시설에 불이 났어요.’
피터는 아주 예전 일을 담담하게 꺼냈다. 다니엘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잠자코 들었다.
‘다들 대피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남동생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대요. 그때 그곳에서 봉사하던 사제님께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동생을 데리고 나오셨다고 해요. 큰 화상까지 입어 가며.’
다니엘은 피터와 2층 부엌에서 마주 앉아 나눴던 대화를 생생히 기억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사제님을 찾아갔어요. 감사 인사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대뜸 그렇게 물었죠. 왜 그렇게까지 하셨냐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피터와, 낮잠을 자는 히아신스. 옅게 올라오는 커피의 향과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까지.
‘그 사제님이 똑같이 말씀하셨어요. 어린아이를 구하는 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냐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피터를 보며, 다니엘은 글로리아가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다니엘도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피터가 조금 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글로리아가 여전히 악독한 사람이었다면 다니엘은 이들을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사이가 될 일도 없었겠지.
다니엘은 자신이 순진하고 착한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게 했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이 짊어진 짐이 늘었다는 사실도.
글로리아에게 소식을 듣고 왕궁에서부터 달려오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어머니가 정확히 피터를 찾아왔다는 건, 그림을 발견했다는 의미였다.
아직 어머니가 무슨 계기로 그 방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림이 바뀌었군.’ 하고 넘기지 않았다면 무언가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가문의 일에 특히 철저한 어머니가 무턱대고 타인의 집에 쳐들어가 피터와 히아신스를 죽일 리 없었다.
클라라 때처럼 강도로 위장하기엔 여기는 수도였다. 보는 눈도 많았고, 무엇보다 이번엔 다니엘 본인이 관여하고 있었다.
한 번 사람을 시켜서 일을 진행했다가 히아신스를 놓쳤으니, 이번엔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내심 어머니가 행동하길 바라고 있었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철저하게 준비할걸. 결국 다니엘은 또다시 망설였던 것이다.
그나마 글로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찾아오도록 미리 언질을 주어 다행이었다. 그녀는 무사히 화실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왔고, 이렇게 막으러 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했을 땐, 상황이 최악까지 다다를 가능성은 희박했다. 어머니가 단번에 히아신스를 찾아낼 가능성도, 하나 있는 단서에 확신을 가지고 행동에 옮길 가능성도 낮았다. 고작 그림 몇 장으로 얼마나 알아낼 수 있겠는가.
다니엘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피터를 해칠 리 없다. 어머니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걸 확실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이 나면 강행했다.
그럼에도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히아신스가 아닌 피터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었던 게 아닐까. 피터의 단호한 말에 안심해서 긴장을 놓아 버린 건 아닐까.
만약 어머니가 피터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다면.
그렇게 정신없이 도착해 잠겨 있는 화실 문을 두드리고, 잠시 후 피터가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다니엘은 그녀를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안도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 됐다.
다니엘은 피터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블린을 응시했다. 이렇게 마음 졸이며 어머니를 피해 다니는 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구나.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왔니.”
“제가 이 집 단골이거든요.”
다니엘은 피터의 어깨를 살짝 잡아 옆으로 비키게 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어머니 차례입니다. 여기 왜 오셨습니까.”
“집에 못 보던 그림이 있더구나. 누가 그렸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
“저택을 떠나신 지 3년이나 되셨으면 바뀐 게 그림만은 아닐 텐데 새삼스럽군요.”
그러고는 그는 피터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선생님을 곤란하게 했습니까?”
피터는 고개를 저었다.
“몇 가지 여쭤보셨습니다. 브라이트 님께서 여길 오신 적이 있는지, 얼마나 자주 오셨는지. 그리고…….”
“그리고?”
“저에게 아내와 아이가 있는지도 물어보셨습니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어두컴컴한 화실에 울렸다. 다니엘은 다시 에블린을 돌아보았다. 에블린 역시 낮고 고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럴 만한 나이로 보이니 물어봤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니?”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어머니께서 직접 오시면 금방 제 귀에 들어갈 걸 알고 계셨을 텐데요.”
다니엘은 에블린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정확히 뭘 확인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그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에블린도 이를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네가 내게 뭘 감추고 있는지.”
“그럼 저에게 직접 물어보시면 될 걸, 번거롭게도 일을 벌이셨군요.”
작정하고 감추려 했다면 언제까지 감출 수 있었을까. 모든 게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어머니를 잘 안다고 해도, 예외가 있으며 돌발 상황에 얼마나 대처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오늘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더 발생할 수 있었다.
자신은 한 가문과 함께 왕실의 기사단도 책임지고 있으니, 분명 언제 어떻게 허점이 드러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어머니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 자체가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숨기는 게 없다고 하지 않았니.”
“억울하십니까? 그러기엔 어머니도 똑같이 말씀하셨죠.”
혼란으로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이 점차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천장, 정확히는 인기척 없이 조용한 2층으로 향했다.
평민 화가를 찾아낼 때까지만 해도 이 자가 아이를 숨기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중간 연락망, 혹은 개인적인 친분 정도로만 예상했다.
하지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이 곧바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어진 다니엘의 날 선 태도로 보아 허상 같던 감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에블린은 화실 내부를 하나씩 살피다 피터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있구나.”
화가의 눈빛은 틈만 나면 2층 계단 쪽으로 향했다. 신경이 온통 그곳에 쏠려 있다는 뜻이었다. 본인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내내 피터를 주시하고 있던 에블린 눈엔 그게 보였다.
히아신스가 2층에 있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
“직접 확인해야겠다.”
그러나 에블린이 몇 발짝 내딛기도 전에 다니엘이 그 앞을 막아섰다. 피터도 그 옆으로 다가왔다.
“물러나시죠, 어머니.”
“내가 내 손자 얼굴을 보겠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냐.”
“어머니께 그럴 자격이나 있는 줄 아십니까.”
에블린은 이 일에 끼어 있는 피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자네도 비키게. 어딜 감히 평민 따위가 길을 막아.”
그러나 피터는 귀부인의 호령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여긴 제 집입니다, 부인.”
두 사람이 합심해 자신을 막아서자 에블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애써 화를 억누르는 모양새였다.
“감히 지금까지 날 속이고 아이를 숨겨? 그것도 이런 근본도 모르는 자와 동조해서?”
“선량한 사람이겠죠. 목숨을 위협받는 아이를 도와준.”
“목숨? 입조심 하거라. 난 네 어미다.”
“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셨죠.”
에블린은 제 아들이 이렇게까지 적대적으로 나오는 것에 화가 난 듯 보였다. 어미 마음도 모르고 제멋대로 굴며 살더니, 기어코.
“어떻게 그렇게 매정할 수 있니.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느냐? 이게 다…….”
울컥해서 쏘아붙이던 에블린은 뒤늦게 아차 하고 피터를 흘끗 바라보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보고도 굽신거리는 기색 없이 꼿꼿한 모습부터 건방졌다. 귀족 아이를 숨겨 놓고 이다지도 뻔뻔하다니.
세 사람의 실랑이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에블린은 품위 없이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속을 살살 긁는 아들과 수상하기 짝이 없는 화가의 행태에 점차 자제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올라가 보세요.”
에블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노을빛이 와락 쏟아져 들어와, 또 다른 불청객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어차피 아이는 거기 없으니까.”
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글로리아 페이튼. 그 영애였다.
다니엘에 이어 그녀의 시기적절한 등장에 에블린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이렇게 세 명이었군. 이 일에 가담한 자가.
에블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 방향은 당연히 히아신스와 함께 이들을 어떻게 입막음해야 할지였다.
‘가문의 유일한 혈통을 확실하게 잘라 내야 하지 않습니까.’
글로리아와 피터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