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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후, 남주의 내연녀로 빙의했다 2
지은이｜유해령
펴낸곳｜루시노블
투고 및 문의 | lucy@sybook.kr
ⓒ유해령, 2025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5
“어, 어떻게……!”
글로리아는 제 눈을 비볐다. 하도 피곤해서 헛것을 보나 했는데, 다니엘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그가 옅게 웃으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은 별관 입구가 있는 곳이었다.
“이, 일단 들어오세요……!”
글로리아는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리며 속삭였다. 말을 알아들은 다니엘이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닫자마자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얼마나 끝내주는 잠을 잤는지, 그 짧은 시간에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뒤엉켜 있었다.
글로리아는 우선 빗으로 머리를 대충 빗어 내렸다. 그러면서 입가에 침 자국은 없는지, 눈에는 눈곱이 끼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얼추 사람의 꼴이 갖춰지자 마지막으로 실내에서 걸치는 커다란 숄을 챙겨 들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여기 남자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방문할 줄을 몰라!’
커다란 숄로 새하얀 레이스 잠옷을 가리며 날듯이 현관까지 내려가 문을 벌컥 열자 다니엘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밤입…….”
천연덕스러운 인사말을 들을 새도 없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딸려 들어오는 다니엘 뒤로 문을 닫자마자 글로리아는 나지막이 외쳤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언제든 와도 된다고 하시기에.”
“아니, 그래도 그렇지. 대체 누가 이렇게 불쑥 찾아오나요. 그것도 한밤중에.”
“사정이 있었습니다. 보는 눈도 있었고.”
“보는 눈?”
“당신 오라버니가 저를 신랑감으로 생각하고 있던데, 알고 계셨습니까?”
“아…….”
글로리아는 기껏 빗어 놓은 머리칼을 다시 움켜쥐었다.
“오라버니를 만났나요?”
“저녁에요.”
“다니엘 경에게까지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눈치가 좀 빨라서요.”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들뜬 마음을 못 참고 그에게 직접 떠본 모양이었다. 제 딴에는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글로리아는 이 정직한 오빠를 어쩌면 좋을지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별관 현관에 우뚝 서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우선…… 들어오세요. 차라도 내오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보는 눈이 있다면서요. 여기는 보는 눈이라고 해 봤자…….”
말을 채 다하기도 전이었다. 타이밍 좋게 부엌 쪽 문이 열리면서 도나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사람 목소리에 눈을 뜬 모양이었다.
“아가씨……?”
“도나, 손님이 오셨으니 응접실에 차를 준비해 주렴.”
“네? 아, 예. 알겠습니다.”
“자고 있던 중에 미안해. 차만 내주고 다시 쉬러 가도 좋아.”
도나는 글로리아와 다니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뒷걸음질 쳐 도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이쪽으로 오시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다니엘은 깊이 눌러쓴 모자를 벗고 경례했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 또 예는 완벽하게 갖추자 글로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 * *
서늘한 응접실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온 글로리아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다니엘과 마주 앉았다.
그의 등 뒤로 지난번 잭 아래에 깔렸던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글로리아는 곧 다시 그와 눈을 맞추었다.
곳곳에 초를 켠 응접실은 환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을 식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미 테이블 위에는 도나가 빠르게 준비한 다과 세트가 놓여 있었다.
다니엘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글로리아 앞에 놓인 찻잔에서도 옅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자, 이제 얘기해 보세요.”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녁에 왕궁에서 우연히 크리스를 만났습니다. 귀가하는 길이라기에 오랜만에 술을 한잔하자고 청했죠. 자연스럽게 크리스가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지금 오라버니는요?”
“경은 술이 약한 편이라서요.”
크리스를 취하게 한 뒤, 집을 나서다 말고 남들 눈을 피해 별관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글로리아는 늘 그렇듯 별관에 틀어박혀 있는 척하며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었으니 그가 온 소식도 듣지 못했다.
“……자택 침입 아닌가요?”
“글로리아 양이 저를 여기 들이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원래 이렇게 앞뒤 없이 과감한 분이셨나요?”
“원래라면 정식으로 방문 절차를 거칩니다. 그리고 그다음 정식 일정은 결혼식이었겠죠.”
결혼식이라는 단어에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아.”
글로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든지 쉬어도 된다더니, 꼭 크리스가 제일 동생을 시집보내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남편도 내색하지 않을 뿐 아가씨 걱정을 많이 해요. 우리 여자들은 조금만 시간을 낭비해도 시기를 놓쳐 버리니까요.’
생각해 보면 벨라도 그렇게 말했었다. 이제는 곤란함을 넘어 아주 약간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전 글로리아에게도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
‘어쩌면 지금의 나는 온순하고 말이 통하니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객관적으로 봐도 글로리아는 이 집안의 애물단지였으니, 글로리아가 얌전한 지금 결혼시키려는 이들 부부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 상황만큼은 이전 글로리아의 심정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울었다.
하나 남은 가족인 오빠가 아내와 함께 자신을 시집보내려 하는 모습은, 쫓아내는 거라고는 못 해도 속상할 만한 일이었다.
‘생판 남인 나도 이런데 진짜 가족인 그 애는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고.’
좋게 좋게 생각하면 크리스는 사랑하는 동생과 아끼는 친구를 이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제 동생이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을 테고.
다만 어느 글로리아도 그걸 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글로리아는 이마를 짚고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었다.
“제대로 거절하셨죠?”
“걱정하실 필요 없을 정도로요.”
글로리아는 흘러내리는 숄을 제대로 두르며 턱을 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응시했다.
대화가 끊겨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준비된 것 없이 불쑥 맞은 손님치고 이상하게 안정감이 있었다.
덕분에 글로리아는 조금 더 생각 정리를 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인기가 없어서 미혼이라고 했지만 글로리아 눈에 그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나이가 될 때까지 혼담이 없지 않았을 텐데.
매번 스스로의 가치를 깎는 방식으로 거절해 온 걸까.
“혹시 비혼주의예요?”
“비혼?”
“결혼 생각이 아예 없으시냐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스스로 평판을 깎아 가면서까지 결혼을 피하시는 건가 해서요.”
“궁금하십니까?”
주홍색 불빛에 물든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이 인간이…….’
글로리아는 상체까지 앞으로 내밀며 싱긋 웃는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요.”
“누구든 저마다의 고민이 있습니다. 아마 세상에 같은 고민, 같은 사정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연한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그 역시 맞장구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말을 이었다.
“사실 글로리아 양의 예상이 어느 정도 맞습니다. 애 딸린 남자는 결혼 시장에서 인기를 끌기 어려울 테니까요.”
“아이가 있는 건 비밀이라면서요.”
“아이를 숨기고 결혼하는 건 사기입니다, 글로리아 양.”
“그건 그렇죠.”
글로리아가 수긍하자, 잠깐의 침묵이 돌았다. 결국 글로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아이가 있었어요?”
“거짓말인 줄 아셨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이름은 히아신스입니다. 곧 5살이 되고요.”
글로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다시 그를 만나면 반드시 이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조금 더 번거로운 중간 과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없는 잡담을 번갈아 가며 기회를 노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동시에 그녀 머리 위에 어떤 문장이 떠올랐다. 그 말이 입안에 맴돌기만 하고 좀처럼 나오질 못하자 그런 글로리아를 눈치챈 그가 옅게 웃었다.
“제 딸이 아닙니다.”
“잠시만요.”
글로리아는 우선 대화를 끊어 냈다.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은 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가로 가서 문고리를 살짝 돌려 밀었다.
복도는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도로 문을 닫은 글로리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 하녀가 엿듣는 버릇은 없지만 혹시나 해서요.”
도나와 자신의 사이를 모르는 그에게 발언에 주의하도록 경고할 새도 없었던 게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물론 도나가 여전히 첩자 노릇을 하고 있을 리 없지만 뭐든 무조건이란 건 없었다.
속으로 안도하는 한편 괜히 유난을 피운 것 같아 민망해진 글로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겸사겸사 조심하는 시늉도 좀 하고요. 그래야 경이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겠어요.”
“여기에선 늘 하녀와 둘이 계십니까?”
“네. 이전엔 도나 외에는 들이지 않았나 봐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지만.”
글로리아가 말하는 지금이 어느 기점인지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글로리아는 곧바로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그래서, 다니엘 경은 그 히아신스라는 아이와 함께 살고 계시는 건가요?”
“제 유모였던 자가 돌보고 있습니다.”
“딸은 아니라면, 생판 남도 아니라는 뜻이겠네요.”
“조카입니다.”
다니엘은 정확히 글로리아가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먼저 나서서 설명해 주지 않으니 조금 답답했다.
그는 자신의 조카를 숨겨 키우고 있다.
지금으로선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 단번에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글로리아가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자 다니엘이 후후, 하고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절 놀리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하긴, 놀릴 만한 화제는 아니었다.
“그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