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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요새
밤밤맨 지음
3권
 
[목차]
6.
7.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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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호텔 앞에 차를 세운 승도가 차에서 내렸다. 몸에 딱 맞는 짙은 회색 정장 셋업을 입고 베이지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그의 모습은 평소 장난스러운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표정이 없어 사나워 보이기까지 했다.
승도가 다가온 발렛 직원에게 말없이 차량 카드 키를 건넸다. 그의 냉랭한 태도에도 직원은 미소를 유지하며 묵례한 뒤 승도에게 발렛 카드를 내밀었다.
발렛 카드를 재킷 안쪽에 넣은 승도는 정문으로 걸어갔다. 미리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안마파 조직원, 강민호와 오지훈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셨습니까.”
“…….”
후계자 시절 꽤 친하게 지냈고 지금도 나쁜 사이가 아닌 조직원들이었지만, 지금 승도는 그들을 반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민호와 지훈도 알기에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승도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로비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오메가들이 술렁거렸으나, 뒤이어 들어오는 조직원들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호감형이고 근사한 승도의 용모와 달리, 민호와 지훈은 누가 봐도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때려잡을 표정으로 승도와 조직원들이 1층 제일 구석에 있는 바로 가던 길이었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아까도 저런 사람들 들어가더니.”
‘아까도.’
언뜻 들리는 말에 일자로 다물려 있던 승도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비틀렸다. 침묵을 지키던 조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20분 더 늦게 오길 잘했습니다. 솔직히 이번엔 우호회라 정시에 올 줄 알고 내심 쫄았는데, 다행입니다.”
“이번에도 심리 싸움에서 이기셨습니다. 도련님.”
민호와 지훈의 호들갑에 승도가 음흉하게 웃었다.
“차도훈 그 새끼가 조직 간 우호니 화합이니 따지는 근본 있는 놈이 아니거든.”
차도훈. 용산에 뿌리를 둔 마포강산파의 후계자이자, 최승도와 사이가 매우 나쁜 알파였다.
이 악연의 시작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승도는 도훈의 애인을 가로챘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그 오메가가 도훈의 애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애초 다른 애인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오메가가 마음에 든다고 다가온 것을 거절하지 않고 함께 즐긴 것뿐이었다.
알고 보니 그 오메가는 애인이 있었고, 그 애인이 차도훈이었다.
안 그래도 도훈은 자기보다 어린 주제에 잘생긴 데다 인기까지 많은 승도를 싫어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도훈의 감정은 불편함을 넘어 혐오로 바뀌었다. 승도 역시 자신을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을 포용하는 변태적인 취미는 없었으므로 도훈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승연과 도훈이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 차이도 꽤 나건만 둘이 사적으로 만나는 모습을 보고, 승도는 단순한 꺼림칙함을 넘어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 구린 냄새가 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승도와 도훈은 서로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안마파와 마강파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후계자끼리도 공식, 비공식적으로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둘은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렸고, 적대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오늘.
승도가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 도훈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뭐? 동맹 후계 우호회를 하자고? 최승연이 없어서 날 대신 불러? 지랄한다. 그냥 나 개엿된 꼴 보고 싶어서 만든 자리겠지.”
보나 마나 사람 속을 긁어 대며 꼴값 떨겠지. 한숨을 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신경질적인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던 승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어깨를 꽉 감싸던 크고 섬세한 손.
살짝 찌푸린 이마와 밀랍 인형처럼 무표정한 눈.
위아래로 고르게 움직이던, 단단하게 솟은 가슴.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던 그 순간-.
 
‘왜?’
 
나지막이 내뱉어지던 재인의 조용한 목소리.
“……!!”
승도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도련님?”
“승도 도련님?”
뒤따라오던 조직원들이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아니, 지금 그게 왜 생각나는데?’
승도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재인은 나중에 생각해.’
차도훈 걔가 얼마나 날 괴롭힐 거야. 절대 얕보이면 안 돼.
사실 도훈과의 만남은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그리 간단한 상황이 아니었다. 안마파와 마강파는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이었지만, 공식적인 동맹 관계는 아니었다. 그 말은 언제고 두 파의 관계가 나빠질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이 우호회는 표면적으론 친목 모임이지만, 각 조직의 이익과 상황을 점검하고 상대 조직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렇기에 보통 조직의 두목끼리 우호회를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차도훈이 마강파 두목에게 직접 나가겠다고 나섰고, 오랜만에 최승도와 회포 좀 풀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고 했다. 숨은 의도가 심히 불길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주고받아야 해.’
승도가 결연한 얼굴을 하고 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정원과 연결된 바는 특유의 고급스러움에 외국 바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우러져 있었다. 바 중앙 무대에서는 첼리스트와 피아니스트가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인 광경이었으나, 바에 있는 손님들은 어딘가 지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침묵했다.
“대체 왜 저런 사람들이 자꾸 오는 거야.”
어디선가에서 볼멘소리가 작게 들렸다.
‘염병. 뭐 한다고 여기에서 만나재.’
차라리 안마파 클럽이나 마강파 룸살롱에서 보지. 승도는 도훈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의 제일 구석진 테이블 의자에 반반하게 생긴 알파 한 명 뒤에, 누가 봐도 조폭으로 보이는 알파 두 명이 사냥개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훈을 찾아낸 승도는 손님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바닥에 은은하게 반사되는 조명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먼저 도착한 도훈은 다리를 꼰 채 한 손엔 스마트폰을, 나머지 한 손엔 위스키 잔을 들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낮게 채워진 위스키를 마시는 모습이 애새끼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라미드 최상단에 군림하는 알파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져 기분이 나빠졌다.
승도가 가까이 다가오자 피식거리며 스마트폰을 보던 도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
“…….”
도훈이 약간 남았던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은 채로 빈자리를 향해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가?’
노골적인 도훈의 무시에 승도의 목덜미에 핏대가 서렸다.
아무리 차도훈이 저보다 나이가 많다 한들, 제가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한들, 자신은 엄연히 후계 대리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차도훈은 일어서지도 않고 인사 한마디 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이것은 명백한 무례였다.
그러나 이런 하급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하알파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금니를 꽉 깨문채, 승도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가 욕지거리를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거만하게 턱을 끄떡이며 응수했다.
“……!”
그 무례한 행동에 마강파 부하들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의 몸에서 은은히 공격적인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나, 승도가 눈깔을 치켜뜨자 재빨리 갈무리했다.
도훈이야 승도에게 무례를 저질러도 되는 혈통을 가졌지만, 그들은 차마 그럴 수 없는 신분이었다. 승도는 엄연히 안마파 대표 최진수의 아들이었다.
거기에 승도를 지키듯 선 민호와 지훈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까딱하면 조직 간 분란이 일어날 판이었다.
“그만.”
“예, 도련님!”
최승도는 끓는점은 낮지만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멱살잡이를 할 것 같은 조직원들 저지했다. 그것은 도훈도 마찬가지였다. 도훈이 조직원들에게 눈짓했다.
“야~ 최승도.”
드잡이질이 안 되는 것은 아랫것들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즉 당사자끼린 비공식적으로 마음껏 뜯어도 된다는 말이었다. 승도가 자리에 앉자마자 도훈이 비아냥거렸다.
“열성 됐다더니, 딱 꼬라지가 그렇네?”
그러나 이 정도 공격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승도가 바로 맞받아쳤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나 열성 된 게 언젠데. 너희 파 정보력이 용산 바닥을 기나 보다?”
“내가 진짜 정보가 느려서 이렇게 말했겠냐? 열성 되더니 논리력까지 맛이 갔나 보네. 지능 괜찮냐?”
“논리력이 아니라 문해력이겠지. 가방끈 짧은 거 이런 데서 드러나지요?”
승도의 노골적인 비아냥조에 도훈의 입꼬리가 떨렸으나, 이내 억지로 인자한 척 미소 지으며 쏘아붙였다.
“깡패가 가방끈 길어서 어디에 써먹냐? 네가 쓸데없이 대-.”
“너 지금 내 아버지 욕하는 거야?”
그러나 승도의 공격에 입꼬리가 굳고 말았다.
“업계에서 안마파 두목이 대학원까지 다닌 거 모르는 사람 있냐? 그런데 네가 지금 나보고 쓸데없이 가방끈 길다며. 그 말은 내 아버지한테 헛짓거리했다고 욕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최승연도 공부하느라 영국 갔는데, 너 지금 걔도 같이 까는 거야, 알아?”
승도의 비약 섞인 반격에 도훈의 목덜미에 핏대가 섰으나, 곧 억지로 웃는 낯을 만들어 냈다.
“너 후계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로 정신병이 더 심해졌다? 뭐, 내가 잘 아는 정신 병원 하나 소개해 줘?”
“이미 다니고 있어서 괜찮아. 그리고 네가 소개해 주는 병원 야매일 것 같아서, 좀 그렇다?”
“돈 주고 병원 다녀도 그따위로 미친 거 보면 야매가 더 나을지도?”
“네 얼굴보단 나을지도?”
꾸깃.
말끝마다 서슬 퍼런 미소로 받아치는 두 사람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응. 그래 봤자 너 열성. 고추는 서냐?”
“응. 그래 봤자 넌 못생김.”
“응. 그래 봤자 너 후계 자리에서 내쫓겼구요?”
“응. 나 대기업 취업할 거고요?”
“응. 네 핏줄 알게 되면 바로 서탈 할 거고요?”
이 새끼가? 두 남자의 눈깔에 핏줄이 서며 서로를 노려봤다.
잠깐의 침묵 후 도훈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새끼, 여전하네?”
“그쪽도.”
여기에서 기죽으면 안 돼. 승도는 태연한 척 상체를 앞으로 숙여 깍지를 낀 채 도훈을 관찰했다. 도훈도 지지 않고 같은 포즈를 취한 채 승도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서로의 코끝이 닿을 듯 가까이 얼굴을 맞댄 채 폭언을 주고받는 두 알파의 모습은 우호회의 본뜻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더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날카로운 긴장감이 바 안을 가득 채운 순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 지배인이 노련하게 끼어들었다.
바 지배인이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메뉴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험악해지는 두 알파의 분위기에 원래 있던 손님들이 한둘씩 자리를 뜨고 막 입장한 손님들도 되돌아 나갔기 때문이었다.
“남의 업장에서 영업 방해할 순 없지.”
도훈이 꺼드럭거리며 메뉴판을 들어 승도의 앞에 툭 던졌다.
‘……이 새끼가?’
던질 거면 뭐 하러 주냐? 내가 가져가면 되는데. 승도가 한마디 하려 할 때였다.
“마음껏 시켜. 형이 사줄게.”
“네가 뭔데 사준다 만다야? 나도 돈 있어. 각자 내.”
승도가 진저리를 치며 쏘아붙이자 도훈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너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서 개털일 거 아니야. 법카 쓰기도 눈치 보일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