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상사 2권
짐승 상사 2권
짐승 상사
· 2 ·
© 나비잠
짐승 상사 2권
· 차례 ·
6. 임신 가능성
7. 단 한 사람
8. 기적
9. 봄비
10. 은방울 꽃다발
에필로그
짐승 상사 2권
6. 임신 가능성
본부장실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도 엄숙했다.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할 만큼의 권위감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아, 하지 않아도 될 긴장을 하게 된다. 숨 한번 뱉고 내쉬기도 눈치가 보였다.
검토 내내 서라는 휘영의 눈길이 제게 닿길 기다렸다. 그러나 종이가 넘어가는 메마른 마찰음뿐.
그의 건조한 시선은 보고서에 고정된 채 미동이 없었다.
“PGI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원전 주기기와 SMR 제작사로서의 실적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 추가해서 진행하죠.”
보완과 그에 대한 허락이 마침표처럼 떨어졌다.
“네, 그럼 추진하겠습니다.”
이 팀장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등을 돌렸다. 얼떨떨하게 이 팀장의 뒤를 따르면서도 서라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뭐야, 이대로 끝…?
여기 오겠다고 화장을 얼마나 공들여 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서라는 이 팀장을 따라 나가지 않았다. 그러곤 간 크게도 집무실 문을 닫고, 슬그머니 문을 잠갔다.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렸다.
고대하고 고대했던 순간이 드디어 오고 만 것이다.
단둘만이 남은 공간, 서라가 살랑살랑 여우 꼬리를 드러냈다.
“서 본부장니임.”
서라는 버터를 치덕치덕 바른 듯 느글느글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휘영의 시선도, 눈빛도 결코 서라를 향하지 않는다. 그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툭, 툭. 길고 섬세한 남자의 손끝만이 마호가니 데스크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본부장님?”
서라가 한 번 더 휘영을 불러보지만, 깊게 침잠된 그의 의식은 섣불리 깨지지 않는다.
오기가 든 그녀는 콧방귀를 씩씩 내쉬고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탁, 탁!
소란스러운 소리에 그제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고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꾸깃, 되지도 않는 말에 휘영의 조각 같은 미간이 불쾌함으로 구겨졌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하지만 서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감하게 데스크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끝을 길게 뻗어 그의 단단한 팔을 유혹하듯 내리긋는다.
가까이서 본 그의 외모는 더더욱 예술이었다. 새카만 눈동자를 넋 놓고 응시하다 보면, 가히 온몸에 전율이 퍼져 나갔다.
“위로해드릴까 하는데.”
서라는 은밀한 제안을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하면, 넘어오지 않을 남자는 없을 테니까.
밀려오는 그의 진한 수컷의 향기에 취하며 그녀는 잠자코 승낙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오지 않았다. 서라는 휘영을 바라봤다.
흠칫.
그 순간, 서라의 안색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휘영의 표정이 험악할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것처럼, 날카롭게 날이 선 눈빛에 담긴 건 혐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제라도 송두리째 짓밟혀질 것만 같은 기분.
마치 네가 어떤 짓을 꾸미고 있든지 간에 절대 현실이 될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 헛수고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탁.
휘영의 손이 서라를 거칠게 쳐냈다.
“나가.”
“에?”
“말귀를 못 알아먹나? 당장 나가라고.”
“아, 아니…!”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거절당했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 내선전화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비서실이었다.
-본부장님. 외근 가실 시간입니다.
“10분 뒤 나가지.”
휘영은 내선에 응답하고는 정장 외투를 걸쳤다. 그 후 싸늘한 시선을 그녀에게 꽂아 넣는 것으로 의사를 대신했다.
내 집무실에서 꺼져.
휘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게 어찌해 볼 도리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서라는 이를 잘근 물었다 놓았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그녀가 살아오면서 난생처음이었다.
지금껏 유혹에 실패한 남자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굳건히 믿고 있었는데….
쫓겨나듯 나오며 서라는 애써 자기합리화했다.
‘누가… 쉽게 포기할 줄 알고?’
너무 쉽게 가진 것은 가치를 모르는 법.
상대는 SU 그룹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서휘영이다. 어렵게 쟁취한 만큼, 갖고 나면 승리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었다.
* * *
그날부터 서휘영을 갖기 위한 서라의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왜 이렇게 안 와?”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서휘영 때문에, 근태가 나쁜 편인 그녀는 며칠째 평생 하지도 않던 조기 출근을 했다.
서휘영은 바쁜 남자였다.
더군다나 일개 사원이 본부장을 만날 일은 극히 드물었다. 사적인 만남 또한 당연히 쉽지 않았다.
외근도 잦았다. 국내 경제를 장악한 오너 일가로 태어난 숙명을 받아들이듯 재계 월간지에 사업 성과를 달마다 빠짐없이 채워 갔다.
거기다 출근은 왜 이렇게 일찍 하고 퇴근은 왜 이렇게 늦게 하는 건지.
“앗, 본부장님!”
그때,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린 서라의 눈이 번뜩 뜨였다. 멀리서 걸어오는 휘영을 보자 졸음이 싹 달아났다. 그리고 오늘도 빛나는 남자의 외모를 훔쳐보게 됐다.
훤칠하게 올린 머리와 잘생긴 얼굴. 꾸준히 운동한 티가 나는 몸은 다부진 골격을 가지고 있다.
결점 따윈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외관이었다.
세상 두려운 것 없는 오만한 눈은 사뭇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본부장님 엄청 기다렸잖아요오.”
그날 이후, 서라는 과감하게 다가가기로 했다.
하지만 휘영은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끝까지 차가운 그 태도가, 오히려 그녀의 승부욕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하하, 우리 본부장님 참 과묵하시다-”
서라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꺄르르 웃어 보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그의 냉정한 시선에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게 된다.
이렇듯 휘영은 언제나 말 섞을 엄두를 꺾어버렸다. 그것이 서로 다른 위치가 주는 격차이자, 절대적인 계급 차이였다. 서휘영이라는 남자에게선 절대적으로 넘지 못할 벽이 우뚝 솟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이서라가 아니었다.
찡긋.
서라가 깜찍하게 윙크했다.
“혹시 점심 시간에 뭐 하세요? 괜찮으시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예 식사를 같이해도 좋고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역시나 응답은 오지 않았다.
띵.
회의실이 밀집된 층에 도착했다는 알림음만이 밀폐된 공간을 채웠다.
휘영은 그대로 말없이 발을 내디뎠다. 멀어져만 가는 무심한 뒷모습에 서라는 약이 올랐다.
“아니, 남의 말을 무시하시면 어떡해요. 잘생기면 다예요?!”
서둘러 따라 내린 그녀가 휘영의 팔에 과감히 팔짱을 끼며 강수를 두었다. 이번엔 뿌리치지 못하게 품 안에 꽉 껴안았다. 그리고 입술을 쭉 내밀고는 있는 힘껏 앙탈을 부렸다.
“아이잉, 본부장니임.”
“이 팀장.”
뭐야, 갑자기 깐깐한 이 팀장은 왜 부르는 거지?
한껏 애교를 부리고 있는데, 서라는 왠지 모르게 뒷덜미가 싸해졌다. 뭔가 상당히 잘못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뒤늦게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불쾌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서라의 팔을 뿌리치는 휘영 뒤로, 근처에 서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려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인 이 팀장은 경악을 넘어선 표정을 짓고서, 커다랗게 벌린 입을 손으로 가리지도 못한 채였다.
“본, 본부장님!”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확장된 이 팀장의 눈이, 하얗게 물들인 얼굴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빠른 이 팀장은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에 휘영은 마른 한숨을 내뱉고는 가버린다. 이 팀장이 눈에 불을 켜고 서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라 씨! 당장 따라와!”
“네? 싫은….”
“얼른!”
이 팀장이 서라를 데리고 간 곳은 야외 휴게실이었다.
흡연하는 직원들만 간간이 방문하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다다르자 이 팀장은 정신 나간 거 아니냐는 듯 서라를 꾸짖었다.
“서라 씨, 미쳤어?!”
“제가 뭘요?”
“뭐?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팀장님이야말로 제가 본부장님하고 대화하는데 끼어들고 그러시면 안 되죠.”
뻔뻔하다 못해 기가 찼다.
이토록 개념 탑재가 잘못됐는데, 어떻게 SU 중공업에 입사한 건지.
상식을 넘어선 무개념이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짚어줘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 팀장은 자신을 진정시키듯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허릴 짚고는 차근차근 타일렀다.
“서라 씨. 여기 대학교가 아니라 회사야. 서 본부장님은 엄연히 상사고.”
“그래서요? 본부장님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뿐인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건데요?”
“요 며칠간 그래서 회의할 때마다 따라와서 본부장님한테 찝쩍거린 거니? 너 오너 일가한테 이러는 거 내부 징계감이야!”
이 팀장은 문득, 휘영의 집무실에서 미적거리던 서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따라 나오는 듯하더니 갑자기 문을 잠가서 뭔가 싶었던.
지금까지의 행동을 종합한 결과, 서라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
윗선에 온갖 아부를 떨어서 불합리한 방법으로 위로 올라가려는 유형들이야 많이 봐 왔으니까.
“뭐, 뭐라고요? 찝쩌억?”
서라가 길길이 날뛰었다.
“회사에서는 명백한 상하관계가 존재해. 서라 씨 행동에 본부장님은 물론이고 같은 직원들도 불쾌해하고 있어. 그런 식으로 회사 생활 하면서 남한테 피해줄 거면, 나는 팀장 권한으로 서라 씨한테 불이익을 줄 수밖에 없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