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봉가
10권
소칠야 장편소설
제296장 옥패의 진짜 주인
‘옥패가 두 개라고?’
모두가 멍해 있는 사이, 정신을 차린 조월금이 다급히 소리쳤다.
“저건 가짜예요! 제 옥패를 보고 위조한 게 분명해요! 제 것이 진짜라고요!”
“닥쳐라!”
운단풍을 대할 때와 달리 군릉천은 부릅뜬 눈으로 조월금을 노려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네 죄는 나중에 다시 물을 테니 조용히 있거라. 한 번만 더 나서면 이 자리에서 널 죽여 버릴 수도 있다!”
그 말에 조월금은 입을 다물고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떨었다. 군릉천은 곧장 운단풍에게 몸을 돌리고 다정히 물었다.
“내게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운단풍은 어색하게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 오는 길에 청뢰족이 옥패를 가진 여인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제 옥패가 진짜인지 확실해지기 전까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어요.”
가짜가 진짜라고 우기는 동안 정작 진짜는 자신이 가짜라고 생각했다는 말에 군가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던 군영아는 이내 모든 진상을 깨닫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월금이 아니라 단풍 언니가 진짜 군가의 사람이라 너무 다행이다!’
운단풍과 군현 모두를 꾸짖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군릉천은 차마 운단풍을 꾸짖을 수 없어 군현을 향해 소리쳤다.
“한심한 놈!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네놈이 딱 그 꼴이구나!”
그러자 군현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운 소저가 옥패를 보여 주지도 않았는데 제가 어찌…….”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군릉천의 흉흉한 안색을 마주하고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스승님의 손녀딸도 알아보지 못한 제가 죽일 놈입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단풍이에게 군가 주인 자리를 넘기겠습니다.”
운단풍이 돌아왔으니 마침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꿈 깨라!”
그러나 군릉천은 눈을 부릅뜬 채 군현을 향해 호통쳤다.
“단풍이처럼 연약한 아이가 어찌 그런 무거운 짐을 감당하겠느냐? 군가는 네 소관이니 내 손녀에게 떠넘길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 매정한 말에 군현은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운단풍이 연약하다는 말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저…….”
그때, 운단풍이 눈치를 보다 군릉천과 군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이 옥패의 원래 주인은 제 어머니가 아니에요.”
“뭐?”
어렵게 얻은 외손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군릉천의 안색이 돌연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넋이 나간 그를 뒤로하고 군현이 물었다.
“하면 옥패의 원래 주인이 누군지는 아느냐? 그 사람과는 무슨 사이인 것이냐?”
운단풍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이 옥패의 주인은 제 시어머니예요.”
군릉천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운단풍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게 손녀가 아니라 손자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에 이런 일이!’
“스승님.”
멍하니 고개를 돌리던 군현은 잿빛이 된 군릉천의 안색을 보고 황급히 다가가 말했다.
“손녀가 손자며느리가 됐을 뿐이지, 단풍이는 여전히 군가 사람입니다.”
그 말에 기분이 가라앉았던 군릉천도 웃음을 되찾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운단풍을 향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얘야, 아무래도 우리의 인연이 보통이 아닌 것 같구나. 하면 내 손자와 딸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머님은 지금 무회대륙에 계세요. 할아버지의 손자인 운소는…….”
운단풍은 잠시 망설이다 사실대로 말했다.
“귀제예요.”
“그게 정말이냐?”
자신의 손자가 소문 속 귀제라는 말에 군릉천의 안색이 돌변했다.
‘중주에 있던 그 많은 놈이 내 손자를 잡으러 가던 거였다니!’
그는 운단풍과 운소의 정체를 진작 알았다면 귀제를 토벌하러 간 중주 세력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며 격노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자는 하나가 아니에요. 어머님께서는 무회대륙에서 아들과 딸을 입양하셨거든요. 거기다 제가 떠나던 날 쌍둥이도 낳으셨죠.”
노기 가득하던 군릉천은 운단풍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내를 잃고 딸과 생이별을 한 후 마음 둘 곳이라곤 군영아뿐이었는데 갑자기 손주가 다섯이나 더 생겼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현, 나 좀 부축해 다오.”
놀라 비틀거리던 군릉천은 옆에 있던 군현이 빠르게 움직인 덕에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뒤이어 군릉천이 군현의 손을 꽉 잡은 채 멍하니 말했다.
“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구나. 어서 날 한 대 때려 보아라.”
군가의 주인인 군현은 다른 이들 앞에선 위풍이 넘쳤지만, 군릉천의 앞에서는 충성스러운 제자일 뿐이었다. 그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이마를 때리자, 군릉천이 돌연 화를 내며 군현을 발로 걷어찼다. 졸지에 바닥에 널브러진 군현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따지듯 물었다.
“스승님께서 때려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고 감히 스승을 쳐?”
군릉천은 군현을 한참 노려보다 이내 누그러진 얼굴로 운단풍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단풍아, 우리끼리 상의할 일이 있다.”
“뭔데요?”
“네가 내 외손녀가 되고, 귀제를 내 손녀사위로 삼는 건 어떻냐?”
그 뻔뻔한 말에 군가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운단풍 또한 그의 제안에 무어라 답하지 않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저야말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귀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세요?”
운단풍은 운소와 헤어진 지 3년이 된 지금, 더는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다. 그러나 군릉천은 안타깝다는 듯 탄식하며 말했다.
“장신산으로 갔다.”
장신산이라는 말에 운단풍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 또한 장신산이 무회대륙의 돌아올 수 없는 숲처럼 매우 위험한 곳이란 걸 알고 있었다. 운소가 그곳으로 갔다니 무사하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잠시 뒤 그녀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저도 내일 당장 장신산으로 가겠어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군릉천이 말했다.
“하나 단풍이 넌 지금 성존 고급 아니냐?”
군릉천의 말에 자리에 있던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운단풍이 강하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성존 고급에 이르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군릉천은 놀란 이들을 뒤로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재능은 분명 뛰어나지만 장신산에 가기엔 아직 부족하다.”
“그래도 가야만 해요.”
군릉천의 만류에도 운단풍의 굳은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발 물러서듯 한마디 툭 던졌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바로 가고 싶지만…, 군가 부인의 몸이 제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실 것 같네요.”
군현의 부인은 몸도 약한 데다 중병까지 앓고 있었는데, 그간 군릉천이 수소문한 명의들도 그녀를 고치지 못했을 정도로 위중했다. 하지만 운단풍의 의술 실력을 아는 군릉천은 희망에 찬 얼굴로 물었다.
“설마 치료법을 알고 있는 게냐?”
“군가 부인은 중독되신 거예요. 다만 선천적으로 몸속에 있던 독소라 완전히 회복하긴 힘드실 거예요.”
운단풍은 감격한 군릉천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잠시 병세를 늦출 수는 있어요. 장신산에서 돌아오면 그때 다시 치료해 드릴게요.”
사실 군가 부인의 병세는 운단풍의 실력으로도 쉽지 않았다. 성군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한, 치료하는 데 족히 한 달은 걸릴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운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우선 군가 부인의 병세를 잠시 진정시키고 돌아와서 제대로 치료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려무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군릉천은 헛기침을 하고는 덧붙였다.
“군현, 단풍이를 어서 네 부인에게 데려가거라.”
군영아로부터 운단풍의 의술 실력을 전해 들었던 군현은 곧장 운단풍을 데리고 부인에게 향했다. 군영아는 그들을 따라가는 대신 조월금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그녀의 눈빛에는 선명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조월금, 네가 전에 한 말 기억해? 나와 단풍 언니는 할아버지의 혈육이 아니니 우리를 내쫓고 네가 군가의 주인이 될 거라고 했잖아. 가짜 주제에 겁도 없이 감히 그런 소리를 해?”
“말도 안 돼. 그 옥패는 어머니께서 주신 거란 말이야! 어머니가 나를 속이셨을 리가 없어!”
조월금은 절망에 차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군영아는 냉정한 얼굴로 손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여봐라, 조월금을 저잣거리로 끌고 가 그간의 악행을 낱낱이 까발려라! 조월금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도록!”
그녀는 조월금에게 빌붙어 아첨하던 이들에게 조월금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 줄 심산이었다.
‘아용, 너도 나를 배신할 땐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겠지.’
“네, 아가씨!”
“안 돼! 놔! 제발 날 놔줘! 제발!”
명령을 받은 두 호위는 냉큼 조월금을 끌고 밖으로 향했고, 조월금의 비통한 목소리가 서서히 군영아의 귓가에서 멀어져 갔다.
***
다음 날.
군가 사람들과 함께 운단풍을 배웅하러 나온 군영아는 운단풍의 손을 꼭 잡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단풍 언니, 언제쯤 돌아오실 건가요?”
“운소를 찾으면 바로 돌아올게.”
운단풍이 먼 하늘을 응시하며 담담히 말하자 군릉천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간절하게 물었다.
“얘야, 정녕 혼자 가도 괜찮겠느냐? 네가 홀로 그 위험한 곳으로 간다니 이 할아비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다.”
그는 간신히 만난 운단풍과 다시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여 밤새도록 그녀를 설득했지만 끝내 먹히지 않았고, 운단풍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게요.”
‘내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장신산에서 죽을 순 없지.’
결국 운단풍의 고집을 꺾지 못한 군릉천은 말없이 소매 속에서 옥패 두 개를 꺼내 건넸다. 하나는 본디 운단풍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군릉천은 과거 딸과 함께 잃었던 옥패를 되찾은 기쁨에 밤새 딸을 그리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이 옥패는 내 딸이 네게 준 것이니 이젠 네 물건이다. 네게 생명의 위험이 닥쳤을 때 한 번은 막아 줄 테니 꼭 목에 걸고 다니거라. 그리고 다른 옥패에는 내 영혼의 힘을 한 가닥 넣어 놨다.”
영혼의 힘이라는 말에 군가 사람들이 경악한 눈으로 일제히 군릉천을 바라보았다. 한 가닥이라고는 해도 영혼에 내재된 힘을 사용했으니 회복하는 데 족히 몇 달은 걸릴 터였다.
“위험에 처하거든 이 옥패에 영력을 불어넣거라. 하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가 순식간에 네 곁으로 갈 수 있을 거다.”
아무리 군봉영과 인연이 닿아 있다 해도 고작 두 번 본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거는 군릉천에게 운단풍은 깊이 감동했다.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옥패를 받아 들어 소중히 품에 안은 그녀의 두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단풍아, 떠나기 전에 외할아버지라고 한번 불러 보겠느냐?”
군릉천은 야속하다는 얼굴로 운단풍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끝까지 안 불러 줄 것이냐?”
그러자 운단풍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외할아버지.”
가볍고 담백한 목소리였지만, 군릉천의 마음속 깊이 울려 퍼졌다.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진 그는 당장이라도 운단풍을 잡아 두고 매일 외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동안 다들 몸조심하세요.”
마지막으로 공손히 인사 올린 운단풍이 마당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거 놔. 날 들여보내 줘! 영아를 만나야겠어.”
운단풍의 모습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란에 군영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아야, 누가 너를 찾아온 것 같구나.”
군현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고개를 끄덕인 군영아가 문지기에게 냉랭히 명령했다.
“들여보내.”
그렇게 길이 트이자 곧장 아용이 뛰어 들어왔다.
“영아야, 난…….”
아용은 죄책감과 민망함이 뒤섞인 얼굴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군영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꼬리를 잘랐다.
“난 이제 네 친우가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 다른 이들처럼 영아 아가씨라고 불러.”
‘조월금이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아용의 참모습을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그 싸늘한 태도에 아용이 다급히 변명하며 군영아에게 다가갔다.
“영아야, 나도 속아서 그랬던 거야. 믿어 줘.”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호위에게 가로막혔고, 아용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제발 부탁이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입술을 꼭 깨물며 말하는 아용을 군영아는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