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봉가
9권
소칠야 장편소설
제261장 바보들의 행진 (2)
능리 무리의 등장에 홍릉은 재빨리 사람을 보내 홍란을 부르고 정방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북주주, 안 그래도 연락하려 했는데 마침 잘 오셨소.”
그는 능리가 입을 열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두 가문 간의 연합은 여기까지인 듯하오. 혼사는 없던 일로 하지요.”
“동주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능리가 가라앉은 눈으로 묻자 홍릉은 능진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자세한 건 귀댁 공자께 여쭤보시오.”
제 아들을 매섭게 바라보는 홍릉의 시선에 능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란이를 찾아왔는데, 불러 줄 수 있겠소?”
“그럴 줄 알고 사람을 보내 놨소이다.”
홍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란이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정방으로 들어섰다. 능진은 죄책감에 찬 눈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셨습니까, 북주주님?”
걸음을 멈춘 홍란이 능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혼사를 무르기 위해 오신 겁니까?”
자신을 북주주라 부르는 홍란의 싸늘한 태도에 능리는 짧게 탄식했다.
“란아, 어찌 그리 남처럼 구느냐? 이번 일은 진이의 잘못이 맞다. 하여 함께 사과하러 왔단다. 하초도 데려왔으니, 네 화가 풀릴 때까지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능리의 기대와 달리 홍란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렸다.
“북주주님, 능진은 이미 하초와 혼인한 사이인데 제가 왜 능진을 받아 주어야 합니까?”
홍란이 조금도 굽히지 않자 능리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사내에게 다른 여인이 있는 게 뭐 어떻다고 그러느냐? 하나 내 앞으로 북주부에 다른 여인은 들이지 않겠다 약조할 테니 그만 마음 풀거라.”
그는 어떻게든 동주부와 연합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초에 관해서는 능리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한 능진은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결벽증이 있어 다른 이의 손때가 탄 사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홍란!”
결국 참다못한 능리가 분노를 터뜨리자 홍릉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매서운 낯으로 소리쳤다.
“북주주, 자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내 딸은 자네가 함부로 호통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네!”
그 말에 이성을 되찾은 능리가 깊이 숨을 내쉬며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란아, 부디 잘 생각하길 바란다. 이 세상에 한 여인만 바라보는 사내는 없다. 우리 진이도 앞으로 첩을 들이지 않겠다 약조하지 않았더냐?”
동시에 능리가 눈짓하자 즉각 앞으로 나선 능진이 다급히 말했다.
“맹세하마. 란이 너와 혼인한 후엔 어떤 여인도 북주부에 들이지 않으마.”
그러나 그의 맹세는 첩을 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지,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내가 어찌 한 여인만 보고 산다고? 첩을 들이진 않아도 밖에서 잠시 만날 순 있지!’
능진 부자의 그런 속내를 모를 리 없는 홍란은 냉소로 대꾸하고는 경멸 어린 눈으로 그들을 훑어 내렸다.
“능진, 일전에 말했듯 나는 평생 나만 바라볼 사내를 원한다.”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오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네놈처럼 이성보다 욕구에 충실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와 혼인한단 말이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분고분했던 홍란이 이토록 완고하게 나오자 능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첩을 들이지 않겠다는 말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란아, 이 혼사는 네게도 좋은 일이다. 요즘 세상에 첩 하나 들이지 않는 사내가 어디 있단 말이냐? 네 꿈은 허상이다. 욕구는 사람의 본능과도 같은 것인데 누가 참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홍란은 냉랭히 코웃음 쳤다.
“북주주님 말씀대로라면 사내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자유로이 욕구를 해결할 수 있겠군요!”
“홍란!”
결국 폭발한 능리가 예의도 내던진 채 거칠게 대꾸했다.
“지금 그게 무슨 망발이냐! 건방지게 여인이 어찌 사내와 맞먹으려 들어? 평생 남편을 섬기며 정절을 지키는 것이 여인의 도리거늘. 감히 외도를 저지르는 여인은 찢어 죽여야 한다!”
사실 능리는 첩이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운 적이 있어 홍란의 말에 더욱 발끈했다. 홍릉도 지지 않고 나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능리, 여긴 동주고, 란이는 내 딸이니 말을 가려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더는 참아 줄 수 없다!”
“홍릉, 네놈이 날 나무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여인이 돼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방탕한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도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친 게야!”
홍란이 동주의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능리는 진작 이 혼약을 파기했을 터였다.
“내가 딸을 어찌 가르쳤는지는 네놈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홍릉은 무표정으로 싸늘히 일축했다.
“여봐라, 당장 이들을 내보내라! 그리고 앞으로 북주 놈들은 동주에 얼씬도 못 하게 해라!”
그간 쌓아 온 북주부와의 친분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내린 매몰찬 명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능리는 사과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와 오히려 홍란에게 혼인을 강요했다. 그런 이들에겐 더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
‘내 20년 전 비록 란이 어미는 떠나보냈지만, 란이만은 더 상처받지 않게 지켜 줄 것이다!’
“홍릉! 정녕 이리 나오겠단 말이냐?”
능리가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지만, 홍릉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알아들었으면 당장 돌아가라!”
“좋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아라!”
능리는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홍란을 노려보았다.
“홍란, 우리 진이 같은 사내를 놓쳤으니 넌 평생 후회할 것이다! 아마 첩에 정신 팔린 놈과 혼인하게 되겠지! 우리 진이 같은 사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북주부 사람들과 함께 재빨리 동주부를 떠났다. 까맣게 잊힌 채 홀로 정방에 버려진 하초만이 두려움에 휩싸인 눈으로 홍란 부녀를 바라보았다.
“란아, 저 계집은 어찌 처리할 생각이냐?”
홍릉이 홍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고민하던 홍란이 답했다.
“하초가 그간 저지른 짓은 저와는 무관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운단풍을 유혹하려 한 것 정도겠지요. 그러니 아버지, 어떤 세력도 하초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려 주십시오. 하초가 자멸하도록 말입니다!”
홍란은 나름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능진에 관한 일을 빼면 하초가 저지른 짓은 모두 홍란과는 무관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그러나 그 관대한 처벌에도 하초는 절망을 금치 못했다. 홍란의 말대로 된다면 하초는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훗날 혼삿길까지 막히게 될 터였다. 혼인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인생을 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홍란 소저, 제발 저를 놔주세요! 제발요!”
하초는 다급히 홍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나 세게 머리를 박았는지 이마에선 선혈이 흘러내렸다.
“홍란 소저,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신 이러지 않을 테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발…….”
그러나 홍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거만히 말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이건 단풍이에게 감히 손을 댄 대가라고!”
그녀는 제 손으로 하초를 처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대로 금지령을 내리면 하초는 어디를 가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비참한 삶을 보내게 될 터였다.
“꺼져라!”
홍란의 호통에 하초는 즉시 두 명의 호위의 손에 붙들린 채 질질 끌려 나갔다. 그렇게 대문 밖으로 내팽개쳐진 그녀는 그대로 땅바닥을 나뒹굴며 힘없이 눈물만 훔쳤다. 사내라면 마음이 흔들릴 법도 했지만, 홍란에게는 오히려 혐오감만 들 뿐이었다.
모두가 떠나고 정방에는 한동안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때 홍란이 상석에 앉은 홍릉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듣는 딸의 감사 인사에 홍릉은 가슴이 떨려 왔다. 그의 눈가가 떨리는 것을 본 홍란이 몇 마디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방금 저를 두둔해 주신 것에 감사를 표했을 뿐, 과거의 일은 아직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이 헛된 희생이 될까 두려워 차마 홍릉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나도 안다.”
홍릉이 쓰게 웃었다.
“설령 네가 나를 영영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내 평생을 바쳐 만회하마.”
홍란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물끄러미 홍릉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정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홍릉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가씨.”
정방 밖으로 나온 홍란의 앞에 누군가 나타나 공손히 아뢰었다.
“찾으라 명하신 자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뭐라고? 귀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단 말이냐?”
홍란은 속으로 몹시 환희했다.
“중주 고룡진(枯龍鎭)입니다!”
“그래, 당장 운단풍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
한편, 운단풍은 작은 통나무집 문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호리와 무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응시했다. 때마침 호리가 운단풍을 발견하고 반색하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운단풍, 왜 이제야 오는 거냐!”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막 그녀를 껴안으려던 순간, 새싹이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동시에 수많은 넝쿨이 호리의 몸을 꽁꽁 묶어 버렸다.
“네가 없는 동안 이놈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지루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그렇게 말하는 호리의 눈빛은 애잔하기 그지없었다.
“이틀 뒤 동주를 떠날 거라고 알려 주러 왔어.”
“정말이냐? 드디어 홍란 그 미치광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군. 그동안 서주학원에서 홍란에게 얻어맞은 자가 어디 한둘인 줄 아느냐? 다들 홍란을 보기만 해도 기겁할 정도다.”
진지하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호리의 하소연을 들어 주던 운단풍이 대뜸 덧붙였다.
“하나 더 말해 줄 게 있는데, 홍란도 우리와 함께 갈 거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호리의 입가가 그대로 굳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농담이지? 그 미치광이를 데려가겠다고?”
“농담 같아?”
운단풍이 미간을 치켜들며 반문하자 호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됐다. 그 미치광이와 함께 갈 바에야 차라리 죽고 말지.”
“10년 동안은 넌 내 부하야.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어.”
운단풍은 호리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주인님!”
고개를 돌려 소백을 발견한 운단풍은 곧 혼자인 것을 알아채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혼자야? 약백이는?”
“그게… 약백이가 안 보여요.”
첫 입맞춤의 충격으로 잠시 넋을 놓았던 소백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임약백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무도 약백이를 함부로 해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은데… 사기라도 당하진 않을지 걱정이네.”
“주인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약백이에게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거든요. 누가 옷을 벗기려고 하거든 나쁜 놈이니 후려치라고도 했어요.”
소백이 칭찬해 달라는 듯 운단풍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지금의 임약백은 남녀 간의 일에 무지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 둔 말이었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도 했어야지.”
운단풍의 말에 돌연 안색이 굳어진 소백이 머리를 긁적였다.
“거기까지는…….”
“가자, 일단 약백이부터 찾고 다시 얘기하자.”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운단풍은 소백의 곁을 지나가며 싸늘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다녀와서 봐. 가만 안 둘 테니까.”
***
그 시각, 북주부의 호위들은 임약백을 데리고 막 능진의 거처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들은 주위를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창고로 향했다.
제262장 바보들의 행진 (3)
“너희는 여기 남아서 망을 좀 보거라. 내가 이 소저에게 공자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손수 가르칠 동안.”
돌아오는 길에 운단풍을 모욕했던 호위가 헛기침하며 말하고는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임약백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셔? 난 시녀가 되기 싫은데.”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에 호위들이 너도나도 웃음을 토해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녀가 아니라 호사를 누리게 될 테니. 앞으로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을 겁니다.”
호위는 임약백의 팔을 잡아당겨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난잡한 창고의 모습에 임약백은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로 호위를 바라보았다.
“맛있는 건 어디 있어?”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