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봉가
4권
소칠야 장편소설
제86장 영은의 과거
영원이 언성을 높이자 영명이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이건 사장로의 잘못이 명백하니 나 역시 방도가 없다. 은이를 데려오라고 보냈건만 애꿎은 사람을 해치고 돌아왔다. 그 일로 운가에서 책임을 물으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나라고 뭘 어쩌겠느냐?”
영명의 설명에도 영원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뭘 망설이십니까? 이 영가에서 대체 누가 어르신의 명령을 거역한다고요?”
“상대는 은이를 살린 은인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옥패까지 지니고 있어 나 역시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영명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줄곧 영원을 좋게 보고 있었다. 제멋대로 굴기는 해도 재능이 뛰어났고 영은에게도 진심이었다. 무엇보다 여색을 밝히지 않으니 말썽을 일으킨들 평생 딸을 마음고생 시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영가의 장로라는 지위는 물론, 천영자라는 실력까지 갖춘 사장로도 사돈을 맺기에 아주 훌륭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운단풍을 보고 나서 영명은 그제야 진정한 천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운청과 영은을 혼인시키고 싶었지만, 미약한 운가의 세력 때문에 선뜻 결정이 망설여졌다.
‘은이에게는 뒤를 받쳐 줄 세력이 필요하니 운가는 절대 안 되지.’
“어르신, 운가 놈들이 어찌 선대 어르신의 옥패를 손에 넣었겠습니까? 보나 마나 어디서 훔쳤을 겁니다. 게다가 운청 역시 영은에게 나쁜 마음을 먹었으니 이대로 저놈들을 영가에 둬서는 안 됩니다!”
그 말에 영명의 안색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선대 어르신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운단풍 그 아이가 아무리 출중한들 옥패를 훔치는 게 가당키나 하겠느냐! 설령 그렇다 한들 네가 그리 말하면 어르신의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됐다, 더 말할 것도 없으니 당장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너 또한 네 아비 꼴이 될 테니!”
영원은 분노가 차올라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영명을 매섭게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그는 순간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이토록 오래 한결같이 사랑했는데 어찌 단 한 번도 날 봐 주지 않는 것이냐. 게다가 운청 같은 기생오라비에게 넘어가다니, 그것만은 결코 용납 못 한다!’
그는 영은의 이름만 떠올려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영은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에 곧 그의 두 눈빛이 결연한 의지로 번뜩였다.
퍽!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는 눈앞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감히 날 치다니!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느냐?”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한 어린 소녀였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절로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고, 두 눈은 마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흔치 않은 사랑스러운 외모에 놀라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영은으로 가득했기에 다른 여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넌 또 뭐야?”
임약백이 부딪친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이에 질세라 영원도 버럭 화를 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대체 누가 이런 원숭이 같은 계집을 함부로 영가에 들인 것이냐!”
평소 같았으면 여인과 언쟁을 벌이는 것만큼은 피했겠지만, 지금은 기분이 몹시 상해 모든 것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그러자 임약백이 대뜸 발을 들어 그의 급소를 걷어차 버렸다.
퍽!
잠시 후 영원의 처절한 비명이 영가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조금 전 막 영가에 들어온 그로서는 그녀의 정체는 물론, 그녀가 운단풍의 일행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네년이 감히 날 차?”
그는 고통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사납게 소리쳤다.
“이대로 내 대가 끊기면 네년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 없는 영원은 이 원한을 반드시 제대로 갚아 줄 생각이었다.
“그래, 찼다! 어쩔래?”
임약백이 양손을 허리춤에 걸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몰래 들어온 거 아니거든? 당당히 스승님을 따라 들어온 거라고!”
“스, 스승이라면…….”
영원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임약백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바로 운단풍이시다.”
운단풍이란 이름에 영원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고, 곧이어 엄청난 분노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이성을 잃고 흥분한 그는 급기야 고함을 치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네년이 운단풍의 제자로구나! 내 당장 네년을 죽여 아버지를 대신해 복수하겠다!”
그는 말을 마치고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임약백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공격을 피했다.
‘아버지의 복수?’
생각을 이어 가던 그녀는 문득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 단숨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네가 바로 사장로의 아들이었구나? 잘됐다, 마침 널 찾고 있었는데 제 발로 걸어왔구나. 우유야, 물어!”
“찍찍!”
그러자 우유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영원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다. 이내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피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으악!”
영원은 연신 비명을 내지르며 어깨 위의 우유를 움켜쥐고 단숨에 숨통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막 손을 뻗으려던 찰나,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우유의 시선과 마주쳤다.
‘하다 하다 이제 쥐새끼까지 날 무시해? 죽여 버리겠어!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그는 그대로 주먹을 내질러 자신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피부가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의 힘이었지만 손을 떼 보니 우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찍찍!”
돌연 앞쪽에서 자신을 놀리는 듯한 쥐의 울음소리에 영원은 매서운 눈길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유는 어느새 여유로운 자세로 낙엽 위에 누운 채 자그마한 발톱으로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임약백은 단숨에 그 뜻을 눈치채고 영원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내 날아차기 맛 좀 봐라, 이 자식아!”
당황한 영원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지만, 그녀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는 피할 새도 없이 세차게 뺨을 얻어맞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얼굴에 남은 선명한 발자국만이 조금 전 그가 느꼈던 고통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까짓 게 감히 우리 스승님의 숙부, 숙모님을 갈라놓으려 했겠다?”
임약백은 쓰러진 영원의 위로 몸을 던져 그를 깔아뭉개고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한 번만 더 스승님의 숙모 되실 분을 넘보기만 해 봐!”
영원은 그녀에게 짓눌려 피를 토해내더니 이를 갈며 간신히 몇 마디 내뱉었다.
“젠장, 더럽게 무겁네!”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그만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고, 그 대가로 엄청난 고통을 맛보게 되었다. 잔뜩 화가 난 임약백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귀여웠던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분노로 물든 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 입조심해. 내가 얼마나 가벼운데!”
그 뒤로도 그녀는 찔리는 마음을 감추려 작은 주먹으로 영원을 흠씬 두들겨 팼다. 영원은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와 뺨의 통증에 거칠게 땅을 긁었다. 흙바닥에 손자국이 나고 손톱 안까지 흙이 파고들었다.
“이 망할 년! 그만해!”
난생처음 겪는 굴욕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발악하듯 소리쳤다.
“나는 영가 사장로의 아들이다! 영가에서 결코 네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쯧쯧, 네 아비는 이미 우리 스승님께 처참히 졌다고. 그것도 몰랐어?”
임약백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지만 영원에게는 그 미소가 악귀처럼 보여 심장이 벌벌 떨렸다.
“두고 봐라! 내 언젠가 너희 두 사제를 매달아 놓고 흠씬 두들겨 패 버릴 것이다!”
그는 한참 얻어맞은 끝에 처참해진 몰골로 부들부들 떨며 웅얼거렸다.
“아직도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하나 본데, 나한테 손도 못 댄 주제에 허세 부리기는! 우리 스승님은 나보다 훨씬 강하신데, 누가 누굴 패겠다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한 임약백은 이내 한 손으로 영원의 옷자락을 잡아채고 거뜬하게 그를 땅에서 들어 올렸다.
“가자, 우리 스승님을 뵈러!”
***
처소 안.
운단풍은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반듯이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야 눈을 뜬 그녀의 입에서 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약백이를 치료할 때 흡수한 영력 덕에 지영자 중급 정점을 찍고 고급만 남겨 두고 있었는데 설마 영가에서 승급하게 될 줄이야.”
[주인님, 이제 성수를 드셔도 되겠어요. 그것만 있으면 바로 천영자에 오르실 거예요.]
머릿속에서 소백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말한 성수는 과거 영역에서 임경풍에게서 받아 온 것으로, 천영자로의 승급을 도와줄 뿐 아니라, 복용 후 신체를 더욱 강화해 주는 효능까지 지녔다.
“그래.”
운단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막 성수를 꺼내려던 그때, 돌연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와 동시에 임약백이 웬 소년을 짐짝처럼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와 운단풍의 앞에 내팽개쳤다.
“스승님, 이놈이 바로 사장로의 아들이래요!”
운단풍에게 한달음에 달려간 임약백은 코가 시퍼렇게 멍이 든 영원을 흘끔 바라보다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 이놈이 자기가 운이 나빠서 저와 부딪쳐 놓고 감히 건방지게 굴지 뭐예요?”
그녀는 영원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라 그의 다리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아악!”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고통을 호소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운단풍을 노려보았다.
“운청만 아니었어도 영은은 진작 내 아내가 되고도 남았을 거다! 내 아내를 빼앗아 간 네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 말에 운단풍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우리 숙부님한테 영은을 빼앗겼다고 생각해?”
운단풍의 말에 정곡을 찔린 영원은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듯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말대로 영은은 애초부터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오랜 세월 죽마고우였던 그를 두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운청에게 마음을 빼앗길 리 없었다. 스스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에게 치부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하, 은이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르신께서 명령만 하시면 어차피 나와 혼인하게 될 테니.”
영원은 차갑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설마 어르신께서 보잘것없는 너희 운가와 사돈을 맺으실 거라 생각하느냐? 웃기는 소리! 네가 은이의 목숨을 구했어도 그분은 은이를 운가로 보내지 않으실 거다.”
영명은 영 노인과 달리 의리보다는 대의를 우선시했다. 만약 슬하에 자녀가 더 있었다면 그 또한 영은이 누구와 혼인하든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영가의 직계 후손은 영은뿐이니 가문을 위해 운청과의 혼인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천영자 하나 없는 나약한 세력 주제에, 설령 지금보다 이름을 더 날린다 한들 영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영원은 눈살을 찌푸리는 운단풍을 바라보며 폭소했다.
“운단풍, 너희 운가가 터무니없이 약한 걸 우리 영가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네 재능이 훌륭하다는 건 인정한다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강자다. 천영자조차 오르지 못한 너 따위는 누구라도 쉽게 죽일 수 있지!”
그의 얼굴이 서서히 흉하게 일그러지더니 끝내 한 맺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운단풍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은이가 나와 가길 원한다면 누구도 그 아이를 막을 수 없어.”
“건방지구나! 네가 선대 어르신의 비호를 받는 건 알고 있다. 하나 그분께서 존경하시는 분은 따로 계시지. 그건 바로 신의 천애 님이시다.”
한창 운단풍을 조롱하던 영원은 어느새 존경 어린 눈으로 신의 천애를 입에 담았다.
“나는 얼마 전 천가의 천림이라는 사내를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영은에 대해 말해 주니 천림도 은이에게 흥미를 가지더군. 은이의 부상 때문에 내가 먼저 돌아왔지만 천림도 곧 약조대로 신의 님을 모시고 은이를 치료하러 올 것이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난 인연을 떠올리던 그는 자신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인 운단풍을 증오스레 노려보았다.
“내가 천애 님을 모셔오면 가문에서도 내 능력을 인정해 줄 테고, 은이도 나를 사랑하게 되겠지! 한데 너 따위한테 선수를 빼앗기다니 참으로 분하구나! 하나 상관없다. 곧 천림이 와서 나와 은이의 일을 해결해 줄 것이다. 선대 어르신께서도 천애 님을 존경하시니, 그분이 나를 위해 나서 주시면 너는 이제 끝이다, 운단풍!”
“천가?”
영원을 힐끗 내려다보던 운단풍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이제 보니 어디를 가든 꼭 천가 사람들이랑 엮이네. 우유야, 은이가 깨어날 때까지 이놈을 잘 감시해. 도망 못 가게.”
“찍찍.”
우유는 주인이 부여한 임무를 완벽하게 성공시키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백아, 우린 영명에게 가 보자. 은이의 일을 논의해야지.”
영은이 깨어날 때에 맞춰 영가의 일을 완전히 해결할 생각에 그녀는 다시금 정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87장 우유부단한 가장의 비애 (1)
“어르신!”
종이 냄새로 가득한 서재에서 책을 읽던 영명의 귓가에 돌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하인이 먼저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이냐? 혹시 또 누구에게 변고라도 생긴 것이야?”
영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엄하게 물었다.
“천가 사람들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하인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보고했다.
“천가? 천애 님이 계신다는 그 천가를 말하는 것이냐?”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에 어리둥절하던 영명은 반색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다더냐?”
그 질문에 하인은 영명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것이… 천가의 천림 공자께서… 구혼을 하러 오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답에 영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구혼? 누구에게?”
“영은 아가씨입니다!”
“뭐라고?”
설마 영은이 천가와 얽히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영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운단풍이 영은을 살려 낸 지금은 심사숙고해야 했다.
“어렵구나, 어려워.”
그는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운단풍이 없다면 몰라도, 아직 영가에 버젓이 머물고 있는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