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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시터는 그만 죽고 싶다 4권
지은이 : 정훤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정훤, 2025
※ ISBN : 979-11-7408-642-6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11월 3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26. 충직한 개
저택 안쪽의 응접실. 협회장 무리를 따라 커다란 미닫이문을 넘어 마주한 사람은 이미 내가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새까만 머리에 탄탄한 장신, 그리고 하얀 셔츠를 걸친 깔끔한 외모.
지금보다 좀 더 앳되어 보이는 로메로는 웬 종이접기를 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나?”
“협회장님?”
종이를 내려놓은 로메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보니 좀 더 나이를 짐작하기 수월했다.
지금은 로메로가 아마 스물, 그 언저리인 시절이었다.
“협회장님이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협회장님도 잘 지냈나요?”
“나야 네 덕에 잘 지내고 있지. 들리는 바로 항상 열심히 단련 중이라는데, 정말 자랑스럽구나.”
“하는 일이라곤 단련뿐인데요, 뭐.”
어깨를 으쓱인 로메로가 탁자 위에 놓인 어설프게 접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만지작거리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걸? 내게 말해 보겠니?”
로메로를 주시하던 협회장이 짐짓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냥히 물었다. 그의 본모습을 아는 내게는 한없이 가식적인 얼굴이었다.
“나도 이제 이 저택에서 나가 보고 싶은데 다들 안 된다고만 해요. 나는 세상을 구할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협회장님이 말 좀 해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로메로의 눈매가 아래로 축 휘어 내렸다.
스무 살. 하나의 인간이 갇혀 있기엔 이미 그른 나이였다. 아무리 실험체라고 해도 성장하는 머리를 제어할 순 없는 법.
이 시기의 로메로는 슬슬 자신의 처지에 의문을 갖기 시작해 보였다.
“하하! 그래, 그래. 이제 우리 41도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지.”
기운 빠진 얼굴을 하는 로메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협회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연구원 1.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 예. 그렇죠. 때가 되긴 했습니다.”
‘……저 연구원의 이름이 연구원 1?’
상당히 깨는 이름에 순간 귀를 의심했으나, 이내 이해가 되었다.
로메로를 41이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죄다 네드봉고처럼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애가 자신의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 아마 연구원 2와 연구원 3 같은 이름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41이 완전히 힘을 제어하진 못하니 당장 저택을 나가는 건 좀…….”
“연구원 1!”
뒤이어 연구원 1이 조금 비관적인 말을 덧붙이는 순간, 로메로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찰나 응접실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로메로가 이를 악물고 연구원 1을 노려보았다.
르블랑과 협회장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와중 연구원 1이 찔끔하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허허허. 41, 어른 앞에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쓰나. 그러면 안 된다고 배웠을 텐데?”
“그치만 지금 연구원 1이……!”
“41. 잘못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 그게, 죄송해요…….”
확실히 로메로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들쑥날쑥한 감정 기복이며, 말투도 그렇고.
하기야 그 꼬마 때부터 겨우 저택 부지에 갇혀 실험체로 살아온 것 같은데 멀쩡하면 그것도 이상하지. 옆에서 아무리 잘해 준다고 해도 결핍은 당연했다.
솔직히 말해서, 잘해 준 것도 아닌 것 같고.
‘무슨 모형 정원 보는 기분이네.’
로메로가 종종 보였던 멍청한 얼굴과 흉흉했던 기세를 생각하니 왠지 모를 착잡함이 밀려들었다.
원래도 전혀 평화로운 세계관은 아니었지만, 주인공도 이 모양이니 한층 더 피폐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41. 내가 항상 말했던 것 기억하나?”
협회장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로메로에게 질문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동그래지며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대답했다.
“저는 선택받았다는 거 말인가요?”
“그렇지. 너는 선택받았어. 이 세상을 구원할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말이야.”
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한다니.
어린애를 데려다가 실험체를 써먹고 있으면서 입에 침 한 번 안 바른다.
‘저런 게 먹히는 게 더 어이가 없네.’
그에 눈만 깜박이고 있는 로메로를 보자 속이 다 터졌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사이비도 누가 그런 걸 믿냐 손가락질해도 믿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많아.
로메로는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보여 주는 세상만 보고, 들려주는 이야기만 듣고 살았을 텐데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긴 힘들 터였다.
그걸 생각하면 로메로가 여태 협회가 둘러놓은 울타리 안에서 고분고분 살아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
다만, 인간의 성장은 생각의 폭이 넓어짐을 의미했다.
어른의 나이에 이른 그녀는 슬슬 바깥에 대한 궁금증과 현재 상태에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가 이미 지나고도 남았다.
“이쪽은 르블랑. 이미 인사도 끝냈을 거야. 오늘 자네의 마지막 훈련을 함께해 줄, 내가 특별히 모신 아스타바의 랭커지.”
“……마지막이요?”
“그래. 마지막.”
협회장이 르블랑을 소개하자 로메로의 눈이 잔뜩 커졌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이제 여기서 나간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럼 우린 먼저 훈련 장소로 가 있자고.”
연구원 1이 로메로에게 손짓하자 그녀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협회장과 르블랑을 번갈아 보았다. 협회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로메로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연구원 1보다도 먼저 응접실을 박차고 나갔다.
“내가 정말 밖으로 나간다고요?”
“그렇대도. 거참! 좀 천천히 가!”
로메로를 따르는 연구원 1의 다급한 몸짓을 보며 문이 닫히기 전 따라가야 하나 갈등하던 차였다. 뒤편에서 르블랑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던 그대로 주입할 겁니다. 더 추가할 거 있습니까?”
“복잡하게 하면 뒤틀릴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상할 수 없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럼 더 없다는 거죠?”
“실험체였던 기억 확실히 지우는 거 잊지 말고.”
협회장이 씁씁 입소리를 내며 표정을 싹 바꾸었다. 조금 전 가면보다 훨씬 안정적인 얼굴이었다.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같이 들어갈 겁니까?”
“얼마나 걸리지? 겨우 몇 마디 머릿속에 집어넣는 거면서 이렇게 번거로운 의식 장소까지 필요하다니. 원래 그냥 눈만 마주치면 되는 거 아니었나?”
“참 나. 저런 괴물을 데려다 놓고 정신 조종을 부탁했으면서 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르블랑이 협회장을 향해 노골적인 짜증을 쏘아냈다.
그나저나 정신 조종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랭킹이나 제대로 올려 주는 거 잊지 마십쇼.”
“걱정하지 말게. 난 약속은 꼭 지키니까.”
협회장의 말에 르블랑은 사납게 발밑을 한 번 걷어차더니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바로 지금이 여길 나갈 타이밍이었다.
문이 닫히기 전 나는 곧바로 르블랑의 뒤를 따랐다. 입안이 바싹 말라 갔다.
***
“하아…….”
어두운 방 한가운데, 로메로는 무겁게 숨을 몰아쉬며 뻣뻣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장을 억죄는 느낌.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감각이었다.
고통이란 걸 경험한 지가 언제인지도 어렴풋했다. 저택에는 더 이상 자신에게 상처를 낼 수 있는 것 따위가 없었다.
로메로는 어느 순간부터 연구원들이 그렇게 좋은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게 열여섯 살 무렵이었나.
마물들이 나타나면 도와 달라고 하던 그들은 언젠가부턴 틈만 나면 제게 칼이나 망치를 들이밀었다.
나중엔 총을 쏘아댔다. 탄환은 몸에 흠집을 낼 때까지 커졌고, 어느 날엔 그 어떤 탄환도 더 이상 몸에 박히지 않았다.
언젠가는 마물을 때려잡고 쉬고 있을 때 처음 보는 사람들을 데려와 난데없이 공격하기도 했다.
로메로는 이 모든 게 세상을 구하기 위한 훈련을 위해서라는 건 이해했지만, 동시에 연구원들이 착하지 않다는 것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르블랑의 눈을 본 후로 머릿속은 마치 뜨거운 철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물방울처럼 뒤엉켰다. 로메로 자신도 그 원인이 눈앞의 남자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이건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게 아니라, 마치 영혼을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영혼이라는 건 책에서나 몇 줄 읽어 봤기에 무엇인진 잘 모르겠으나, 그렇게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
“반항하지 마. 그냥 편하게 있으면 돼.”
르블랑의 뒤에서 피어오르는 기이한 오라는 마치 밤하늘의 오로라가 뒤틀린 것처럼 일렁였다.
검붉은색과 푸른 빛이 교차하며 그를 뒤덮었고, 그 빛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
집요하게 로메로를 바라보는 르블랑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그 안에서는 거대한 나선이 서서히 회전하는 듯한 환영이 보이는 듯도 했다. 마치 카멜레온 같기도 했다.
“너는 세상을 위해 나타났어.”
르블랑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울림은 방 안의 모든 것을 휘감고 있었다. 그 말이 단순히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깊은 곳에 직접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정의는 선택이 아니야. 네게 주어진 의무지.”
르블랑이 말을 이을 때마다 로메로의 머릿속은 떠오르는 지난 기억들이 잔물결처럼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은 잊어라. 너는 원래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강력한 힘을 각성하면서 세상에 나타났지.”
기묘한 오라가 이제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로메로를 감싸안았다.
“착한 사람들을 지켜야 해. 협회를 도와 세상을 지켜라. 협회는 너를 돕는 든든한 아군이니까.”
르블랑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단순한 말이 아닌 무거운 진리처럼 느껴졌다.
로메로는 내면에 뭔가가 깨지고, 갈라지고, 그게 다시 틀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긋나긋한 위안처럼 시작했지만, 곧 차갑고 날카롭게 변하며 본능을 짓밟았다.
로메로는 눈을 감고 고통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머릿속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르블랑은 더 이상 입을 움직이지 않는데도, 그의 말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녀의 고개가 툭 떨궈졌다.
“정의를 위해서 살아라. 협회의 뜻이 곧 너의 뜻인 걸 잊지 마.”
르블랑이 마지막으로 손을 내젓자, 로메로가 번쩍 눈을 크게 떴다.
불타는 도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손이 빛으로 물들어 모든 것을 구원하는 모습.
그 모든 게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로메로는 무엇이 자신의 기억인지 환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부유하던 르블랑의 검푸른 오라 로메로의 주변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방 안에 맴돌던 소리는 사라지고, 고요함 속에서 르블랑의 목소리만 남았다.
“오직 정의만이 너의 존재 목적. 협회의 뜻이 곧 너의 뜻이다.”
로메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로메로의 입술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울림은 분명했다.
“오직, 정의를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