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주 카리스 10권
대군주 카리스 10권
대군주 카리스
10
소락
대군주 카리스 10권
차례
Chapter 01. 다시 움직이는 카라쿰마 - 2
Chapter 02. 고삐가 풀리다
Chapter 03. 상단주의 정체
Chapter 04. 관문 공략
Chapter 05. 제국의 참전
Chapter 06. 사국 격돌
Chapter 07. 그릇의 차이
Chapter 08. 불타는 왕성
Chapter 09. 명분을 주다
Chapter 10. 경쟁과 견제
Chapter 11. 황제의 부름
Chapter 12. 황도 입성 - 1
대군주 카리스 10권
Chapter 01. 다시 움직이는 카라쿰마 - 2
요새에 물이 차자 제대로 휴식을 취할 공간부터 사라졌다. 그러자 당연히 병사들은 지쳐갔고 사기까지 바닥을 쳤다.
강물이 일정량 이상 차오른 건 아니었다. 브리스톤 자작이 지휘관으로 있을 때부터 틈틈이 배수로 공사를 해두었던 게 효과를 발휘했다.
그럼에도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본 병사들은 심하게 동요했다. 오크들이 요새를 포위하고 있으니 흔들릴 수밖에. 이럴 때일수록 요새 사령관인 반탈로스 자작의 언행이 중요했지만, 그는 병사들의 처우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더 걱정인 사내였다.
오크들이 요새에 개미떼처럼 들러붙자 병사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성문을 막아! 아티팩트를 모조리 쏟아부어서라도 막아라!”
반탈로스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나마 요새 측에 다행인 것은 요새 안에 물이 고이는 바람에 주변까지 물에 흠뻑 젖었다는 거다. 당장 성문 앞만 해도 완전히 진창으로 변해 오크들의 발이 푹푹 빠지고 있었다.
뿌우우~, 뿌우우~.
뿔나팔 소리가 울리자 오크들이 요새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공으로 인해 오히려 요새 공격에 지장이 있을 줄은 몰랐군.”
카리스의 말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애초에 카리스가 이렇게 빨리 공격을 명령할 줄은 몰랐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요새 안을 고사시킬 작정이었던 미하일이었다. 그러나 카리스의 명령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 또한 카리프에서 지원이 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나바리엘 요새는 최대한 빨리 함락시키는 게 카라쿰마로서는 유리했다. 게다가 시간을 끌수록 카리스에게 불만을 품은 오크가 늘어날 위험이 있었다.
“어쩌실 겁니까? 확실히 요새 주변이 완전히 진창으로 변해 움직임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에겐 다리가 있다.”
“네?”
“강을 건너기 위해 베어둔 나무를 가져와라. 그 나무가 요새로 가는 길이 되어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양측 병력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후방에서 반듯하게 깎아두었던 널빤지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앞으로 던져라.”
카리스의 명령에 오크들은 널빤지를 힘차게 던졌다. 확실히 널빤지들이 진흙탕에 철썩 소리와 함께 떨어졌지만, 땅에 가라앉지는 않았다. 최소한 진흙이 오크들의 발목을 잡아챌 일은 없을 듯했다.
“저, 저!”
반탈로스 자작은 오크들의 기행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널빤지를 치울 방도가 없었다.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요새 벽 주변의 널빤지야 날려버릴 수 있겠지만, 고작 널빤지 몇 장 날리자고 귀중한 아티팩트를 소모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반탈로스 자작이 당황해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못하자 병사들의 동요는 점점 심해졌다.
오크들이 물러나기에 다시 한 번 적을 물리쳤다는 성취감도 잠시뿐. 오히려 더 거센 공격을 받아야 한다는 절망이 요새에 스멀스멀 침투하고 있었다.
두웅! 두웅! 둥!둥!둥!둥!둥!
커다란 북을 맨 오크들이 요새 앞에서 북을 때리기 시작했다. 초전에 나섰던 오크들은 아예 뒤에서 편안히 쉬고만 있었다. 그만큼 병력에 여유가 있는 카라쿰마다.
하지만 나바리엘 요새의 병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야습에서 병력을 잃은 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널빤지를 밟고 달리는 오크들을 향해 화살을 날려 보냈지만, 어딘가 힘이 빠진 모양새. 점점 투지를 상실하는 카리프 병사들과 그간 억눌러 왔던 불만을 활활 태워 투지로 치환하는 오크들의 차이는 컸다.
“잘난 척 좀 하려다 아직까지 애병이 성문에 박혀 있어 민망하시겠습니다?”
미하일은 팔짱을 낀 채 오크들의 돌격을 바라보는 카리스를 보며 입을 놀렸다. 그러자 카리스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오크의 강함은 무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난 무기를 가리지도 않지.”
팔짱을 푼 카리스는 요새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미하일이 황급히 뒤를 따랐지만, 둘의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나중에는 미하일이 이를 악물고 달려봤지만, 카리스의 신형은 쭉쭉 늘어나며 급격히 요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카리스가 긴 울음을 토해냈다. 그의 울음은 처연했으며 뜨거운 무엇인가를 품고 있었다.
감정 전이!
주변의 오크들 또한 입에서 긴 울음이 절로 나왔다. 요새를 공략하다 먼저 죽음의 강을 건넌 형제들을 향한 애틋함. 용감히 싸웠으니 신의 곁으로 갔을 거라며 애써 달랬던 슬픔이 다시금 오크들의 눈을 벌게지게 했다.
“나는 카라쿰이지 신이 아니다!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실수로 잘못된 길을 갔을 때, 형제들이여 나를 바른길로 인도해다오!”
빗발치는 화살 빗속에서 카리스는 형제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땅에 떨어진 주인 잃은 창을 주워들었다.
“오늘만큼은 먼저 간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용맹을 뽐내자! 형제들을 위하여!”
오늘만큼은 분노의 힘을 오크들에게 전달하지 않는 카리스다. 순수하게 죽은 오크들의 넋을 기리고 싶은 마음. 오크들은 분노가 아닌 자신의 힘을 완전히 드러냈다.
카리스는 요새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화려한 갑옷 차림의 사내를 포착했다.
“흐아압!”
기합성과 함께 카리스의 손에서 창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공간을 접은 것처럼 요새 위에까지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사령관 각하를 보호해!”
커다란 방패를 든 기사들이 황급히 반탈로스 자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직!
“끄으윽.”
가장 선두에 섰던 기사의 입에서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검붉은 피가 주룩 딸려 나왔다.
카리스가 던진 창은 방패를 뚫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사의 몸에 박혔다. 그것도 뒤를 방패로 받친 기사들까지 힘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쿵쿵 소리를 내며 몇 걸음이나 물러나게 만들었다.
반탈로스는 질린 기색으로 카리스를 노려보았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서로의 시선이 격렬히 허공에서 얽혔다.
“모두 결사 항전하라! 나바리엘 요새는 오크 따위에게 무너질 곳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카리프의 병사들이여! 우리가 무너지면 카리프가 위험하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반탈로스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노린 카리스의 창에 두려움을 느낀 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더욱 목청을 높여야 했다.
사기가 바닥을 쳤다고 하나 나바리엘 요새의 병사들 또한 강병이다. 자신들이 무너지면 카리프 중부가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브리스톤 자작이 떠났다고는 하나 그가 직접 훈련시킨 병사들이다. 그들은 다시금 투혼을 불살랐다.
전투는 해가 지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지친 오크들은 후방으로 물러나라고 사전에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저 스스로 등을 돌리는 오크는 없었다. 체력이 소진되었어도 어떻게든 요새가 함락되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일념이 그들을 물러나지 않게 했다.
그러나 모두가 흥분한 전쟁터에서 미하일은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다.
“퇴각 신호를 보내고 지금까지 휴식을 취했던 오크들을 내보내라.”
이미 총지휘는 미하일이 하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오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잠시 후 뿔나팔과 북이 다시 한 번 전장을 달궜다.
그러나 요새로 달리는 오크는 있어도 후퇴하는 오크는 보이지 않았다.
“이 무식한 놈들아! 퇴각하라고! 빌어먹을 오크 놈들은 도무지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아? 이럴 거면 왜 군대를 조직하느냐고! 너희가 군대냐!”
미하일의 화가 폭발했다. 그러나 주변의 오크들마저 시큰둥하게 발광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만 할 뿐. 눈치를 보는 오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고래고래 악을 쓰다 지친 미하일은 체념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성벽에 걸친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익숙한 오크를 보고 다시 게거품을 물어야 했다.
“저 미친 오크가!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야? 천둥 화살 부족 오크들을 따로 모아! 빨리! 서둘러라! 카라쿰이 위험하다!”
지금껏 미하일이 내렸던 명령 중 가장 빨리 실행되었다. 카라쿰이 위험하다는 말이 제대로 먹힌 것.
여기저기서 요새를 향해 활을 날리던 오크들은 억지로 끌려와 어리둥절했다.
“카라쿰이 요새 성벽을 기어오른다. 주변을 엄호해! 특히 아티팩트를 쓸만한 놈들을 노려!”
“우리가 아티팩트를 쓰는 인간을 어떻게 가리나?”
오크 하나의 물음에 미하일은 인상을 팍 썼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지시였다.
“좋은 갑옷을 입은 놈들을 노려라. 그들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
나바리엘 요새가 한 번도 보급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지휘관이 새로 부임해오며 분명 아티팩트를 가지고 왔을 터. 그리고 아직 병사들과 충분한 교감을 나눌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친 미하일이다. 그래서 기사들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알았다.”
꼭지를 맡은 오크가 다른 오크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요새를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미하일도 점점 앞으로 다가서며 지휘를 하다 보니 이미 요새에서 날리는 화살의 사거리에 들어온 지 오래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행동. 그러나 미하일은 오크들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안전한 곳에서 입만 나불거리는 인간의 말은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고? 좋다. 나도 위험에 몸을 던졌다. 언젠간 너희도 내 말 한마디에 죽음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오크들이여.’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미하일은 카리스의 등을 노려보았다.
요새를 노리는 공성 병기는 카리프가 발동시키는 아티팩트의 주요 목표물이었다. 그로 인해 요새에 닿기가 무섭게 산산이 터져나가야 했다.
오히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 벽을 넘는 오크들이 더 안전해 보일 정도. 요새의 병사들이 끈질기게 방어에 성공하자 카리스는 직접 사다리에 올랐다. 이미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칼이 들려 있었다.
요새 성문에도 충차와 오크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인도자를 가져올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다.
‘미하일 말대로 무게 좀 잡으려다 망신살이 뻗쳤군.’
카리스는 쓰게 웃으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과 돌덩이를 칼로 후려쳐 날려버렸다. 그의 다리가 사다리를 박찰 때마다 몸은 위로 빠르게 솟구쳤다.
몇 번 그러고 나자 이미 요새 위에 몸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내가 으뜸이다! 형제들이여! 아래에서 무엇을 하느라 그리 꾸물대는 거냐?!”
카리스는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크들을 독려했다.
카라쿰! 카라쿰! 카라쿰!
오크들은 카라쿰을 연호하며 더더욱 열을 올렸다. 으뜸이라는 소리가 피곤함마저 잊게 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카리스를 죽이려고 몰려들었지만, 오히려 카리스의 칼에 피를 뿌려야 했다.
* * *
“사령관님! 오크들이 성벽을 올라왔습니다.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가신 하나의 외침에 반탈로스 자작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보기엔 그리 많은 오크가 성벽을 넘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흘러도 성벽 위에 녹색 괴물들로 가득할 상황임은 분명했다.
“레미놀! 네가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을 사수하라.”
“목숨으로 성벽을 지키겠습니다.”
레미놀은 군례를 올리자마자 성벽 위에서 죽음을 뿌리는 오크를 향해 달렸다. 그의 곁에는 몇몇 기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탈로스는 오크들을 향하는 게 아닌 물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곁에는 가신들만이 뒤따랐다.
“어디로 가면 되는가?”
“절 따라오십시오.”
브리스톤 자작이 배수로를 파두며 혹시 몰라 좁은 땅굴을 만들어 놓았다. 이미 그곳은 물이 가득 차올랐지만,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인간이라면 한 호흡만으로 요새 바깥으로 갈 수 있는 땅굴이다.
물이 넘실거리는 데다 온통 암흑인 굴로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지는 반탈로스 자작이다.
“혹시 굴이 중간에 무너지지는 않았을까?”
“전에 살펴보니 지지대로 받쳐둔 데다 강을 향해 나 있어 오크들의 눈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사령관 각하!”
가신의 재촉에 반탈로스는 어쩔 수 없이 몸에 입고 있던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물을 헤엄치자면 갑옷은 방해만 될 테니까.
반탈로스와 그의 가신들이 사라진 요새는 동이 틀 때까지 오크들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카리스가 몇 번이고 항복하라고 외쳤지만, 카리프 사내들은 의기를 보였다.
그 누구도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오크들을 죽이기 위해 무기를 휘둘렀다.
결국, 카리스는 적이지만, 훌륭한 상대였던 이들을 존중해 생포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이틀에 걸친 요새 공방전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그리고 요새 안에 카리프 군인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대군주 카리스 10권
Chapter 02. 고삐가 풀리다
반탈로스 자작과 그의 가신들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요새 근처에서 오크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주변이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이라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아 도망치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게다가 갑옷도 죄다 벗어 던지고 요새를 빠져나온 터라 감히 오크들을 뚫고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결국,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다.
카리스는 자신의 발밑에 꿇려 있는 반탈로스 자작과 그의 가신들을 경멸의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저들끼리만 살자고 도망간 비겁자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지. 죽이자.”
하비카의 말에 다른 오크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요새를 함락시키며 복수는 달성했다. 하지만 뒷맛이 개운한 건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명까지 저항하는 모습에 오크들은 나바리엘 요새를 지키던 인간들을 진정한 투사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투사들이 지켰던 요새를 함락시켰다는데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자부심을 저 비겁한 인간들이 더럽혔다고 생각했기에 오크들은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