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주 카리스 08권
대군주 카리스 08권
대군주 카리스
08
소락
대군주 카리스 08권
차례
Chapter 01. 세 마녀의 성 - 2
Chapter 02. 안정, 그리고 잠시의 평화
Chapter 03. 요동치는 트라키아
Chapter 04. 뿌린 대로 거둔다
Chapter 05. 전운이 감돌다
Chapter 06. 다시 시작되는 전쟁
Chapter 07. 적과 아군을 나누다
Chapter 08. 사절단
Chapter 09. 아! 바이할
Chapter 10.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 - 1
대군주 카리스 08권
Chapter 01. 세 마녀의 성 - 2
우우우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를 닮은 긴 포효가 성을 떨게 했다. 하나의 포효가 아닌 모두의 포효였다.
그러나 카라얀은 동족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무아지경으로 그저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간들을 벨 뿐.
추라이는 카라얀의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버티다 동족의 부름을 들을 수 있었다.
“카라얀! 카리스가 왔다! 형제들이 왔다고!”
성문 근처에는 무수히 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문을 닫으려 해도 시체에 걸려 쉽게 닫히지 않을 거다.
어찌 보면 카라얀은 제 임무를 달성한 거나 다름없었다.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카라얀의 분투에 인간들은 질린 기색이었다.
이미 추라이마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뒤에서 칼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 있는 상황. 그러나 기사들의 검이 지친 추라이를 비켜나가지는 않았다.
성문 앞은 오직 카라얀만이 남아 칼춤을 추고 있었다. 추라이는 그런 카라얀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체력이 고갈되어 더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카라얀 또한 썩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럽게 새로운 경지를 밟아 위세를 떨친 거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쩡! 쩡! 쩡!
카라얀은 자신의 칼이 막히자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칼의 속도를 가일층 높였다. 그러나 상대는 그의 칼을 일일이 쳐낸 뒤 바짝 붙은 뒤 주먹으로 명치를 툭 때렸다.
“수고했다. 이제 쉬어라.”
카리스는 주먹 한 방으로 카라얀을 기절시킨 뒤 고개를 돌렸다.
“성문을 활짝 열어라!”
카라쿰의 명령에 투사들이 성문을 붙잡고 힘을 썼다.
그그그긍.
개폐장치 따윈 필요 없다는 듯 투사들은 우격다짐으로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미 성안으로 들어오려던 기마대는 오크 투사들에게 짓밟혔다.
카리스는 서둘러 성안으로 달렸다.
‘한 명이라도 살아만 있어다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고 실망은 분노로 탈바꿈했다. 이는 형제들을 죽인 인간들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좀 더 서둘러 도착하지 못한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형제들이 자신들의 피를 흘려 성문을 열어주었다! 투사들이여. 형제들의 노고에 응할 시간이다!”
우오오오오!!!
카리스의 분노는 금세 주변 투사들에게 전염되었다. 성안으로 뛰어든 투사들은 분노의 힘을 터트리며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 * *
쉬페리온 자작과 티라 성 병사들은 끝까지 항전했다. 아티팩트를 아끼지 않고 사용하는 바람에 투사들의 피해가 커졌다. 그러나 성문이 열린 이상 그들의 최후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동이 틀 무렵 티라 성은 오크들의 손에 떨어졌다.
바실리 후작령은 발칵 뒤집혔다. 오크들의 분탕질로 인해 영지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파라 성과 루이네 성 또한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티라 성과의 연락이 끊김으로써 오크들이 왜 한밤중에 그리 난리를 쳤는지 알아챘다.
그러나 함부로 티라 성을 수복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일단은 오크들을 소탕하기 위해 밖으로 내보낸 병력을 죄다 불러들였다.
그리고 주변 영지와 수도에 사정을 알리고 지원군을 요청했다.
카리스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바실리 후작령 뿐만이 아니라 트라키아 왕국 전체가 충격에 잠겼다.
그러나 바실리 후작령 인근 영지에서 지원군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의 영지에서도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
분탕질만 치고 어찌나 잽싸게 도망치는지 영주들이 단체로 화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결국, 일 왕자 파에서는 재차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바실리 후작령이 무너지면 가뜩이나 궁핍한 재정이 더욱 쪼들릴까 봐 내린 급한 결정이었다.
이미 오크들은 파라 성을 둘러싸고 공성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루이네 성에서 몇 번이고 성문을 열고 지원군을 내보냈지만, 그때마다 하비카와 천둥 화살 부족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야 했다.
이래저래 수심만 깊어지는 바실리 후작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사건이 터지며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쾅! 쾅! 쾅! 챙그랑!
후작은 지팡이로 책상 위를 후려치다 위에 있는 것들까지 죄다 깨부수고 있었다.
“펠리오네가 미쳤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무도한 짓을 벌였단 말인가?!”
후작은 산발이 된 머리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늘 고고하고 오만한 모습으로 누구든 아래로 내려다보던 후작이라고는 믿기 힘든 추태에 가신들은 눈을 돌려야 했다.
주군의 흐트러진 모습을 감히 볼 수가 없었기 때문. 그러나 그들 또한 후작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삼 왕자 펠리오네가 수도 인근에 결집시켰던 용병들과 기사단을 수도로 불러들인 게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일 왕자 파에서 수도에 머물던 기사단들을 바실리 후작령으로 급파하자 이를 기회라고 여긴 삼 왕자 파는 빠르게 움직였다.
삼 왕자 파가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최근 오크들의 준동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생이 상인인 귀족들이 주축이 된 파벌이다. 그랬기에 오크들과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오크와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일 왕자 파 소속 귀족들의 힘이 강해진다. 그들은 전통 귀족들로 애초에 피로 가문을 일으킨 자들의 후손이다.
반대로 삼 왕자 파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가업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서부만 해도 이미 상행위 자체가 완전히 얼어붙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서부를 근거지로 둔 상단은 이미 큰 손해를 본 상황.
지금도 삼 왕자 궁에 하소연하려는 귀족들이 문턱이 닳도록 방문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실리 후작령이 위급하다는 급보가 전해온 뒤 일 왕자 파 휘하 기사단들이 수도를 떠나자 삼 왕자 파에서 검을 뽑은 것이다.
예상치 못한 급습에 일 왕자는 간신히 몸을 피해 수도를 떠나야 했다. 삼 왕자의 반란으로 인해 많은 귀족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나마 일 왕자인 아도니스가 살아 왕국 북부로 도망가는 바람에 파벌이 와해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바실리 후작에겐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자메나 평야를 구원하기 위한 기사단과 군대가 아도니스를 지키기 위해 방향을 틀었기 때문.
덕분에 바실리 후작 가문의 병력만으로 오크들을 상대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 * *
카리스는 트라키아 왕국이 뒤집어졌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처음으로 총동원령까지 내려 이곳 자메나 평야에 오크들을 불러들였다.
라인페르 요새와 점령지에 최소한의 오크만 남기고 오크들은 자메나 평야로 몰려들고 있었다.
파라 성을 포위만 한 채 지켜만 보고 있는 카리스는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성을 공략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만약 삼 왕자 파의 반란 소식을 알았더라면 조금은 여유 있게 성을 공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식에 늦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자메나 평야는 오크들의 녹색 물결로 가득 메워졌다.
카리스는 자신이 총동원령을 내린 결과를 보고 아연실색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했길래 부족이 통째로 움직인 거야?”
카리스의 얼빠진 표정에 발타는 피식 웃었다.
“네가 종족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우즈하크까지 끌고 족장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허~.”
카리스는 골치가 지끈거렸다. 오크들이 자메나 평원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바람에 추수를 앞두고 있던 농작물은 당연히 엉망이 됐다.
게다가 저 많은 오크를 먹일 식량도 문제였다.
“식량은?”
“내가 그 정도 생각도 없이 저 많은 부족을 움직였을 것 같아? 다들 자기가 먹을 건 알아서 챙겼다. 그렇게 인상 쓸 것 없어. 어차피 한 번 정도는 이리해야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발타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부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싸워야 한다고.”
“저들은 하나의 부족이 아니야.”
“그래. 하나의 부족은 아니지. 하지만 하나의 동족이자, 단 하나의 카라쿰인 너를 따르는 이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들은 너와 함께 싸운 경험이 없어. 오직 귀로만 너와 용맹스러운 투사들의 활약을 듣고 감탄하기만 했다. 카리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지금껏 싸워왔는지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건 옳지 않다.”
“옳지 않다고? 나는 저들이 피를 흘리는 걸 원치 않는다. 피를 흘리는 건 나와 투사들이면 족해. 아니 투사들조차 피 흘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너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룰 순 없어! 너 혼자 피를 흘려 모두를 배부르게 한다고 누가 고마워한다더냐? 잘 들어라, 카리스. 너는 카라쿰이지 저들의 부모가 아니야. 그리고 저들은 부모가 필요한 어린아이도 아니지. 저들은 오크다! 투쟁하는 오크! 저들에게 투쟁할 기회를 네 마음대로 앗아가는 게 옳다고 생각하느냐?”
두 형제의 언성은 커질 대로 커져 주변까지 들썩이게 했다.
“발타.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저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아니. 이미 준비가 됐다. 모두가 너와 함께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너를 카라쿰으로 인정했기에 초원을 떠나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넌 우리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거냐? 언제까지 그렇게 너 혼자만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갈 거냐? 네가 제아무리 대단한 카라쿰이라 해도! 모든 오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열변을 토하는 발타 앞에서 카리스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발타의 감정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카리스는 내가 지킨다!”
곁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자샤크가 버럭 소릴 질렀다. 제아무리 발타라지만, 카리스를 난처하게 하면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그래. 카리스는 네가 지켜라, 자샤크.”
느닷없는 자샤크의 참견에 어이가 없어진 발타는 피식 웃어버렸다.
“봤어? 자샤크조차 너를 지키려 한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오크인 카라쿰을 지키겠다고 한다. 자샤크만 그럴 것 같으냐? 잘 봐라.”
발타는 몸을 돌려 거칠어진 언쟁 탓에 모여든 오크들을 보았다.
“형제들이여! 카라쿰이 우리를 지키고자 지금껏 피를 흘렸다! 투사들이 우리의 배를 불리고자 지금껏 목숨을 던졌다. 언제까지 형제들의 등 뒤에서 배를 불릴 테냐?!”
발타의 도발에 몰려든 오크들에게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넘실거렸다.
“성난 늑대 부족이여. 너희는 족장을 지킬 준비가 됐느냐?!”
우오오오오오!!!
성난 늑대 부족의 투사들은 무기를 들어 올리며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다른 오크들 또한 달아올랐다.
“형제들이여! 너희는 카라쿰을 지킬 준비가 됐느냐?”
우오오오오――――!!!
자메나 평야가 오크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카라쿰! 카라쿰! 카라쿰!
마치 광신도처럼 변한 오크들은 멈추지 않고 카라쿰을 연호했다.
“보았느냐? 이게 우리의 뜻이다, 카라쿰이여. 너는 앞서 걷는 자이지 홀로 걷는 자가 아니다. 지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걸터앉아 쉬어도 된다. 네가 쉴 때면 뒤따르는 우리가 너의 등을 받치겠다.”
카리스는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삼키기 위해 입을 앙다물어야 했다.
그랬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고 홀로 걷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저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을 마다치 않듯, 저들 또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러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있었다.
“……고맙다.”
“흥! 쓸데없이 걱정시키지 말란 말이다. 이 손 많이 가는 동생 놈아.”
발타의 말에 카리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 * *
후작은 감시 탑에 올라 성 아래를 살폈다.
“음…….”
성이 포위된 것도 한 달이 넘어간다. 처음에는 성을 포위한 오크들을 보며 해볼 만하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가슴에 큼지막한 바위가 얹힌 것처럼 답답함만 느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을 둘러싸고 있는 오크의 수가 이제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늘어만 갔다.
성을 방패 삼아 막아내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자신의 군대만으로 저 많은 오크를 도륙할 수는 없다. 게다가 언제까지 성에서 결사항전을 할 수는 없었다. 병사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고 이를 충당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바실리 후작은 몇 번이고 수도와 인근 영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이미 내전이 발발했기에 서부를 제외한 곳은 오크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서부 지역 영주의 경우는 아직도 자신들의 영지를 휘젓고 다니는 오크들을 퇴치하지 못해 앓는 소리를 하기 바빴다.
“허허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것처럼 굴던 이들이 이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먼.”
허탈하게 웃던 바실리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껏 이런 홀대를 받아본 적이 없던 후작이었기에 현재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말만 하면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오크는 애초에 말조차 통하지 않는 짐승 아니던가? 후작은 나지막이 신음하며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이 위기만 벗어나면 이 굴욕과 망신을 어찌 풀어야 하나 고민하며.
“후작 각하. 저 무도한 오크들을 물리치고 나면 전보다 더 큰 위세를 얻게 되실 겁니다.”
마티유 자작은 조심스럽게 후작을 위로했다. 그러나 정작 마티유 자신도 당장 들판을 까맣게 메운 오크들을 몰아낼 방도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저 창고에 가득한 식량을 무기로 버티고 버텨 오크들이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크들이 성을 포위만 했을 뿐 별다른 공격은 아직 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물론 공격을 했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긴 했다.
이미 후작 측에서는 수성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태다. 게다가 세 마녀의 성 중 유일하게 해자가 성을 두르고 있어 적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