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내공을 포식하다 03권
천년 내공을 포식하다 03권
천년 내공을 포식하다
03
우진하
천년 내공을 포식하다 03권
차례
제13장. 명분 - 2
제14장. 결자해지(結者解之)
제15장. 혼돈에서 꽃 피우는
제16장. 침을 뱉으면 똥물로
제17장. 진실과 거짓 사이
제18장. 바늘구멍 찾기
제19장. 자격을 증명하라 - 1
천년 내공을 포식하다 03권
제13장. 명분 - 2
도와달라.
당문강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할 수밖에 없는 청을 했다.
“어째서 내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법이고, 아무리 먼저 잘못을 저질렀어도 당문강과 당문혜 남매를 고립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다.
그런데 이제 와 자존심과 분노를 모두 내려놓고 내게 부탁한다?
무당에서 지내며 마음의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검성 어르신의 마지막 순간, 그대의 불가사의한 힘을 보았소.”
“불가사의한 힘이라.”
“그건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소. 마지막 순간, 그대가 쏘아낸 기공이 한순간 수십 다발로 쪼개졌고, 당문의 무인들을 도륙했었소.”
그때를 회상하듯 당문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무공은… 마치, 만천화우와도 같았소.”
“만천화우?”
“당문의 암기술에서 전설로 여겨지는 최후의 비기를 말함이오. 하늘을 가득 채우는 암기의 향연…. 그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지요.”
솔직히 말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백 노인을 살리기 위한 간절함만이 정신을 가득 채웠으니까.
“그날 나는 내가 본 것을 부정하려 했소. 그대의 수준 낮은 경공이나,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의 어리숙함이나. 도저히 상응하지 않는 괴리 속에서 애써 내가 본 것을 잊으려 했소.”
“그런데?”
당문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청수 도인을 일별했다.
“염왕궁주를 죽인 이, 그대가 맞소?”
“…….”
슬쩍 청수 도인을 보니, 눈빛에 아주 강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빨리 답을 듣고 싶다는 듯.
뭐,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게 왜?”
“허어… 사부님의 예상대로였다니.”
검황은 진즉에 눈치를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내가 부리는 어검술의 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니까.
“처음에는 검황 어르신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소. 그런데 내 편협함을 버리자, 그대를 똑바로 볼 수 있었고,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소. 그러니, 부탁이오.”
이제는 아예 무릎을 꿇었다.
“어어? 이러지 말라고.”
괜스레 부담스럽게 왜 그러는 건데!
“제발, 제발 나를 도와주시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가문을 대적할 수 없소!”
아주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 게… 처연한 멋이 있다, 씨벌.
내가 질질 짜면 면상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텐데, 어찌 우는 것까지도 저렇게 분위기가 있을까.
크흠, 일단 도와달라니.
“그래, 도와주지.”
“지, 진심이오?”
“그럼, 못 할 게 뭐 있어.”
어차피 사천당문에 복수할 작정이었다.
당연히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이 녀석을 찾아가 세상에 사천당문의 극악무도한 행태를 알리라 으름장을 놓고 명분을 만들어 쳐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먼저 나서서 도와달라니, 일사천리다.
물론, 이걸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신, 너도 내게 도움을 하나 줘야겠어.”
나는 슬쩍 백서하를 일별했다.
‘거래’하면 또 백서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이 몸을 다 바쳐 돕도록 하겠소.”
“그래? 벗으라고 하면 벗을 거야?”
“예…?”
“크흠, 아니. 몸을 다 바친다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 멈춰, 이 새끼야.”
어딜 감히.
백서하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말이야.
그저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일 뿐이다.
진짜는 이거다.
“내가 꼭 얻어야 하는 사천당문의 독초가 있는데 말이야.”
“무엇이오?”
“학령초.”
순간, 당문강의 동공이 흔들렸다.
“왜? 안 돼?”
“끄응, 그건… 문중 회의를 통해야만 가능하오. 사천당문에서도 남은 학령초는 단 한 뿌리가 전부이니 말이오.”
“그럼, 할 수 없지.”
안 된다는데 어쩌겠는가.
“사천당문의 전각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뺏어가면 되지.”
간단한 문제다.
백의의선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곧장 떠올린 계획이기도 하고.
“그건 절대 불가하오!”
“내가 하겠다는데 뭔 상관이야.”
당문강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에게도 명분이 필요하지 않소?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천당문을 공격한다면, 무림 공적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오.”
“상관없어. 난 어차피 백도가 아닌걸?”
“그렇지 않소. 그대는 검성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들었소. 그대 한 몸의 안위는 지킬 수 있을지언정, 백씨 세가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요.”
“흐음, 글쎄다.”
물론, 알고 있다.
당연히 실행에 옮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다급한 당문강이 어떻게든 약조하게끔 유도하는 것뿐이다.
“최대한, 아니, 기필코 그대에게 학령초를 넘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소. 그러니 그런 미친 생각은 생각으로만 두시오.”
“약속하는 거지?”
“내 모든 것을 걸고 약조하리다.”
“못 하면, 거기라도 자르자.”
저렇게 생긴 것도 반칙인데, 고자쯤은 되어도 괜찮잖아.
“끄응….”
어쨌든 거래는 성사되었다.
세부적인 계획은 조율해야 하겠지만,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세상에 이를 알리는 것이다.
아니, 세상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단지, 믿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검황 무허 진인이 있다.
* * *
“이야, 뭔 산중 도관에 이렇게 사람이 많냐.”
백운봉에서 내려온 우리는 천주봉(天柱峰)을 올랐다. 이른바 무당팔궁(巫堂八宮)이 위치한 봉우리란다.
“이야,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을 놔두고 왜 검황 어르신은 그런 데서 산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도를 행함에 있어….”
“아아, 됐고.”
안빈낙도니 뭐니, 이율배반적이다.
그럼, 이 화려한 도관에 머무는 이들은 뭐 도를 모르는 사람인 건가.
“크흠, 혹여나 오해할까 말씀드리지만, 모든 무당의 도인들은 청렴하게 살아가오. 저 건물들은 외부의 도우들께서 간곡히 청하여 구축된 것이니….”
“에이, 날름 받아먹었으면 끝이지, 뭘.”
결사코 받지 않겠다 한 것도 아니고, 날름 받아놓고는.
그렇다고 비난하는 건 아니다.
거저 준다는 데 거절하는 게 더 이상하지.
어차피 주변 후원 없이는 돈벌이 수단 하나 없는 문파가 제대로 운영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대회는 언제 시작한답니까?”
오늘을 기점으로 사흘간 무림대회(武林大會)가 무당에서 열린단다.
각 문파의 대표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고, 각종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검황 무허 진인이 이 시점에 나를 초대한 이유기도 하다.
“대사형!!”
그때, 살짝 낯이 익은 한 도인이 밝은 얼굴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청연아, 손님들 앞에서 어찌 그리 촐싹대느냐. 정신 수양을 더 깊이….”
청수 도인의 잔소리가 시작되든 말든, 도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오오, 화진 공자가 아니십니까!”
“아, 예….”
내 손을 덥썩 잡더니.
“너무, 너~어무 반갑습니다. 저는 무당에서 도를 닦고 있는 청연이라 합니다. 지난번 용봉회 때 봤는데, 어우…!”
그러면서 엄지를 내미는데, 내가 알고 있는 상식선의 도사와는 아주 딴판이다.
“청연아, 제발 좀…!”
역시나, 듣지 않는다.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그때 화진 공자의 그 투박하다 못해 경박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변칙적 공격…, 크아… 시정잡배인지, 무인인지, 감탄이 절로 나오더구려!”
“…….”
이건 칭찬이야, 욕이야?
“제가 완전히 감명받아서 홀로 무공을 연구하였는데, 어찌,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청연! 이 녀석, 안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