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당문 0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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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당문
05
독딥륙
천하당문 05권
차례
제21장.
제22장.
제23장.
제24장.
제25장.
천하당문 05권
제21장.
제갈선이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럼 제갈 세가에서 하는 건 뭐 말이 됐게요?”
따지자면 제갈 세가에서 한 일이 더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섬서와 사천을 이을 수 있도록 새로운 기물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치만 이건 뭐 전에 없던 새로운 걸 만들자는 게 아니잖아?’
당연오가 제갈선의 어깨를 마구 주물렀다.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제갈 형은 너무 생각이 많아요. 당장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냥 좀 너무 아니다 싶으면 말해줘요.”
“이건 아닙니다.”
“지금 말고요.”
냅다 말한 제갈선을 저지한 당연오가 고운을 봤다.
“들어가죠?”
당연오의 말에 고운이 한 발짝 나섰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 두자면, 임가는 지금 어머니가 꽉 잡고 계셔. 사실상 실질적인 가주지.”
제갈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주 부인이시지요. 강소성의 주가 출신입니다. 원래의 임가도 기세가 좋은 가문이었는데, 선대에서 혼인으로 주가와 맺어지면서 섬서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가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가는 그 강소성에서도 부호로 유명한 가문입니다. 키우는 강아지 그릇도 황금으로 만든다는 곳이죠.”
‘난 부자들 보면 이유 없이 화나더라….’
당연오가 은은한 얼굴로 고운을 한 번 쳐다봤다가, 무언가에 질린 제갈선을 봤다.
‘이 양반은 왜 이래.’
당연오의 시선을 눈치챈 제갈선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주 부인을 뵈러 오는 길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겁니다.”
“대체 왜요?”
당연오가 어리둥절하게 말하자 제갈선이 사뭇 결심을 마친 표정으로 비장하게 답했다.
“무엇이든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되겠죠.”
“아니, 그냥 말로 해달라고.”
제갈선과 당연오의 이야기를 듣던 고운이 손을 휘저었다.
“아선은 이상하게 어머니를 무서워하더라. 엄살이 심해서 그래.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자고!”
말릴 새도 없이 고운이 문을 두드렸다. 당연오 또한 어깨를 으쓱이고 바로 섰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안다고…. 고운이 이렇게 사람이 좋은데 뭐 별일 있겠어?’
이내 웅장한 대문이 열렸다. 늙었으나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여인이 고운을 보고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아이고, 호연 공자님!”
“총관! 내가 집에서 나온 지가 언제인데.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운 또한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 채 총관을 한 번 끌어안고 놓아주었다.
“오랜만이야. 지난 춘절 이후로 처음인가?”
“아무렴요. 그렇지 않아도 주 부인께서 섭섭해하셨습니다. 무공을 배웠으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계기가 없으면 한 번을 찾아오지 않는다고요.”
“에이, 어머님이 그랬을 리가. 아준이 그랬나 보지?”
고운의 말에 총관이 들켰다는 듯 웃었다.
“소공자님에게 가끔 전서구라도 날려주세요. 항상 기다리십니다.”
“으음, 어머님이 안 좋아하실 텐데. 봐서. 어머님은?”
“만월당에 계십니다. 뵈러 가십니까?”
“그 전에 준비해야지. 내 친우들도 함께할 테니 살펴줘.”
고운이 제 뒤에 서 있는 제갈선과 당연오를 가리켰다. 임가에서 오래 일한 총관은 둘을 보고 매우 놀라거나 꺼리는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안내했다.
총관의 뒤를 따르며 당연오가 물었다.
“준비? 무슨 준비?”
“이 상태로는 주 부인을 못 뵙습니다. 깔끔한 성격이시라서요.”
‘이 상태가 뭔데?’
당연오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제갈선을 봤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제 어깨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당 소협한테서 이상한 냄새는 안 납니다. 약간 매캐한 향이 항상 나긴 하지만요.”
“그건 당문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와!”
제갈선과 대화하며 걸음을 옮기던 당연오가 안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와, 종남파는 그냥 맛보기였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뻗어 있는 기와의 기세가 대단했다. 바닥에 깔린 전돌은 척 보기에도 고가처럼 보였다. 시비들이 오와 열을 맞춰 무리 지어 다녔다. 총관이 잠시 양해를 구하고 멈춰서더니 시비들 중 대여섯을 불러 따르게 했다.
‘이 사람들은 왜 필요한 거지?’
늘어난 일행에 당연오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다시 웅장한 건물들을 구경했다. 밖에서 보기에도 규모가 커 보였지만, 실제로 안에 들어오니 더욱 장대했다.
“운 형, 집이 진짜 좋은데요? 형 그냥 여기서 건물 하나 별관으로 달라고 해서 살면 안 돼요? 힘들게 무학 배우지 말고요.”
“그래서 우리 부친이 그렇게 사시잖아.”
“…가주님 아니에요?”
“뭐, 그렇긴 한데. 대부분 일은 어머님이 처리하시지. 어머님이 아프실 때만 기본적인 업무를 보셔. 어머님은 항상 건강하시긴 한데.”
‘바지 가주네, 바지 가주야.’
흐음, 소리를 내며 걷고 있으니 제일 앞에서 일행을 인솔하던 총관이 멈춰 섰다.
“자, 그럼, 세 분 모두 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 왜 나눠야 하죠?”
“우선 목욕부터 하셔야 하니까요. 시비들이 시중을 들 겁니다.”
“예?”
당연오가 얼을 타는 사이 고운은 당연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제갈선 또한 당연오에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안쪽으로 순순히 걸어들어갔다.
“아니, 잠깐만! 이런 건 미리 말해줘야지. 운 형, 제갈 형!!!!!! 아, 밀지 마세요. 아!!!!! 전 그냥 혼자 씻을게요오오옥!!!”
당연오는 자신을 밀어대는 시비들에게 저항했다. 그러자 총관이 박수를 한 번 크게 쳤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주 부인이 경을 치십니다. 목욕 의복을 따로 드리니 부끄러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고는 총관 본인까지 당연오 구역에 합세했다.
“당문에서도 안 하는 거어어얼!!”
애처로운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당연오 또한 건물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렇게 장장 두 식경 뒤, 당연오는 간만에 상투관을 튼 채로 나타났다. 한 올의 곱슬 머리카락도 빠져나오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하도 꽉 묶어 관자놀이가 아팠다.
욕탕의 열기 탓에 양 뺨이 붉었다. 푸석푸석한 피부며 머리카락이며 온갖 기름을 발라댄 덕에 당연오치고는 꽤 봐줄 만한 몰골이 되었다.
원래 입고 있던 의복에 먼지가 너무 많이 묻었다는 연유로 새로운 녹색 옷까지 받아 입은 당연오가 기다리고 있던 제갈선과 고운에게 다가갔다.
제갈선과 고운 또한 각자 굉장히 깔끔해진 모습으로 당연오를 맞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습니까?”
“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힘들다 진짜….”
기가 다 빨린 표정으로 당연오가 북북이를 끌어안았다.
“북북이도 씻기려고 해서…. 독 나온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서 막았다고요. 결국 제 손에 솔을 들려주길래 제가 직접….”
“끼잉….”
“수모를 겪게 해 미안하다…. 주인이 힘이 없어서….”
당연오가 눈가를 찍어내는 시늉을 하며 반질반질해진 북북이의 등딱지를 살살 만졌다. 그 모습을 보던 제갈선이 조금 웃었다.
“역시 한 번 경험해 보는 게 백 번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확 와닿지요?”
“아니, 사람으로 빨래를 하는 곳이면 미리 말 좀 해달라고요. 저 진짜 빨래 당했다니까요?”
부끄러움이고 나발이고, 피부며 두피며 벗겨지도록 벅벅 닦이면 그런 최소한의 체면도 사라지는 법이다.
‘천임이가 하는 건 진짜 새 발의 피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선녀였구나.’
당연오가 팔 하나를 번쩍 들어 흔들었다. 광택이 도는 비단 소매가 야들야들하게 하느작거렸다.
“주 부인께서 강소성 분이라 그런가, 여기 원래 옷이 다 송금으로 만든 옷이에요?”
당문에서는 당금상회의 성공 이후에도 촉금으로 옷을 지어 입진 않았다. 사치보다는 실리의 가치에 대해 더 높게 쳐주는 분위기상,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 많았다.
‘천잠보의라면 몰라, 검을 막아주지도 않는 비단이 이쁘다고 옷을 지어 입어? 같은 느낌이었지.’
설령 지었다고 한들, 손님에게 내어주는 옷으로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건데, 아연. 왜 이렇게 뚱한 표정이야?”
“…옷이 너무 가볍고 살랑거려서 기분 나빠. 당문인들은 각 소매에 삼십 근씩 물건을 안 넣어두면 불안해하는 습성이 있어.”
“진짜?”
“구라지.”
고운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뒷마무리를 모두 마친 총관이 나왔다. 웃는 낯이긴 하였으나 여전히 뭔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세 명을 살핀 총관이 하늘에 떠 있는 해에 시선을 뒀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군요. 만월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벅벅 닦고 환의까지 했는데.’
괜히 총관의 심기를 건드려 더 한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당연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총관을 따라 또다시 한참을 걸어가니, 건물 중에서도 유독 으리으리한 자태를 뽐내는 건물이 보였다.
돌계단을 오른 총관이 건물 밖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주 부인, 고운 도장이 방문했습니다.”
안쪽에서는 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총관은 다시 한번 고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여라.”
안에서 흘러나온 허락에 일사불란하게 문이 열렸다. 고운과 제갈선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당연오 또한 얼결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따라갔다.
당의 중앙에는 매우 큰 원목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당 안에는 시비들도 여럿 있었는데, 숨 소리나 움직이며 옷감이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은은한 묵향과 함께, 원목 탁자 앞에 서 있는 여인이 붓으로 난을 치고 있었다. 안에 들어선 고운과 제갈선이 멈춰 섰다. 고개만 돌려 당연오를 본 제갈선이 자기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당연오도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난을 치던 여인의 붓이 획을 끝내고 종이에서 떨어졌다. 시간이 멈춘 듯 침묵하던 시비들이 그제야 일제히 제 일을 했다. 먹을 가는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당을 메웠다.
옆에 서 있던 시비에게 붓을 건넨 여인이 꼿꼿한 자세로 뒤를 돌았다. 여인을 마주한 당연오는 내심 감탄했다.
‘완전…. 암사자시네.’
순간 강호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개가 남달랐다. 고운의 모친, 주 부인이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출가외인이 춘절 외에 본가에 찾아올 일이 뭐가 있다는 거지?”
* * *
주 부인의 말에 고운이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해 보였다.
“어머님, 평안하셨는지요?”
주 부인이 의자에 앉자 총관이 개완을 건넸다. 개완 뚜껑을 열어 찻잎을 밀어낸 채 찻물을 마신 주 부인이 총관이 건네주는 천을 받아 입가를 닦았다.
“종남산에서 흘러드는 오수만 아니라면야 서안에서 내가 걱정할 일이 있겠느냐?”
대놓고 종남파를 질타함에도 고운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고운이 왜 성격이 좋은 줄 알겠다. 어머니가 이래서 웬만한 정도가 아니면 타격감이 안 들어오는 거였어.’
주 부인의 시선이 제갈선에게 닿았다.
“제갈 공자는 어찌 얼굴이 더 하얘졌소?”
비꼬는 투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친절하거나 예의 바른 투도 아니었다. 제갈선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겨울이라 그런가 봅니다. 주 부인. 격조했습니다. 주 부인께서는 더욱 우아해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