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당문 0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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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당문
02
독딥륙
천하당문 02권
차례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제10장.
천하당문 02권
제6장.
휘잉, 휘이잉, 캉!!!
당연오는 피할 수 있는 검식은 최대한 몸을 틀어 피했다. 도저히 피할 각이 나오지 않는 공격은 팔목을 들어 보호대로 막으며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장검과 만상귀일검법 특유의 검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검로에 어쩔 수 없이 당연오가 두세 발자국 밀려났다. 당연오의 기세가 죽자 일현이 단검을 들었다. 지금이라면 시험해볼만 했다.
일현의 단검이 마치 바람의 흐름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당연오의 어깨를 향해 내질러졌다.
급풍십삼자. 갑자기 부는 바람의 흐름을 열세 가지로 분류하여 그 모양을 딴 단검법답게 곡선적 움직임이 많은 투로였다.
일현은 최대한 아까 느꼈던 바람의 흐름을 되짚어보며 단검 끝자락에 온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반호와 겨루고 난 이후 청성파의 단검법을 다시 한번 익히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가!
“기본이야 알려줄 수 있지만, 그래봤자 너와 나는 다르다.”
당명이 당진과 담판을 벌이는 동안, 쌍수를 알려달라는 일현의 요청에 반호가 한 말이었다.
“네가 쓰는 장검의 사용법은 네 또래에 비해 나은 수준이지만, 단검은 어딘지 모르게 막힌 듯한 느낌이 들어.
꼬리가 잡혔나 싶어도 지레 혼자 뭔가에 놀라 물러나더군. 그렇게 물러나면 단검이 아닌 장검을 쓰는 것처럼 검로가 바뀐다. 뭘 신경 쓰는지는 몰라도 청성파의 단검법을 그대로 풀어내는 데에만 집중하면 어떻겠냐?”
단검을 빼 들고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일현을 답답하게 바라보던 반호가 덧붙였다.
“너에게 맞는 무공을 쓰라는 거다. 이 모지리 도장님아. 나는 팔괘문의 사람이었으니 따지자면 팔괘의 무리를 따르지. 팔괘는 하나를 둘로, 둘을 넷으로, 넷을 여덟으로 나누고 그것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성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 너도 청성파의 단검법을 배웠을 것 아니야? 그것에 맞춰 검을 써야지, 나 같은 사람에게 대뜸 배움을 청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답은 네가 찾아야지.”
물론, 급풍십삼자의 초식은 알고 있었으나 매번 청성파의 단검법보다는 살수 시절의 움직임이 손에 익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단검이 그에 따라 움직였었다. 그를 깨닫고 억지로 뻗어 나가던 투로를 바꾼 적이 여럿이니, 반호의 눈은 정확했다.
청성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뼈에 새기기 위해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수련했다. 그렇기에 이 대련에서 당연오에게 시험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련 시간이 짧았던 탓일까.
챙!!! 카칵!!
비교적 어설프게 파고드는 일현의 단검을 당연오가 움켜쥐었다.
‘어라? 예전에 잠깐 합 나눴을 때 단검이 이렇게까지 어설프진 않았는데?’
쌍성검이라는 별호를 듣고 납득했던 걸 떠올리며 당연오가 의아한 눈빛으로 일현을 봤다. 회심의 일격이었는지, 단검이 잡히자 일현의 눈빛이 살짝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칠성검을 크게 휘두르자 당연오 또한 단검을 놓고 멀리 물러나 거리를 유지했다. 일현은 무의식적으로 단검을 몇 번 털어냈다. 제 맘대로 안 움직여주는 손과 팔이 야속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연오는 제 두손을 맞대고 뻐근한 손가락을 풀어냈다. 찰그락, 찰그락. 끼이익. 날카로운 철끼리 맞부딪히며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검들을 다시 바투 쥐는 일현을 유심히 살피며 당연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 봐라? 먼저 일기토 걸어놓고 밑장을 빼네?’
챙! 캉!!!
다시 몇 번의 합이 오갔다. 철과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즈넉한 숲의 풍경을 헤집었다.
여러 합을 나누는 동안, 일현의 검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아무리 칠성검으로 우위를 점한다 한들 단검으로 공격만 하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장검의 공격 반경 때문에 초반에 밀리던 당연오는 몇 합 만에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당연오는 장검으로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가까이 파고들어 독벌처럼 손을 놀렸다.
쐐액!!!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슈슈슉! 슈슈슉!’
“윽…!!”
쇄도하는 당연오의 비철조를 가까스로 피하느라 단정히 늘어뜨려 놓았던 일현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기세가 당연오 쪽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공수의 박자가 어긋난 일현의 숨이 가빠졌다.
‘제길, 이렇게 끌려가기만 해서는 안 되는데…!’
악에 받친 일현이 이를 꽉 깨무는 순간, 비철조가 그의 이마를 꿰뚫으려는 듯 일직선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비철조의 장점이자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첫째도 빠르기, 둘째도 빠르기였다. 무거운 검을 든 것과 달리 빠르게 손을 움직일 수 있어 속도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였다.
일현은 그나마 비철조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단검을 들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검로를 신경 쓰는 바람에 또다시 한 박자가 느렸다.
‘늦었…!’
어떻게든 피하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고개라도 꺾으려는 순간, 비철조가 바로 앞에서 우뚝 멈췄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비철조의 끝을 보자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집중하세요~ 예?”
툴툴대듯 말한 당연오가 손을 거두고 뒤로 크게 도약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당연오가 입을 열었다.
“명 형에게 듣자 하니 용봉지회 때는 일현 도장이 팔 강까지 올랐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다 쏟아내겠다는 본인의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 영 자세가 안 나오는 거 알고 계시죠?”
일현이 흐트러진 호흡을 어떻게든 가다듬고자 숨을 몰아쉬었다. 툴툴대며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였지만 당연오 또한 나름대로 인내심을 보이며 일현이 답하길 기다렸다.
당연오의 불만도 이해가 갔다. 먼저 대련을 신청해놓고 형편없는 꼴이라니. 심지어 당연오는 방금 전 대련을 끝낼 기회도 무르고 자신을 위해 기다려 주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오랜만의 대련으로 인한 흥분감, 그리고 당연오를 향한 고마움에 살짝 상기된 얼굴로 일현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면목 없군. 더 힘내겠소.”
당연오가 손을 들어 내저었다. 당연오가 듣고 싶은 말은 불명확한 노력형 다짐이 아닌 정확한 해결방안이었다.
‘진짜 역지사지라더니, 당숙도 날 가르칠 때마다 이런 마음이었나? 뭐 잘못되어 보이는 게 있으면 훈수질을 멈출 수가 없네, 내 팔자야.’
제 타고난 성격을 탓하다가도 기가 조금 죽어 버린 일현을 본 당연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렇게 오지랖 부리는 것도 진짜 작작 해야 해. 내 앞가림부터 제대로 해야지. 지금도 독이 새어나갈까 봐 신경 바짝 곤두서 있는데. 하,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딱 이번만 도와준다.’
여타 청성파 도사들과는 다른 성정의 일현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당연오는 이왕 장단 맞추는 거, 기가 막힌 자진모리 장단을 쳐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용봉지회 때 썼던 걸 보여주세요. 그도 아니면 저랑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걸 보여주시든가.”
당연오의 요구에 일현의 어깨에 힘이 슬쩍 빠졌다.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었던 일현이 대답했다.
“전자나 후자 둘 다 동일한 무공이네만…… 부끄럽게도, 온전한 청성의 무공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들이오.”
“그럼 뭔데요?”
“…양친께 배운 것이오.”
‘그래, 살수 문파 시절에 배웠다는 뜻이군?’
대충 각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끄덕인 당연오가 이어 물었다.
“용케 용봉지회에서 청성파 무공이 아닌 걸 썼네요?”
“본도 또한 쓸 생각은 없었지만, 손에 익은 게 무심코 나와 버린 것이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이 청성의 무공이 아니라는 것은 청성파만 알았소만….”
“어떻게 그렇게 된 거죠?”
“청성파의 무공은…… 한 번에 알아보기 어렵소.”
‘애매하고 특성 없단 뜻이구만.’
눈을 굴리며 간신히 단어를 고른 일현의 말을 손쉽게 치환하며 당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오의 생각을 눈치챈 일현이 자신의 문파를 두둔하기 위해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청성파는 청성산에 있는 모든 것을 흡수했다고 볼 수 있소. 암기술, 부주법, 연단술… 무당이나 화산에서 하지 않는 것들을, 청성에선 한다오.”
‘그래, 그러니까 걔네보다 두 배는 더 말코 같다고.’
“그렇기 때문에, 정통 검법이 아니더라도 청성파가 쓰면 대충 청성파의 무공이라고 치부되는 경향이 조금 있소….”
‘한마디로 말하면 그냥 잡탕이라는 거네.’
일현이 말하는 족족 속으로 반박한 당연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양친이 가르쳐 준 거 말입니다. 왜 안 쓰려고 하는 거죠? 내가 봤을 땐 그걸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처, 청성의 무공이 아니라 살수의 무공인지라….”
“원래 있던 살수 문파는 어디 있는데요?”
“청성산에 있…소?”
“그럼 양친이 도장을 청성파에 입문시킨 것이 단순히 가까워서라고 생각합니까?”
“…….”
“살수의 운명은 주고 싶지 않았지만 도장에게 가르친 것은 어떻게든 도장이 잘 쓰길 바라서가 아닐까요? 저라면 쓸 겁니다. 도움이 된다면 당문의 무공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싸구려 무공이라도 배워서 언제든 구를 준비를 할 거예요.”
당연오는 백선우였을 때도 가리는 것이 없었다. 몸이 조금이라도 나을 가능성만 있다면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백선우는, 당연오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법이 있는데 왜 포기하지? 어떤 이들에게는 그 한 톨의 가능성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가능한 것은 모두 해봐야 한다.
해결법이 있다면 어렵거나 싫더라도 반드시 써야 한다.
당연오가 일현을 빤히 보았다.
“먼저 대련을 신청했다면 이것저것 간 볼 생각일랑 말고 죽을힘을 다해 일단 덤벼 보세요. 그게 예의 아닙니까.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안 쓰고 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만입니다?”
당연오가 펄럭이는 소매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당문 무공의 기본자세도 이제 퍽 익숙해졌다.
“자, 그럼 이제 정말 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당연오가 일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연오의 공격을 칠성검으로 막아낸 일현이 침음을 내뱉었다.
당연오의 말대로, 모든 것을 쏟아 대련해보자고 제안한 주제에 지리멸렬한 태도로 임하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성의 정통 무공이 아닌 것을 계속 쓸 수는 없지 않나!’
당연오의 말을 속으로 반박하며 그의 조격을 한 번 더 피한 일현은 문득 생각을 달리했다.
반호에게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일현은 청성의 무공에 집중하였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문제점을 생판 남이 지적하니 놀라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청성의 무공이란 무엇인가?
당연오에게 말했듯, 청성은 무당이나 화산과는 다르다. 뿌리는 같아도 애당초 갈래가 달랐다. 정신 수양에 중점을 두는 다른 문파에 비해 청성은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따르는 문파이므로 육체 수련, 즉 외공에 맹점을 둔다.
자연의 흐름을 본뜬 초식이 많지만 결국 기틀은 만상귀일이다. 팔괘가 나누는 것이라면 청성은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만물이 하나에서 시작하므로 종국에는 다시 하나로 모인다는 뜻이다. 그 하나는 검수를 가리킨다. 자연의 모든 흐름을 검수인 나로 하여금 하나로 모으는 것이 청성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청성은 유연하다.
세간에서는 그런 청성이 도교 문파치고 세속적이라고 한다. 그들이 자신들더러 말코 도사라고 비하하는 것을 어찌 청성의 도사들이 모르겠나?
그러나 본디 청성산은 도교의 중심이었으며,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 청성이다.
쌀 다섯 두만 내면 그 누구든 입교할 수 있는 오두미도처럼, 청성은 모든 것을 하나로 수용한다.
설령 살수 문파의 무공이라고 한들 검수인 내가 받아들이고 이것을 귀일歸一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청성의 것!
눈을 번쩍 뜬 일현이 단검을 조금 높이 던지더니 반대로 칼자루를 낚아채었다. 역수였다.
* * *
“쓰라고 하니 쓰겠소. 무명자(無名刺), 단검법에 이름은 없소.”
무엇이든, 살수에게는 이름이 붙여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하에 양친에게 받은 모든 것들에는 이름이 없었다. 말을 덧붙인 일현이 당연오에게 바짝 붙어 단검을 휘둘렀다.
그전까지는 숲속에서 부는 바람처럼 하늘거리던 초식이 후벼파듯 긁어 찌르는 형태로 바뀌었다. 영락없는 살초다. 베이거나 찔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피부나 그 속을 아예 긁어낼 수 있는 형태였다.
살벌하게 바뀐 일현의 단검법에 당연오가 다시 수세에 밀렸다. 안쪽으로 파고들면 수라 같은 단검이 비철조의 속도에 따라붙으며 호시탐탐 빈틈을 역으로 찔러 들어왔다. 그렇다고 거리를 두자니 장검인 칠성검이 있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나도 암기 쓴다고 할걸!!! 아냐, 이거 끼고 비수 던질 엄두가 안 나긴 한다.’
투척형 암기는 손끝의 감각이 중요하여 비철조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쓰기 힘들었다. 짧은 사거리의 비철조를 낀 것에 대해 속으로 자기 자신을 좀 탓한 당연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합을 나누면 나눌수록 당연오의 몸과 얼굴에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탓에 반묶음으로 묶어 놓았던 머리카락 끝도 조금 잘리고 말았다.
반면 일현은 위협적으로 검을 쓰면서도, 정작 당연오의 비철조에 스치는 것은 극도로 경계하여 상처가 없었다.
휘이잉, 휭! 쉬익!
단검과 칠성검을 번갈아 사용하며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는 일현을 유심히 살피던 당연오가 결심을 굳혔다.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했다.’
그와 동시에, 양쪽에서 쇄도하는 칠성검과 단검을 당연오가 양손으로 잡아챘다.
끼이이익, 끼긱, 까가각―!!
비철조의 틈 사이로 검날이 파고들며 당연오의 손에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대련에 완벽히 집중한 일현은 평소처럼 물러서지 않고 눈을 희번덕 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더 많아지는 건 소협일 것 같소. 아무리 당문의 독이 유명하고 무섭다한들, 스치지 않으면 그만. 지금도 이렇게 양손이 묶인 채 소협만 다치고 있지 않소.
여기서 끝내도 괜찮을 것 같소만. 소협이 더 다치기 전에.”
원 없이 쌍성검의 무위를 드러낸 일현이 다소 건방지게 말했다. 여전히 일현의 쌍검을 쥐고 있던 당연오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미안하지만, 제 목적은 지금 당장 도장이 못 움직이게 하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