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면 기꺼이 2권
너라면 기꺼이 2권
너라면 기꺼이
· 2 ·
© 그믐칠야
너라면 기꺼이 2권
· 차례 ·
1장
2장
3장
4장
5장
너라면 기꺼이 2권
1장
「대신 부탁이 있어.」
성현이 나라의 집으로 찾아와 화해의 말을 건넨 날이었다. 부모님에게 이실직고하러 가는 자리에 동행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성현은 나라가 조건을 내밀 거라는 걸 예상했었다.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누나가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성현이 닦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상처를 입은 쪽은 성현이 아니라 나라였다. 함부로 제가 그 아픔을 재단할 순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원한다면 성현이 물러서야 했다. 부서가 다르다 해도 또다시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건 그녀에게 고역일 게 분명하니까.
사실 애초부터 태선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민 단장의 말대로 태선이 훌륭한 선택지긴 했지만 민 단장의 아래에 들어가 춤을 출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숨이 막혀왔다.
「태선 말고 T.S로 와.」
하지만 나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밖의 것이었다.
「그게 부탁이야?」
「네가 필요해.」
「누나가 나한테 왜 이런 제의를 하는 건데?」
「널 스카웃 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전시사업팀이 왜 무용수를 섭외해야 할까?」
「부서가 바뀌었거든. 내가 T.S 댄스 시어터 담당이야.」
성현은 여태 살면서 누구 앞에서 말을 잃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나라에게는 백전백승의 상대 전적을 가지고 있는 성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뒤에서 이렇게 호박씨를 까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뭐? 누구 맘대로?」
「내가 동의했어.」
「미쳤냐? 누나가 공연에 대해서 뭘 안다고.」
「누구 덕분에 아예 문외한은 아니지.」
평소와 달리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나라를 보자 성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역지사지라는 게 이런 건가. 제가 뻔뻔하게 누나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마다 누나는 이런 아득하고 답답한 기분을 느꼈던 걸까.
참회의 마음으로 과거 자신의 행실을 하나하나 되새길 새도 없이 나라는 충격적인 말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이번 공연 무사히 잘 올리면 뉴욕센터 관장 자리 준댔어.」
「지금이라도 거절해. 누나가 무슨 공연을 올려. 혹시라도 망하면 그 책임 너한테 다 뒤집어씌울 작정인 거야. 대가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 그런 건 뒤가 다 구리게 되어 있다고.」
「네가 있으면 망할 일은 없을 거야.」
「…….」
「난 할 거야. 너한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한텐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야. 맥없이 놓칠 순 없어.」
단호한 나라의 태도에 성현은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나랑 같이 일을 하면서까지?」
「네가 내 동생인 것만 모르면 돼.」
하지만 그 카드마저 나라의 의지 앞에서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나라는 과거에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오히려 그 과거에서 머물러 있는 건 성현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럼 돼.」
「…….」
「그러니까 T.S로 와. 부탁이야.」
자존심 강한 나라는 단 한 번도 성현에게 도와 달라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늘 괜찮은 척 성현과 부모님 앞에서 가면을 썼었다.
모두가 감쪽같이 속았다. 그 완벽한 연기 뒤에서 점차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나라 자신조차 인지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그 어떤 전조 증상도 없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나라의 몰락은 본인에게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성현이 하나뿐인 라이벌이 자기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두 사람의 불행이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저로 인해 누군가가 무너지는 걸 보는 성현의 마음이 어땠을지 나라는 알 리가 없었다.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무너질 거였다면 한 번쯤 제게 손을 잡아달라 부탁할 순 없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 뿐이었다.
그래서 떠났다. 나로 인해 또 누군가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악몽이라면, 사라져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네 누나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
성현이 떠나고 난 뒤 나라는 자신의 길을 찾았다.
하지만 휴가차 귀국을 할 때마다 나라에게서는 어딘가 불안함이 느껴졌었다. 그게 성현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 두려움 속에 사는 건 아닐까. 나의 짧은 귀국이 혹여나 과거의 아픔을 건드린 것은 아닐까.
‘분명 예전이랑은 달라.’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나라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성현은 비로소 나라에게서 그동안 엿보았던 불안함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그토록 바랐던 도움의 요청이었다. 앞으로 향하려는 그녀의 걸음에 도움을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또한 성현이 사는 길이었다.
* * *
도진은 T.S 댄스 시어터 사무실을 둘러보는 성현과 조금은 긴장한 듯한 나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조금 전 나라가 성현이 로비에 도착했다는 말을 전할 때만 해도 도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하지만 로비에서 성현을 발견하고, 민 단장을 앞에 세워둔 채로 도진과 나라에게 다가왔을 때 비로소 현실임을 자각했다.
그토록 원하는 이성현을 영입할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어쩐지 기쁘지가 않았다. 도진의 신경은 온통 묘한 기류가 흐르는 나라와 성현 사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왜 생각을 돌린 거지?”
“그러게. 여러모로 이쪽이 기우는 조건인데 말이야.”
기가 막히게 나라의 자리를 찾아 앉은 성현의 시선이 자리 주인에게 가닿았다.
“우리 이나라 주임님의 열렬한 구애를 모르는 척할 수 있어야지.”
열렬한 구애?
성현의 자극적인 단어 선택에 도진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도진이 눈에 보이지 않는지 성현은 나라를 보며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나라를 향한 노골적인 성현의 시선을 지켜보던 도진이 재빠르게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그제야 성현의 맑은 두 눈이 도진과 마주쳤다.
“아. 이제 말 불편하게 해야 하나? 그래도 단장과 단원 사이니까?”
“마음대로 해.”
“그래 그럼.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죠? 이나라 주임님?”
도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현은 고개를 꺾는 수고까지 해가며 나라에게 말을 걸었다. 성현의 의도가 훤히 보였지만 나라는 더 이상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여기 대본입니다. 오디션은 곧 진행할 거고, 다음 달부터 연습 들어갈 예정입니다.”
“내가 최초의 단원이구나. 그래. 뭐 그 정돈 각오했고, 계약서는?”
“이번 주 중으로 초안 전달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그 전에 몸이나 풀어야겠다. 연습실 어디 쓰면 돼?”
나라와 도진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눈치 빠른 성현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놓치지 않았다.
“설마, 연습실도 하나 없는 건 아니지?”
“곧 해결될 거야.”
“준비된 건 하나도 없으면서 오라고 했다고? 와. 우리 이나라 주임님. 영업 기술이 아주 독특하시네. 그럼 난 뭘 하고 있으면 되나. 손가락이라도 빨면서 놀고 있을까나.”
“재활부터 해. 시간 많지 않아. 술은 끊고.”
“그건 내가 알아서….”
“이제 내 단원이니까 내가 관리해.”
갑작스레 연습실을 걸고넘어지는 성현으로 인해 당황했을 텐데도 도진은 차분하게 대응해 냈다. 나라는 그런 도진을 보며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에게 재능이 있다는 건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리더쉽에 대해서는 우려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수십 명의 단원을 거느리는 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성현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한 기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푸는 건 부상 다 낫고 나서야. 그 전엔 연습실 발 들일 생각하지 마.”
“강도진 세게 나오네.”
문제는 성현도 만만히 물러설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둘 사이에 튀는 불꽃을 보니 어쩐지 앞으로 나라의 등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참아야지. 뉴욕을 위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그래. 단장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진의 앞으로 향했다. 두 남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서서 말려야 하나 싶은데 성현이 도진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단테의 신곡이라. 마음에 드네. 내가 지옥 하나는 끝내주게 보여줄 자신이 있지. 누구 덕분에.”
* * *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민 단장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문이 빼꼼 열렸다. 이렇게 예의 없이 등장할 사람은 한 명뿐이기에 민 단장은 안경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역시나 황 이사장이었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에이. 우리 사이에 왜 이래. 괜히 딱딱하게.”
황 이사장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는 사이 민 단장은 당황하며 들어선 비서에게 차 두 잔을 내어 올 것을 지시했다.
“요즘 공연사업팀 쪽이 시끌벅적하다던데. 오늘도 한 건 했다며?”
민 단장은 대답을 피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굳이 제게 찾아와 심기를 건드리는 황 이사장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유출 사건은 조용히 사라졌던데?”
“해당 직원 해고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 및 보상 처리하는 걸로 마무리했습니다.”
“잘린 인턴이야 그렇다 쳐도 도진이네한텐 어떻게 보상할 건데요?”
“고민 중입니다.”
“잘됐네.”
대체 뭐가 잘됐다는 건지, 방문의 진짜 목적을 물으려는데 마침 비서가 차를 내왔다.
평소엔 비서가 있든 말든 제 이야기를 늘어놓는 황 이사장이 오늘따라 어쩐지 말을 아꼈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는 걸 본 후에야 입을 뗐다.
“그럼 이제 이성현도 영입했는데, 연습실 문제도 해결해 주시면 안 될까? 주변에 보는 눈들도 있고, 도진이가 아들인 거까지 밝혀졌는데 단장님이 옹졸하게 굴어서 되겠어?”
결국 이거였구나.
민 단장은 들고 있던 찻잔을 강하게 내려놨다. 기분 나쁜 마찰음이 조용한 단장실을 채웠다. 황 이사장도 민 단장의 격한 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어디까지 참아줄까.”
친구지만 어쨌든 이사장과 단장이라는 직급의 차이가 있었기에 민 단장은 늘 황 이사장에게 존대를 해왔었다.
그건 황 이사장의 권력에 무릎을 꿇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너를 이만큼 존중하니 너도 날 존중하라는 의미였다.
“나 몰래 도진이 데려온 것부터, T.S. 창단에 신년공연까지 그냥 넘어가 줬는데.”
“그건 재단 차원에서….”
“이제 운영에도 사사건건 참견까지 하시겠다?”
하지만 수십 년간 지켜온 민 단장의 품위와 자존심은 도진의 등장으로 가차 없이 구겨져 버렸다.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걸 모르는 척 용인해 온 황 이사장까지. 모르고 있다면 제대로 가르쳐야 했다.
“제가 어디까지 참아드리면 될까요? 이사장님?”
내가 너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