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 히어로 21권
도핑 히어로 21권
도핑 히어로
21
소락
도핑 히어로 21권
차례
Chapter 01. 피로 물든 달 - 2
Chapter 02. 단꿈을 꾸었구나
Chapter 03. 죽으면 영웅이다
Chapter 04. 내 앞을 막지 마라
Chapter 05. 독종을 건드렸다 - 1
도핑 히어로 21권
Chapter 01. 피로 물든 달 - 2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서 이고르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육체는 제멋대로 변이가 시작되었고 벌어진 입에선 걸쭉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크르르르르.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지만, 피가 끓어올라 머릿속엔 살육 충동만 가득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우우우우우우!
기나긴 하울링이 연기를 뚫고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서 동족들이 호응했다.
늑대로 변이한 늑대인간들이 흡혈귀들을 덮쳐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배신에 흡혈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흡혈귀들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배신이야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소도 안에서 늑대인간이 무슨 수로 변이를 한단 말인가?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아! 당황하지 말고 진형을 갖춰서 놈들을 상대해.”
마수들이 늑대들에게 달라붙자, 흡혈귀들은 간신히 연막 속에서 탈출했다.
“이제야 쪽수가 조금은 맞는 건가? 어때? 재미있나?”
연기가 가시며 실실 웃으며 제단 쪽을 바라보는 강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허! 이번 건 제법 신선했네. 궁금하구먼. 내 경호원들의 충성심이라면 절대 배신할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충성심이 아니라 몸에 심어둔 저주 때문이겠지. 그런데 소도에선 그 저주도 발동이 안 되는 거 몰랐어?”
“저주를 해결했다고 해도 자네의 설득에 넘어갔다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구먼. 상식 밖이야.”
“설득? 내가 그딴 걸 했을 거 같아?”
강호는 사나운 늑대들이 날뛰는 틈을 노려 흡혈귀들에게 달려들었다.
늑대인간이 우 회장을 배신한 건 강호가 꾸민 짓은 맞았다. 다만 설득 대신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 것뿐이지만.
― 피가 옅은 열등한 것들뿐이라 내 지배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지금만 해도 충분해. 흡혈귀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존재감만으로도 강력한 마수를 경직시키는 늑돌이다. 거기에 녀석은 늑대의 시조와도 같은 존재.
다만 늑대인간 자체가 순수 혈통이 아닌 변종에 가까운 존재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는 말이었다.
― 이곳은 다른 소도와는 다른 기운을 풍기고 있다. 더러운 기운으로 오염되었다.
“그래. 덕분에 늑대인간이 변신도 하고 좋잖아?”
강호는 흡혈귀의 가슴팍에 뾰족한 나무 말뚝을 쑤셔 박은 뒤 망치로 후려치며 즐거워했다.
흡혈귀나 늑대인간만이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것은 아니다. 강호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오랜 세월 인간들이 연구해왔던 온갖 무기로 무장했다.
그것들을 사용하는 게 이골이 난 강호다.
검으로 심장을 꿰뚫고 이마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등 뒤에서 달려드는 흡혈귀를 몸을 비틀어 흘려보내며 발목을 날려 자빠뜨린 뒤 말뚝으로 땅에 박았다.
머리를 노리고 뚝 떨어지는 박쥐를 낚아채 이빨로 놈의 날개를 찢어 질겅질겅 씹는 강호의 모습에 흡혈귀들은 경악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다.
더 무서운 점은 사냥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 제단 위에서 이를 지켜보는 우 회장은 전율했다.
“으허허허허! 확실히 날 닮은 놈이야.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우 회장은 하늘에 덩그러니 놓인 보름달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서 피처럼 진득한 광채가 뚝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보름달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악!
흡혈귀들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돋아나며 움직임이 몇 배나 빨라졌다.
놈들은 짝을 맞춰 늑대의 단단한 앞발을 붙잡고 힘을 주었다.
쫘아악!
늑대의 몸통과 다리가 분리되면서 엄청난 양의 피가 땅을 적셨다.
단숨에 전세 역전.
하지만 늑대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포효하며 재빠르게 저들끼리 뭉쳐 으르렁대며 강력한 적수를 경계했다.
“넌 누구냐?”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이고르의 입에서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면서 왜 물어?”
“진짜 정체가 무엇이냐!”
이고르는 두려움과 경배심이 뒤섞여 떨리는 목소리로 버럭 소릴 질렀다.
“내 진짜 정체?”
강호는 무표정한 눈으로 일그러진 이고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세상의 괴물을 멸하는 괴물 사냥꾼.”
“우리라고 괴물로 태어나고 싶었겠나?”
“내가 언제 너희더러 괴물이라고 했나?”
“뭐?”
“외모는 중요치 않아. 외형이 괴물이라고 괴물 취급을 받아야 하면 나도 그 기준에서 자유롭지 않아.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난 인간이야. 묻겠다. 넌 인간인가 괴물인가?”
“…….”
이고르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남들은 자신들을 괴물이라 단정했다. 그랬기에 그렇게 살아왔다.
‘난 인간인가, 괴물인가?’
“이런 상황에서 사춘기 때 끝냈어야 할 고민이나 하다니 너도 한심하다.”
“뭐?”
“네 쫄따구들 죽어 나가는 건 안 보이나?”
이고르의 흐리멍덩했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샛노란 동공을 형형히 빛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크아아앙!
이고르가 땅을 박차 흡혈귀 하나의 머리통을 물고 고개를 털자, 머리 잃은 시체 하나가 저 멀리 날아갔다.
“단순한 놈. 그나저나 확실히 피곤하긴 하네. 저놈 확실한 거 맞아?”
― 저 향로는 진짜다.
강호는 제단에 놓여 연기가 피어나는 향로를 힐끔 본 뒤 주먹만 한 물체들을 꺼내 여기저기 던졌다.
폭탄인 줄 알고 흡혈귀들이 황급히 물러났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늑대들이 잠시나마 자유를 되찾고 이고르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흡혈귀들과 대치했다.
“다들 날뛰느라 땀 뺏으니 머리 식힐 시간이야.”
푸확! 쏴아아아아!
강호가 던진 것의 정체는 스프링클러. 예전 동일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아야에게 부탁해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비처럼 뿌려지는 액체의 정체는 축성 받은 성수.
캬아아아악!
성수를 뒤집어쓴 흡혈귀들이 불에 타는 것처럼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며 괴로워했다.
이젠 몇 남지 않은 늑대인간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까이에 있던 흡혈귀들을 물어뜯었다.
흡혈귀들이 길러왔던 마수들이 아니었더라면 피해는 훨씬 컸으리라.
이고르는 아직도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수하들을 보며 입이 썼다.
‘망할!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갑자기 피가 끓어오르며 살육 충동이 몸을 지배했다. 그 뒤론 기억이 끊겼다.
배신하려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누가 믿어주겠는가?
특히나 냉혹하고 비정한 우 회장은 앞에선 웃겠지만,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원흉인 강호를 원망하는 것도 우습다.
서로 죽이려는 관계다. 이보다 더한 짓이라도 당한 쪽이 멍청한 거다.
크르르르르!
이고르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오랜 세월 함께해온 수하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
최악의 상황.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신호였다.
“큭큭큭! 이 난장판에서 도망갈 기회가 있을 거 같아? 니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 박쥐 새끼들을 죄다 찢어 죽이는 거. 운 좋게 여길 빠져나간다고 해도 저 늙은이가 살아 있는 한 어차피, 알지?”
강호의 얄미운 목소리가 이고르의 마지막 희망까지 앗아갔다. 결국 이곳에서 모조리 죽을 운명.
― 투지를 잃은 꼴이 늑대가 아니라 개로구나.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이고르는 몸을 살짝 떨었다. 자신들을 미쳐 날뛰게 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
감히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절대자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갈 길을 알려주십시오.”
― 살아남는다면 알게 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이고르의 피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다른 늑대들의 털이 뻣뻣이 곤두서며 다시 한번 긴 하울링이 붉은 달이 떠 있는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잠재된 피의 능력이 개화되며 늑대들이 한층 더 난폭하게 날뛰었다.
“노괴.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으려고 그래? 슬슬 나서야지 않겠어?”
“허허! 맹랑한 놈이로고.”
우 회장은 비릿하게 웃었다. 자신의 종속과 노예들이 죽어 나가도 그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저들은 제물로 쓰일 예정이었으니까.
그는 피로 물든 달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이제 그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구나.”
우 회장은 양팔을 활짝 펼친 채 여흥을 만끽했다. 강호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격했다. 그러나 곁에서 그를 지키던 이들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맹랑한 아이에겐 좋은 말보다 회초리가 더 필요한 법이지.”
우 회장은 손을 슬쩍 저었다. 그러자 그를 경호하던 이들이 비틀거리며 길을 열었다.
그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제단을 걸어 내려오자, 거대한 위압감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자 구부정한 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자글자글했던 주름이 사라지며 팽팽한 피부가 되었다.
“피를 얼마나 빨아댔으면 회춘을 다 하네? 그 나이에 그런 모습이 더 추하다는 거 몰라?”
“내가 왜 여태까지 널 가만히 놔두었을 것 같으냐?”
“오! 흡혈귀의 생각까지 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
우 회장은 강호의 건방진 태도에도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많은 인간이 널 사고뭉치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내겐 아주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수십 년을 날 괴롭히던 골칫거리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그 보답을 받아야겠네.”
“이제야 원하는 게 생겼나?”
“늙으면 눈치라는 게 없어지나? 원하는 건 진작에 있었어. 그리고 그걸 내 손으로 직접 가져갈 생각이야.”
스르릉!
강호는 등에 메고 있던 사인참사검을 뽑았다. 그리고 달려드는 흡혈귀들을 베어 넘기며 우 회장을 향해 돌진했다.
“쯧쯧! 성급함은 젊은이들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하지.”
우 회장은 뒷짐을 풀고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땅에 냇물처럼 흐르던 피가 핏방울이 되어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이곳이 소도라는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강호는 놀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