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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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그녀의 말과 행동에 하이릭스가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건가?”
한 여자에 정착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질투하는 모습을 볼 때 큰 희열을 느끼곤 했다. 지금처럼.
“하긴, 셀렌디스 경은 흔히 볼 수 없는 외모를 가졌지. 고풍스러운 금발 금안도 그렇고.”
“이러다가 청혼할 기세네.”
“무슨 서운한 말씀을. 내 옆자리는 너한테 비워 둔 거 알면서 그래? 내가 가문을 잇기만 해 봐. 바로 공작 부인 소리 들을 테니까.”
듣기에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오라클은 ‘공작 부인’ 칭호에 그리 기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공작이 되면 나를 마르스 경하고 바로 혼인시킨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 누구더라?”
“하하하하. 당연히 농담이지. 그 말 할 때마다 구겨지는 네 표정이 보기 좋았거든.”
“그거 악취미야.”
하이릭스는 그 부분이 전부터 신경 쓰였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인이 되면서 몸은 더욱 가까워졌지만 마음은 멀어지는 모순적인 상황.
하지만 오히려 하이릭스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애초에 진심으로 그녀를 안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쳐줘야 심복이고, 그저 가문을 잇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이쪽으로 오다가 오브라이언 경을 만났다. 셀렌디스 경이 호위 기사로 있으니 그때 본 거야. 이제 의문이 해소됐나?”
“오브라이언 경, 네가 보기에 어땠어?”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감찰단 본부에 갔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라면 아주 할 말이 많았다.
오라클은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이야기를 술술 꺼냈다.
“마침 휴가 중이라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우연히 만났어. 아주 잘생겼더라? 냉철하고 지적인 모습을 보니 상대하기 쉽지 않아 보이기도 했고. 과연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만했어.”
오라클의 눈빛이 살아난 것 같은 인상을 받은 하이릭스는 씨익 웃었다.
주종 관계이기 전에 오랜 친구라서 잘 안다. 지금 그녀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놈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오브라이언이 앞을 막는 걸림돌일지, 아니면 그저 반짝이는 조약돌인지 확인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이 좀 바뀌었다. 걸림돌 쪽으로.
하이릭스는 어려서부터 그랬다.
자신의 것은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아무리 쓰다 버릴 도구라고 해도 지금은 자신의 것이었다. 공작령의 천재라고 불리는 오라클이라고 해도 말이다.
“왜 그렇게 봐? 천하의 하이릭스 대공자께서 질투라도 하시는 건가?”
“내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는 건가? 그거야말로 고약한 취미로군. 질투는 무슨.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자들인데 그런 걸로 질투를 해?”
“자기 거 빼앗기는 거 정말 싫어했잖아. 그런 논리 아닌가 싶어서.”
의외에서 정곡을 찔린 하이릭스는 픽 웃기만 했다.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었고, 이제는 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다.
“클리프 영지 건은 어떻게 됐지? 놈들이 임무를 받겠다고 했나?”
“확답은 못 들었어. 외부 임무도 루시아 아가씨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모양이더라. 그래서 오브리 경이 허락을 받느라 본성에서 만난 거 같은데?”
“그렇군.”
하이릭스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은밀한 경로로 알게 된 어떤 ‘사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것은 최근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가장 큰 골칫덩이 중 하나였다.
칼리스토의 젊은 후계자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로만 남작도 그랬고, 클리프 자작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후계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약점이 필요하니까.
칼리스토의 주인인 듀크 공작도 장남의 그런 행동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다 클리프 자작령에서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몬스터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험준한 지형인 만큼 몬스터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 이유를 들여다보는 와중에 긴급한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클리프 자작가 사람들이 비밀리에 ‘어떤 의식’을 치른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클리프 자작가 사람들이 그렇게 정신이 나가거나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쯧.”
“그래도 잘라 낼 건 잘라 내야 해. 썩어 들어가는 걸 아깝다고 방치하면 전체가 썩어 버릴 테니까.”
“알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빨아먹을 것 같은 완벽한 흑빛의 구슬.
하이릭스와 오라클은 클리프 자작가가 비밀리에 소유하고 있던 그 구슬이 문제를 일으킨 거라고 추측했다.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걸까? 또 어떻게 사람들을 타락시킨 걸까?
추측만 할 수 있는 지금으로서는 의문투성이였다.
“그 구슬이 원인이 된 게 분명해. 고대 문헌을 보더라도 흑마법계에서 사용하는 성물의 힘이 영지 전체를 타락시킨 일이 꽤 있었거든.”
“교단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처리해야 한다. 늦으면 귀찮아질 거야.”
“어머, 우리 대공자님 걱정이 많이 느셨네. 자애로운 아가씨께서 이번 임무를 수락해 주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이제야 여유를 되찾은 오라클이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넓게 펼쳐진 정원이 시야에 잡혔다.
한편으로는 연무장에서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보인다. 북부의 야만족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기개가 느껴진다.
이 모든 게 칼리스토 가문의 것이라니. 매번 보는 광경이지만 새롭다.
‘공작 부인으로 산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녀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하이릭스 공자에게는 평생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루시아 영애의 친필을 담은 공식 임무장이 내려왔다.
클리프 자작가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을 모두 조사하라는 다소 모호한 임무였다.
임무장을 본 제리코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단순히 사건을 조사하러 가는 게 아닌 듯한 느낌이군요. 불미스러운 일이라…… 혹시 다른 이야기 들으신 거 없습니까?”
“들은 게 있었으면 너에게 말해 줬겠지.”
“으음. 뭔가 큰일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용인들 일은 뭔가를 덮기 위해 일어난 사건 같고 말이죠.”
그럴 가능성이 크다.
임무장을 준 건 다름 아닌 대륙 최고의 흑막 루시아 드 칼리스토니까.
문제는 클리프 자작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전 정보가 전혀 없다는 거다. 진짜 게임 한 판 안 해 본 게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제리코가 모아 준 정보는 클리프 자작가에 관한 기본 정보일 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어려운 임무가 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 된 이상 제가 본부를 지키면서 잘 보좌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내뺄 생각이야?”
“산이 많은 곳이잖아요. 전 등산에 자신 없습니다. 그러다 무릎 나가요. 제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감찰단 임무에 큰 지장이 생깁니다.”
변명 한번 신선한데?
“아니 무슨 서른도 안 먹은 젊은 사람이 무릎이 나간다고 그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잘 보존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의사, 그것도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으로 말씀드리자면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혹사당한 사람들은 관절 건강이 좋지 않다고 통계적으로 증명되어 있어요. 제가 관련 논문을 구해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젊었을 때도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그 얘기 루시아 아가씨 앞에서도 할 수 있어?”
“아이고, 어떻게 저같이 천한 사람이 감히 아가씨의 면전에 서겠습니까?”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환하게 웃은 제리코가 나와 셀렌디스의 팔을 붙잡고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여정을 함께할 제 분신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이 포션! 이건 정말 귀한 포션입니다. 저의 독창적인 연구 성과라고 할 만하지요.”
“수석 졸업생이니 어련하시겠어. 알았으니까 서론은 생략하고 본론만 말해.”
“바로 효과를 보여 드리는 게 좋겠지요. 자, 보십시오.”
제리코는 작은 사각형 모양의 유리를 가져왔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앞뒤로 흔들었다.
“깨끗하죠? 하지만 이 위에 특제 포션을 부어 보면……!”
치이익.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유리에 검붉은 흔적이 남았다.
“이렇게 자국이 생깁니다. 신기하죠?”
“루미놀 용액?”
“루미…… 뭐요?”
“아니, 그런 게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혈흔에 반응하는 포션인가?”
“헐! 이럴 수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거 나름 회심의 무기였는데?”
루미놀 반응이야말로 과학 수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를까?
작용 기전은 좀 다른 것 같지만 형식상 비슷한 포션 같다. 만약 클리프 영지의 일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면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회심의 무기를 간파당한 제리코는 입맛을 다시며 다음 물건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건 저만의 비법으로 만든 렌즈를 이용한 돋보기입니다. 사물을 크게 볼 때 유용하게 쓰이지요.”
“다음은?”
“코카서스의 털로 만든 붓입니다. 탐사에 제격이죠.”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을 보고 있으니, 이번 임무는 전투보다는 조사 위주인 듯했다. 알찬 구성이다.
“혹시 인피면구도 필요하실까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하나씩 가지고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지요.”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클리프 자작령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루시아 영애에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겠다고 전서를 남겼다.
“그럼 두 분 잘 다녀오십시오. 무슨 일 있으시면 전서매를 이용하시면 빠를 겁니다.”
제리코가 호루라기를 건넸다. 자신이 훈련시킨 것이라 부르면 바로 올 거라면서 또다시 자랑했다.
휘이익!
시험 삼아 호루라기를 불어 보니, 잠시 후 저편에서 날쌘 매 한 마리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푸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