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76-100화
76.
마더 사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 주자 동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 모두 마더 사라가 말한 그분이 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
잠깐 긴장감 어린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건, 차준혁이었다.
“결국 그자와 공통의 목표는 킹덤을 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교섭 여하에 따라 동료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차준혁은 희망을 먼저 보려 했다.
괜한 직감 때문에 긴장해도 지금은 무의미하다.
김재하 역시 차준혁의 긍정적인 이야기에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해 볼 생각입니다. 적이 아니라 동료가 되면 좋겠죠.”
긍정적으로 대답은 했지만, 김재하는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만일 동료가 되려면 벌써 나타나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으리라.
그렇게 동료들과 이야기를 꺼냈던 김재하가 미간을 모았다.
사실, 의뢰를 한 배후로 의심이 되는 이가 있긴 했다.
바로 지금 김무창의 형 김무준이다.
김대산이라면 마더 사라에게 의뢰하지 않고 차라리 킹덤을 통해 킬러들을 보냈으리라.
아니면 습격조차 하지 않고 사고로 위장해 죽여 버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김무준이 마더 사라의 ‘의뢰주’이리라.
차라리 자신이 먼저 김무준의 앞에 나타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런 ‘합의’는 주도권을 쥐는 이가 유리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자신도 김무준에 대해선 많은 걸 알지 못한다.
만일 그가 김무창을 노리는 배후가 아니더라도, 만나 볼 이유는 있었다.
김대산을 따라 적이 될 자라면, 미리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봐야 했고.
여차하면 김무창의 세력과 싸울 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민철을 통해 김무준을 조사하는 건 불리하다.
이미 오민철은 마더 사라의 세력에게 얼굴이 알려진 상황이니 말이다.
배후가 아니라면 오민철이 나서도 상관없지만.
‘만일 배후라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마더 사라 혹은 김무준이나 김대산 측에서 오민철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니 마더 사라 측도 얼굴을 모르면서도 김무준을 뒷조사할 능력을 가진 이가 필요하다.
‘오랜만에 반장님을 만나야겠어.’
바로 정진학의 얼굴을 떠올린 김재하가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며칠 있다가 또 오겠습니다. 훈련 열심히 하세요.”
* * *
김재하의 집, 인근의 공용 주차장.
그의 호출을 받고 차를 몰고 온 정진학이 김무창의 수사에 관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김무창을 수사는 하고 있어. 하지만 쉽진 않아. 죄는 많이 저질렀는데 물적 증거가 하나도 없거든.”
“조금만 더 있어 주시면 확실한 증거를 드리겠습니다. 대신 조심하십쇼.”
김재하의 이야기에 정진학이 입매를 치켜올렸다.
그의 배려와 걱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작 위험한 건 김재하였다.
“고맙기는 한데, 난 네가 더 걱정된다. 이해도 안 되고. 김무창을 지켜 줬다면서?”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재하는 자신이 김무창을 지켜 준 일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김무창의 습격은 이미 경찰들에게 알려졌고.
당연히 정진학의 귀에도 들어간 일이었다.
그렇기에 김재하는 답은 하면서도 김무창을 지킨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정진학이 경찰인 이상, 당연히 김무창이 황영목 후보를 암살하려고 한다면 바로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거기다.
‘어차피 지금 말해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아직 김무창은 암살을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야기만 나눈 상황인데 잡으려고 해도 잡을 게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말해 주지 않을 거고?”
“예.”
김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제게 반장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옵니다. 그때 꼭 도와주십쇼.”
“지금은 박만규도 전격적으로 밀어주고 있어. 인력도 수사비도 지원을 제법 받긴 하는데…… 혹시 박만규도 네 말을 듣고 그러는 거냐?”
“글쎄요?”
김재하가 빙그레 웃자, 정진학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지금 이 웃기는 꼬맹이의 생각대로 상황이 움직이는 것이다.
서장과 형사를 움직여서 김무창을 압박하고.
본인은 김무창 옆에서 감시하면서 증거를 모으고 있다…….
보통 꼬맹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네가 보통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난 놈일 줄은 몰랐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김재하가 싱긋 웃고는 본론을 꺼냈다.
“정진학 형사님이 조사를 해 주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수사가 아니라 조사?”
“예. 조사요. 이번 김무창의 습격 사건과도 관련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 아군이 될 수도 있구요.”
김재하가 이야기에 정진학이 눈빛에 흥미가 어렸다.
“지금 나보고 대산 그룹 후계자를 뒷조사하라는 거냐?”
“혹시 어렵거나 불가능합니까?”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지. 재밌겠구나.”
정진학이 투지를 불태웠다.
재벌의 뒷조사를 하고 그들의 죄를 밝히는 건 자고로 형사들의 로망 아니던가.
“나흘만 시간을 다오. 조사 끝나면 연락을 주마.”
“예. 그럼.”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한 김재하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정진학의 자동차가 엔진 소리와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김무준은 반장님에게 맡기고. 며칠은 더 쉴 수 있겠네.’
김재하는 기지개를 켜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푹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질 정도였다.
그렇게 웃으면서 걸음을 옮기던 김재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집 인근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이다.
시선을 느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김재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살기를 보낸 자는 사라진 뒤였다.
‘아마추어는 아니고, 경고를 보낸 건가?’
김재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기를 알고 있다는 건 집의 위치까지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잘못하면 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다.
‘어머니와 누나한테 경호원을 붙여야겠어.’
오랜만에 이준명을 만나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특무 돌격대원들에게 어머니와 누나의 경호를 맡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경호에 관해선 아마추어다.
레드독의 용병들은 정진학을 지켰을 때처럼 경호 업무도 하고 있으니 그쪽에 맡기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 가족을 노리면 반드시 죽인다.’
가족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반드시 몇 배로 갚아줄 것이다.
적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기척이 느껴진 방향을 노려보던 김재하가 몸을 돌렸다.
.
.
.
김재하가 바라본 골목의 끝.
그를 노려봤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무준의 명령을 받고 고아영을 구했던 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이번에도 김무준의 명령을 받고 김재하를 미행했다.
전설의 킬러와 이름이 같은 김재하는 그녀에게 특별한 대상이었다.
단순히 그 사람과 이름이 같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킹덤, 정확히 말하면 이철준에게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킹덤과 맞서겠다며 날뛰는 모습이 신기한 것이다.
그래서 김무준이 김재하를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도 군말 없이 나선 것이다.
아직 그가 동료가 될지, 적이 될진 확신할 수 없다.
김무준도 원래의 계획보다는 더욱 빨리 김재하 앞에 나타나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반년 정도 세력을 모으고 움직이려고 했다면서 왜 이러는 거지?’
김무준의 계획이 달라진 이유는 그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자신을 구해 주고, 그의 복수를 할 기회를 준 김무준이다.
지금으로선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눈앞에서 또 다른 김재하가 죽는 일만은 없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 넌 죽지 마라. 꼬마야.’
속으로 사랑했던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년에게 한마디를 남긴 여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다음 날 학교가 끝난 후.
김재하는 이준명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레드독의 서울 지부에 고등학생이 드나드는 건 흔치 않은 모습이기에 지나가는 용병들과 직원들이 그를 힐끔거렸다.
거기다 서울지부의 책임자인 이준명이 직접 안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직원들과 용병들은 이준명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동시에 또다시, 김재하를 힐끔거렸다.
김재하는 그들의 시선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별다른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