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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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중호 팀장은 결국 내 제안을 수용하기로 했고,
프런트의 결재가 떨어지는 대로 본인이 독일로 출국할 것이라고 전해 왔다.
‘이게 되네.’
애당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이 상황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실 나에겐 어느 구단에 입단할 것인지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최중호 팀장이 내 제안을 받지 않으면 나 역시 미련을 갖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북이나 울산, 서울 같은 우승권 팀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급반전되어 버린 것.
물론 아직은 내가 추천한 그 녀석의 입단이 확정된 것이 아니며 그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과정일 뿐이지만, 적어도 FC대전에 대한 내 호감도가 올라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물론 구단에서 내 제안을 수용한 데에는 몇 가지 조건들이 맞아떨어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FC대전은 지난 수년간 브라질산 용병 농사에 실패했고, 이제 다방면으로도 용병을 고려해 볼 타이밍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직접 발로 뛰며 용병을 물색해 보기에는 유럽의 하위 리그 쪽도 괜찮은 선택지라는 것.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그 결과를 기다리면 될 것이다.
아직 시간은 많고 여전히 나에게 안달인 구단도 많다.
“규보. 넌 아직 협상이 한창인 거냐?”
호우찬은 얼마 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들었다.
FC대전에 입단하는 것으로.
“뭐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지.”
“너와 뛸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지 않아서 그게 아쉬울 뿐이다. 더 배우고 싶은 게 아직 많은데.”
내가 처음 남윤고에 왔을 때를 생각하면, 사실 이 녀석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 성장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실제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
고교 졸업 후 프로 구단으로 직행하게 된 것은 그 성장의 결실이었다.
전생에 어떤 축구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번 생은 꽤 괜찮은 선수로 도약할 가능성이 크다.
아직도 녀석의 가파른 성장 곡선은 꺾이지 않았으니까.
“규보. 많은 것이 다 네 덕이다.”
“닭살 돋게 왜 이래.”
“다들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학교는 이 정도로 주목받지 못했을 테니까.”
“감독님 들으면 서운하실라.”
“물론 감독님께도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축구를 할 수 있게 발굴해 주시고 키워 주셨으니. 하지만 우리 축구부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가 너란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한국말 많이 늘었네. 이제 졸업해도 될 정도로.”
“아무튼 고맙다 규보.”
이놈 말하는 걸 보면 마치 내일이 졸업식인 것 같다.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하여간 특이한 녀석.
‘FC대전에서 계속 보게 되려나?’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에서 뛰는 호우찬이 어떻게 성장할지는 많이 궁금하니까.
* * *
한 해의 모든 대회가 마무리되고 나면 아무래도 축구부 훈련의 긴장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팀의 중심이었던 3학년들은 가장자리로 서서히 물러나게 되며,
이제 1, 2학년들을 중심으로 팀을 리빌딩해야 하는 다소 혼란스러운 시기.
그러던 차에 이례적인 연습 경기가 잡혔다.
“문성대학교 축구부랑요?”
그것도 우리가 아닌 대학 쪽에서 제안을 해 왔다고 한다.
사실 허웅도 감독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직 졸업 이후의 거취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일부 3학년들에겐, 대학팀에 눈도장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심지어 문성대는 대전/충청권 지역의 최고 축구 명문이다.
우리 학교에 셔틀을 타고 방문한 대학생들은 다들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왜 수준 안 맞게 이딴 고딩들이랑 연습 경기를 해야 하냐. 라는 표정.
이 중엔 우리 학교 선배도 있는 모양이다.
당연히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 너 호우충 아니냐? 맨날 경기 중에 호우 호우 거려서 개 욕먹던?”
“호우찬입니다!”
“에이. 내가 이름까지는 기억 못하고. 어쨌든 아직도 축구 하나 보네? 한 2학년 때쯤 때려칠 줄 알았는데.”
“축구를 제가 왜 때려칩니까. 저 축구 계속할 겁니다.”
“와 씨. 너 진짜 많이 컸다. 1학년 땐 말도 한 번 못 걸더니.”
후배 이름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무슨 2학년 때 때려칠 줄 알아.
말하는 본새만 잠깐 봐도 양아치 기가 다분히 흘러내린다.
운동부 이미지만 버려 놓는 이런 놈들은 제일 질색.
보아하니 우리보다 2년 선배인 모양인데, 호우찬이 내년에 프로 입단하는 건 모르고 하는 소리겠지?
“왕중왕전 우승했다면서? 독일인가 어딘가에서 온 해외파가 캐리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누구냐 그게?”
결국 저 양아치에게서 호우찬을 빼 오기로 했다.
“호우찬. 이쪽으로 와. 몸 풀어야지.”
“알겠다. 규보!
“오오. 너구나? 그 해외파.”
나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고, 잠시 후 연습 경기가 시작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리 상대가 대학팀이라 해도 질 자신이 없다.
우리 학교는 전국 고교 정상에 올랐던 팀. 저 선배라는 사람이 지금 감이 없나 본데 정신 안 차리면 모교에서 험한 꼴만 보다가 돌아가는 수가 있다.
그리고 딱 7분.
버릇없는 선배를 참교육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호우!”
호우찬은 지면을 박차며 도약했고,
빠악!
내가 감아올린 크로스를 그대로 방아 찧기 하며 골문에 쑤셔 넣었다.
“고오오올!”
요즘 호우찬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말 많이 늘었다.
무엇보다 골 냄새를 맡아 뛰어 들어가는 움직임 하나는 지금 당장 프로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
포스트 플레이를 비롯한 제공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약점인 발밑 플레이는 여전히 개선해야 하지만, 다른 장점들이 커버하고 남는다.
“규보오!!”
그런데 나만 찾아다니는 이 세리머니만큼은 어떻게 좀.
대학생들은 첫 골을 허용한 후, 한껏 열이 올랐는지 중원에서부터 압박을 강하게 해 왔다.
확실히 몇 년 더 볼을 차기도 했고, 신체적으로도 더 단단한 나이이기에 우리 선수들이 정면으로 맞서기엔 부담스러운 면이 있긴 했다.
그럴 때면 내가 조금 아래까지 내려와서 숨통을 트여 주면 된다는 것.
공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애매하면 나를 찾으면 된다는 것을, 다들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타악-
나는 볼을 받은 후, 곧바로 상대의 중원을 유린해 나갔다.
압박 수준이 고교생보다 조금 더 타이트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들 역시 아마추어.
지금까지 내가 하던 것을 못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문전까지 공을 끌고 가 수비수들을 헤집어 놓은 후,
투욱-
쇄도하는 호우찬을 향해 땅볼 쓰루 패스를 주었다.
노마크 찬스.
아무리 발밑이 허술하다고 해도 이 정도는 넣는다.
퍼어엉-
그리고 요샌 그렇게까지 허술하지도 않다.
해이해지기 쉬운 이 시기에도 새벽 운동을 빠짐없이 하고 있으니까.
출렁-
골망이 흔들리며 스코어는 2 대 0.
호우찬을 꼽 주던 선배 놈 표정은 썩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후반전에 마침내 녀석의 해트트릭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호우우우!”
그라운드에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니 앞으로는 우리 호우찬을 무시하지 말라.
뭐, 이제는 무시할 위치도 아니겠지만.
* * *
최중호 팀장이 나를 다시 찾은 것은 대략 보름 후의 일이었다.
그는 정말로 독일로 출장을 다녀왔고, 내가 추천한 녀석을 면밀히 관찰하고 온 모양이었다.
만약 일이 어그러지더라도, 무리수인 내 제안을 받아 준 감동만큼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선 FC대전에 입단하기는 좀 어렵겠지만.
“어땠습니까? 그 녀석. 팀장님이 보시기에.”
“흠. 일단 이규보 군이 무슨 생각으로 아피아 기안이라는 선수를 추천했는지는 알겠더군요.”
아피아 기안.
가나계 독일인으로 04년생의 유망주이다.
전생의 도르트문트 시절 호흡을 맞춘 동료였고, 내가 기안04로 부르기도 했었다.
우린 꽤 가까운 사이였다.
녀석은 독일에 처음 온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친해지고 나서는 속 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아쉽게도 내가 3년 차 때 이 녀석은 리버풀로 이적을 해 버렸지만, 그 뒤로도 꾸준히 연락을 하며 좋은 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갑자기 더 보고 싶어지네.’
내 기억이 맞다면 현시점의 이 녀석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가정불화와 팀 내 인종 차별, 그리고 독일 생활에 대한 환멸.
당연히 필드에서의 플레이도 점점 망가져 갔고, 녀석은 이 시절에 까딱 잘못했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고도 내게 고백했다.
그 구렁텅이에서 이 녀석을 빼낸 것은 다름 아닌 일본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
놀랍게도 일본에서 재능이 갑자기 폭발한 후, 녀석의 축구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환경이 비슷한 한국에 오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안04의 미친 재능은 찐이니까.
“개인기는 진짜 탁월한 선수죠. 삘 받는 날에는 아무도 못 뺏습니다.”
비슷한 유형으로는 네이마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