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신, 하 변호사 04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4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4
산경(山景)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4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4권
Chapter 01.
인도 뉴델리에서 나 비서가 말한 친구가 올리비아 브라기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걸 알게 된 김 기사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만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물 가져와라, 담배 불 붙여라, 술 한 잔 따라라 하며 하인 부리듯 이것저것 시키는 그녀 때문에 다시 기분이 망가졌다.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자 하인 노릇을 제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미타의 보모 노릇 하러 함께 온 게 아니라 두 여인의 하인 역할이 더 컸다.
“회사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상장 회사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브라기는 담배와 술을 번갈아 즐기며 말했다.
“대대로 내려온 전형적인 귀족이죠. 한때 왕족이었다는 말도 들리니까.”
“희토류는?”
“그 인간 소유의 산이 몇 개 있어요. 원하는 대로 조건 맞춰줬는데 갑자기 변덕이에요.”
“왜? 가격 더 올려 달래?”
“아뇨. 자연을 훼손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면서….”
이런 경우가 가장 어려운 협상이라는 걸 하 변호사는 잘 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늘 숫자로 드러난다. 더 높이려는 측과 더 낮추려는 측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조건은 타협점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자연 어쩌고 하는 거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모르죠. 말씀드렸잖아요. 변덕 심한 부자라고.”
브라기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 변호사에게 말했다.
“뭔가 획기적인 전환을 유도하시리라 믿어요.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특히 인간에게.”
“내가?”
“그럼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경외심도 있어요. 그래서 정체를 몰라도 하데스님을 보면 그럼 마음이 들잖아요.”
“설마 그런 황당한 이유로 내게 부탁한 거야?”
“황당한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하지만 난 아주 가능성 높은 이유라고 보거든요?”
더 이야기해봤자 탁상공론이다. 부딪혀야 풀어나갈 길이 보인다.
“난 이만 들어가 쉴 테니까 모두 적당히 놀아.”
하 변호사의 말에 김 기사가 가장 반가운 듯하다.
“변호사님. 전 나미타 데리고 외출하겠습니다. 시내 구경이라도 좀 할까 해서요.”
“그래. 대신 사고 안 생기게 조심하고.”
“네.”
하 변호사는 두 여인을 험악한 눈매로 바라보며 말했다.
“적당히 마셔.”
* * *
쉰다던 하 변호사는 홀로 뉴델리 거리로 나왔다.
마치 관광하듯 천천히 걸으며 시내 구경을 하던 하 변호사는 찻집 하나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진 자리에 앉자 카운터에서 계산하던 주인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점원을 부르고는 하 변호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는 눈이 많아 충분히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점, 용서 바랍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너그러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차만 파나? 술은 팔지 않나?”
“전통적으로 술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라…. 젊은 애나 외국인을 위해 맥주 정도는 준비해뒀습니다. 드시겠습니까?”
하 변호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커피 있으면 한 잔 내 오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자드�쳄� 정성껏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왔다.
“인도 몬순 커피입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캐러멜의 단맛과 구수한 맛이 느껴졌다.
“괜찮네.”
커피 맛이야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기에 나 같은 존재가 많나?”
리자드맨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사람보다 신이 더 많이 산다고 하는 나라 아닙니까? 당연히 많을 겁니다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리자드맨을 찾지 않아?”
“네. 굳이 알아야 할 정보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교류 없이 조용히 살아갈 수 있으니 그럴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직업 없이 살다가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세상 아닌가?”
“이 나라에는 누군가를 숭배하려고 기회만 노리는 인간들이 많아요. 조금만 특이한 능력을 보여주면 인간이 바치는 공물만으로도 비만 걱정을 해야 할 겁니다.”
미국에서 한국이 아니라 인도로 넘어왔어야 했다.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니!
“그리고 숭배자 중에는 엄청난 부호도 많습니다. 그들은 초월자를 숭배라는 명목으로 후원하죠.”
“후원의 방식은?”
리자드맨은 하 변호사가 무엇을 묻는지 그 진의를 알아챘다.
“큰 부자들은 아예 함께 삽니다. 별채가 많으니 그중에 하나 내주고 하인까지 붙여주죠. 귀족의 생활 수준입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부자일수록 계산은 확실하니까요. 예측건대 분명 초월자의 능력을 여러 방면으로 이용할 겁니다.”
“인도 최고의 부자라면 어떨까?”
하 변호사는 리자드맨이 아주 잠깐 미소 지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초월자 여러 명을 게스트로 보살펴 줄 겁니다. 다만 그들의 능력을 그리 많이 이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왜 그렇지?”
“이 나라에서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극히 드물거든요.”
“돈이 능력이다?”
“네. 슈퍼 리치라면 슈퍼 파워을 가진 거죠. 초월자의 능력까지 필요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초월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조직에 대해 정보가 있나?”
“없습니다.”
“정보가 없는 거야? 아니면 그런 조직이 없다고 확신하는 거야?”
“후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인도에서는 초월자를 숭배하는 분위기가 많습니다. 부호들도 마찬가지고요. 이용하는 인간은 있을 수 있지만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초월자를 숭배하는 부자들이 많은 나라. 그렇다면 그런 부자들 곁에는 초월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상수로 봐야 한다.
내일 만나게 될 인도 최고의 부자 곁에는 초월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 * *
하 변호사 일행을 태운 전세기는 뉴델리에서 동쪽으로 향했다.
인도 최고의 갑부가 사는 곳은 인도 최동단의 연방 구역인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Andaman and Nicobar Islands)의 섬이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150km밖에 안 되고 미얀마와도 가깝다. 오히려 인도로부터는 1,000km 가까이 떨어져 동남아시아 권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해외여행이라도 하듯 장시간 비행한 후에야 비행기는 고도를 낮췄다.
창밖으로 보이는 섬들은 인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마치 휴양지에 온 듯한 느낌이다.
“저기예요.”
딱 한 번 와 봤다는 브라기가 가리키는 곳에는 여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의 섬 하나가 보였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그 섬은 휴양지로는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에메랄드빛 바다는 바라만 봐야 하고 그 푸른 바닷물에 발 한쪽 담그는 건 불가능하니 아름다운 바다도 휴양지로는 무용지물이었다.
낚시…? 매니아가 아닌 은퇴 노인이라면 포인트 찾으려다 익사하기 딱 좋은 그런 절벽의 연속이다. 섬마다 있는 그 흔한 모래사장 하나 없다.
이 섬은 휴양지가 아니라 아예 요새에 가깝다.
선착장이 없으니 배를 이용할 수도 없고 인도와는 거리가 멀어 헬기로도 어렵다.
어쩌면 사람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무인도와 다를 바 없는 섬이다. 이런 섬을 매입해서 자신만의 요새로 만든 놈은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모든 식재료는 매일 항공편으로 조달한다고 했어요.”
“전기는?”
“섬 내부에 자체 발전소가 있는데 그건 비상시에 사용하는 거고 해저 케이블을 통해 전력을 공급해요. 인도네시아에 발전소 하나를 건설해주고 그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 일부를 무상으로 제공받는 거죠.”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부를 가진 인간은 일찌감치 신의 능력을 뛰어넘었다.
신화에 등장하는 그 어떤 신도 이 정도 사치는 상상하지 못한다.
“저 섬의 거주민이 8백 명쯤 되는데 전부 그 인간 하나를 위해 일해요. 청소부, 요리사, 메이드, 전기 토목 기술자 등등 전부 다 고용인이죠. 경호 인력만 해도 백 명쯤 된다고 들었어요.”
착륙이 가까워지니 활주로가 보였다. 관제탑까지 갖춘 개인 공항이다.
“아무래도 상상력은 인간의 특권 같다. 우린 섬 하나를 이렇게 만들 생각은 못 하는데….”
하 변호사가 혀를 내두르자 브라기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부자가 아니었으니까요.”
비행기에서 내리니 롤스로이스 몇 대가 그들을 기다렸다.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섬의 중심부까지 들어가니 다시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거대한 성이 보였다.
섬도 요새였고 성도 요새였다.
섬이란 바다에 솟아오른 산이다. 그 산을 깎아 평탄화 작업을 했고 그 위에 까마득한 성을 올렸다.
그 성을 보자 브라기의 말이 옳았다는 것도 알았다.
“도대체 저런 성을 올리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성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김 기사의 말이었다. 부자가 아닌 김 기사는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못 했기에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굳게 닫힌 성문은 차량 행렬이 가까이 오자 스르륵 열렸고 거대한 주차장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잘 가꿔진 정원을 보니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 얼마나 작은 규모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을 안내하던 사내가 정중히 말했다.
“정원을 돌아보고 싶으시면 안내하겠습니다.”
사내는 눈치도 빠르다. 그는 나미타의 눈빛에 담긴 호기심을 읽었다.
“산책하고 와. 난 먼저 들어갈 테니까.”
하 변호사의 말에 사내는 정원사를 불렀다.
“잘 안내해 드리고 2층으로 모시고 와.”
모두가 정원사의 뒤를 따랐고 하 변호사는 사내와 함께 성으로 들어갔다.
성 내부의 크기도 광장이었다.
너무 거대해서 혹시 자연적인 폭포를 그대로 두고 성을 쌓았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인공폭포도 보였고 그 폭포의 물결을 가르는 온갖 석상도 보였다.
안내하던 사내가 말했다.
“2층으로 오를 때 계단을 이용하시겠습니까?”
“천장이 까마득한데 계단으로?”
“물론 엘리베이터도 있습니다만 천천히 계단을 오르시면서 이곳을 한 눈으로 보는 느낌도 나쁘지 않아 추천하는 겁니다.”
“그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