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의 부인이 되어버렸다 9권
지은이 : 새벽유리
펴낸곳 : 필연매니지먼트
E-mail : feelyeon2015@gmail.com
정가 : 3,000원
ISBN : 979-11-7294-617-3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며,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천마의 부인이 되어버렸다
9권
새벽유리
목차
38장
39장
40장
41장
42장
외전
38장
황당하게도 협박인지 생떼인지 애매모호한 방금의 발언이 통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흑오방주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 어머니는 원수로 규정한 인간은 지옥 끝까지 쫓는 사람입니다! 장담하지요!”
“아하- 그러시구나. 지금 네 엄마가 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거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사실적인 정보를 알려드리는 거지요. 그런 섭섭한 말씀을…!”
흑도 수장으로서의 위풍당당한 기상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한번 굴복해 보니 생각보다 할 만한지, 흑오방주는 제법 사람 비위를 맞출 줄 알았다.
“흐음….”
나는 고민하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꿀꺽. 흑오방주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진다.
그의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한참을 뜸 들인 끝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손에 피를 묻히는 건 가능한 한 피하고 싶거든.”
흑오방주가 한시름을 놓은 듯 비틀거린다.
“아, 아무렴요. 사람을 막 죽이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요.”
“그래, 그래. 아무래도 어머니랑 자식을 둘 다 죽이는 건 좀 찝찝하지. 한 집안의 대를 끊는 느낌이랄까.”
“…예? 아, 예. 그렇군요. …그런 의미….”
흑오방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껏 내가 했던 말들이 농담으로 들렸나?”
완전 진심이었는데.
“그….”
흑오방주가 우물쭈물했다. 아마 유화련주와 내 경지를 비교해 보는 듯했다.
그러나 곧 흑오방주는 결론을 내리고는 두려움 반, 경외심 반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닙니다. 대, 대협의 말씀이 맞습니다. 대협께선 제가 봤던 무인들 중 가장 강하십니다….”
명백한 항복 선언이었다.
흑오방주가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다시 한번 머리를 깊숙이 조아린다.
“대협께서 저와 제 어머니를 살려주신다면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노예가 되겠다는 소리?”
“…예?”
흑오방주가 멍한 얼굴로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넋을 놓은 흑오방주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네놈의 목숨도 살려주고, 어머니의 목숨도 살려줬으니 나와 같은 은인이 어딨겠어. 설마… 그냥 하는 말이었던 건 아니겠지?”
“예? …예에?”
“앞으로 내게 잘하도록 해. 하는 거 보고 노예 해방시켜줄 테니까. 아! 내친 김에 호칭 정리도 해볼까? 이제부터 주인님이라고 부르도록.”
나는 아까부터 멍청하게 ‘예? 예?’만 반복해 대는 흑오방주에게 주먹을 치켜올렸다. 움츠러든 흑오방주가 ‘주주주주주인님!’ 하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음. 따로 교육은 필요 없겠군.
나는 눈 깜짝할 새에 인권까지 빼앗겨버려 넋을 잃은 흑오방주를 지나쳐 청연에게 향했다.
청연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부루퉁해져 있었다.
나는 청연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가벼운 접촉 한 번에 서늘했던 미남자의 굳어있던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해지는 게 귀여웠다.
“…꼭 살려두셔야겠습니까.”
청연은 물가에 놓인 어린애를 보듯이 나를 보았다.
청연이 왜 불안감을 느끼는지는 짐작이 갔다.
무능했던 과거의 내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을 테지. 씁쓸한 일이다.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
“…….”
“너는 무력하지 않고, 나 또한 언제든 저들을 죽일 각오가 되어있으니.”
“…그렇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곧 떠날 건데, 뭘.”
청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그의 금안을 들여다보다,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청연 네가 계속 불안하다면… 그래. 그냥 처리하지 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잠시 숨통이 트였던 흑오방주가 입을 떡 벌렸다.
“자, 자, 잠시만요. 주, 주인님! 이건 말이 좀 달라지지 않습니까?”
급박한 흑오방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척, 나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흑오방을 이용해서 다른 귀물이 있는지 단서를 찾아볼 생각이었거든.”
흑오방주는 사파제일인의 아들이니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정보를 수집하는 등 인력을 요하는 분야에서 말이다.
물론 지금 이 세계에서도 청연은 마교의 교주였다. 마교의 인력을 이용하면 흑오방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양질의 정보를 물어오겠지.
하지만 우리는 마교의 힘을 빌릴 수 없었다.
‘과거의 청연과 현재의 청연이 마주치는 일이 생기면 안 돼.’
이건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하수고의 마지막 말도 분명….
- 결코 이방인임을 들켜선 안 된다.
…였으니까.
아마 우리가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는 그녀의 경고일 터.
만에 하나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굳이 시도해 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청연은 마교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얼굴이라도 가리고 다녀야겠네.’
지금은 마교가 발호하기 전의 시대. 마교도들이 어디서 어떻게 숨어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들키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오늘 내로 당장 청연의 얼굴을 가릴 면사부터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흑오방주가 급박하게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주인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좋은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응?”
“하늘의 귀물…이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귀한 영약이나 영물, 보물! 이런 걸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맞기는 한데….”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엄청난 걸 하나 발견했습죠! 저를 살려주신다면 그것 또한 전부 내어드리겠습니다!”
으음.
딱히 기대감이 없는 반응에 압박감을 느낀 건지, 질끈 눈을 감은 흑오방주가 외쳤다.
“길몽을 꾸고 받은 보물이니 분명 귀한 것입니다!”
“길몽?”
나는 청연과 시선을 교환했다.
‘저 말이 허풍이 아니라면….’
정말 하늘의 귀물일 가능성이 있을지도.
“무슨 꿈인지 말해봐.”
“한 달도 더 전에 꾼 꿈입니다만 아직도 실제로 목격한 듯이 생생합니다. 자주색 구름을 두른 신선이 나타나더니 제게 엄청나게 번쩍번쩍 빛나는 조각을 주는 꿈이었습니다.”
“빛나는… 조각?”
흑오방주는 그때를 떠올린 듯 흥분한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예! 가장 중요한 건 눈을 뜨고 나니 제 몸 위에 정말 똑같이 생긴 조각이 있었다는 점이지요! 신묘하지 않습니까?! 물론 꿈에서처럼 빛나진 않습니다만… 워낙에 상서로운 꿈인지라 분명 굉장한 보물일 겁니다! 암요!”
자주색 운무.
하수고의 상징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흑오방주와의 인연은 하수고의 안배 아래 놓인 인연이었구나.’
아무튼 음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신선 같으니라고.
나의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이 하수고의 손아귀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몹시 불쾌해졌다.
어쨌든 흑오방주를 살려둬야 할 이유는 확실해졌다.
“청연.”
“예.”
이번만큼은 청연도 이견이 없는 눈치였다.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기가 살아난 흑오방주가 ‘니미럴, 이럴 바엔 그냥 죽는 게 낫지’라며 구시렁거렸다.
“뭐? 당장 죽고 싶다고?”
“아, 아닙니다!”
같잖다는 시선으로 흑오방주를 흘겨본 나는 에휴,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가 풀썩 앉았다.
난리 통에 흙먼지가 섞여버린 찻물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엄청 떫긴 했으나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은 맛이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청연이 서늘한 음성으로 흑오방주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조각을 가져오도록.”
“조, 조각을 가져온다면 꼭 살려주시기로 약조하시는 겁니다…! 천금보다 귀한 걸 내어드리는 거니까요!”
청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고민 없이 끄덕이는 것 같은데.
그의 약조가 깃털같이 가볍게 느껴지는 건 흑오방주도 마찬가지였는지, 흑오방주가 불안에 떨며 애원했다.
“하, 하늘에 대고 맹세해주십시오!”
“맹세하지.”
이번에도 일 초도 지나지 않은 즉답이었으나, 흑오방주는 별 수 없는지 불안해하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얼른 다녀오렴. 늦으면 일각에 한 대씩이다?”
“…예.”
쿵. 쿵. 쿵.
육중한 몸을 이끌고, 객잔을 빠져나가는 흑오방주의 뒷모습이 패잔병인 양 애잔하기 그지없었다.
쟤는 알까….
청연은 하늘에 대고 한 맹세 따위 지키지 않는 애라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