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의 부인이 되어버렸다 1권
지은이 : 새벽유리
펴낸곳 : 필연매니지먼트
E-mail : feelyeon2015@gmail.com
정가 : 3,000원
ISBN : 979-11-7294-6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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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부인이 되어버렸다
1권
새벽유리
목차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1)
제1장.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탄식하는 듯한 어조. 이는 내가 아는 천마의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자는 대체 누구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자존심을, 긍지를, 염원을 짓밟고자 하던 그 사내가 맞을까.
“마음 깊이 후회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이미 의식이 깨어난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천마는 동요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산처럼 드넓은 어깨와 단단한 육신이 주는 위압감은 둘째 치고, 눈빛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광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이는 신체 마디마디마다 각인 되어있는 생존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천장에 닿을 듯 거대했던 천마의 육신이, 천천히 낮아졌다.
“주인께 경배를 바칩니다.”
천마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머리가 새하얘진 채, 그저 눈만 끔뻑였다.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강호의 재앙이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억겁과도 같았던 그 시간들이 결국 연화 님께 다가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리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요.”
천마가 침상에 흐트러져 있던 내 손목을 조심스레 끌어당긴다.
“!”
천마의 입술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손끝에 살풋 닿았던 온기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올라와 손목의 중앙에 와서야 멈춰 섰다.
문득 숨이 막혔다.
심장이 정수리까지 튀어오를 기세로 쿵쿵,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이제는 무엇도 상관없습니다. 그 무엇이든, 마땅히 연화 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드릴 테니.”
존재만으로 주변을 서늘하게 만드는 미남자가, 눈매를 휘어 웃는다.
달빛조차 그 아름다움을 이기지 못해 수심에 잠길 만치, 황홀한 미소였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평소의 천마가 아니다.’
달랐다.
무엇이 천마를 이토록 흔들어놨을까. 내가 아는 천마가 아니었다.
“또한, 늘 그랬듯 제게 시련을 내리고자 하신다면, 그리하십시오. 감내하겠습니다. 대신….”
나는 숨조차 쉬는 것을 잊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제 곁에 있으십시오.”
천마의 고압적인 눈길이 내 눈과 콧대를 스쳐지나, 이내 입술 끝에 머물렀다.
“!”
그 시선을 어쩐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고개를 틀고 천마의 손길이 닿은 내 손을 빼앗듯이 거두었다.
아쉬운 눈으로 일별한 천마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곱게 가꾼 깃털처럼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눈가에 드리운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마교의 교주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래전부터, 연화 님께 바치기 위해 공물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그게 무슨….”
천마의 금안에 자리 잡았던 냉랭한 온기를 대신한 것은 뜨거운 광기였음을 눈치챈 찰나, 천마가 연수하게 웃었다.
“천마신교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세계를 멸망시킬 재앙이,
아무래도 미쳐버린 것 같다.
***
내가 읽던 무협지 속 등장인물로 빙의했다.
그것도 기억을 거의 다 잃은 상태로.
내가 기억하는 것은 현대에 살았었다는 정보와, 이 무협지를 누군가에게 건네받는 순간, 그리고 이 무협지의 줄거리뿐이었다.
나는 과하게 회춘해버린 나머지 짧고 통통해진 손가락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에휴.’
자고로 무협이라함은 피와 살이 튀기는 장르가 아니던가.
이런 세계에서 나는 하필 절맥증을 앓고 있는 어린아이로 빙의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에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다행히 나는 이 소설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원래 내 이름조차 모르면서, 편리하게도 빙의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기억하고 있다니.
마치 나를 이곳으로 보낸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과거는 잊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라고 의도한 것처럼….
‘확신이 들어.’
이 세계가 무사히 <완결>이 나게 된다면 나는 기억을 되찾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각인된 듯한 확신이었다.
꼭 기억을 되찾고 다시 돌아갈….
그때, 다정한 시비의 음성이 나의 회상을 방해했다.
“아가씨, 맹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른 마중하러 나가자!”
“후후. 그렇게 좋으세요? 아침에 보셨는데도.”
무림맹주.
무협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곧장 휘황찬란한 수식어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정파의 수장.
무림에서 손꼽히는 거물.
강호의 권력자 등….
대부분의 무협물에서 대단한 권력자로 묘사되곤 하는 데다 심심치 않게 악역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내가 왜 그 무림맹주를 배웅하러 나가느냐고?
‘그야 내가 무림맹주의 딸이니까!’
나는 무림맹주, 위제혁의 외동딸에 빙의했다.
다행히 이 소설 속 무림맹주는 악역이 아닌 데다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참된 어른이었다.
게다가 주인공의 아버지인 남궁세가주와는 막역한 친우 사이이기까지 하니… 주인공과 척질 일도 없는 안전한 인맥 그 자체!
‘앞으로 진행될 소설의 전개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만큼 좋은 환경이 없지.’
그야말로 주인공의 인맥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시작이 아주 좋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상황이 완전히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
정확히는,
내가 빙의한 몸인 위연화의 존재 그 자체다.
‘내가 읽었던 무협지 속 위 맹주는 자식이 없었으니까.’
다행히 위연화의 육체에 빙의하면서 그녀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기에 ‘위연화’로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꼭 정해진 이야기 속에 나만 덧붙여진 것 같달까. 그래서 종종 헷갈렸다.
내가 정말 빙의한 걸까. 아니면 원래 내 진짜 몸은 이미 죽어버리고, 내 영혼만 남아 무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복잡해진 속내를 감추고 시비의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맹주가 있을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짧은 다리로 열심히 걷는 내가 귀여웠는지 시비가 쿡쿡 웃었다.
전각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요했던 처소가 평소보다 한결 소란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
수하들과 함께 외당에 들어선 청삼의 미남자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활짝 웃었다.
“연화야.”
장님도 눈이 번쩍 뜨이게 할 만치 아름다운 남자가 내 아버지라니. 믿기지 않는다.
시립해 있던 시비들이 존경을 담아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엄한 광경 속에서, 아버지는 누가 봐도 팔불출 같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활짝 웃으며 나비처럼 날아가 아버지 품에 폭 안겼다.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기특하기도 하지. 아비 없이도 씩씩하게 있었구나.”
위연화는 어머니가 일찍이 돌아가신 데다 아버지 역시 언제나 바빴던 탓에 부모의 손에서 크지 못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위 맹주는 최선을 다해 위연화를 키우려고 애썼다.
매일은 어렵더라도 자주 보고자 했고, 만날 때마다 있는 힘껏 안아주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시비들이 어린 딸을 학대하지는 않는지 감시하기도 했다.
위 맹주가 신뢰하는 수하들 두엇 정도가 늘 그녀의 곁에 있었기에 시비들은 언제나 위연화를 유리 인형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언제였더라.
내가 열 살의 위연화의 몸에 막 빙의했을 때였나.
충격 때문인지, 한동안 열이 펄펄 끓고 정신이 나간 듯 군 적이 있었다.
위 맹주는 그런 나를 살리기 위해 전쟁터 한가운데를 돌파해 희귀한 약재를 구해왔다.
내 앞에선 언제나 굳건한 아버지로서 나를 달래고,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선 홀로 울었다.
위연화가 천치가 되어도 좋으니 죽지 않게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매일 밤마다 빌었다….
좋은 아버지였다.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의지하게 만들 정도로.
비록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이 아닐지언정 낯선 세계에 떨어진 상황에서 받는 뿌리 깊은 애정은 다디달아서, 나는 어느새 위 맹주를 정말 나의 아버지처럼 따르게 되었다.
“선물이다. 팔찌인데 여기 청금석이 네 눈 색과 꼭 닮아서 잘 어울릴 것 같았지. 정말 그렇구나.”
“정말 예뻐요! 잘 쓸게요, 아버지!”
위 맹주는 정말이지 귀애하는 딸을 위해 뭐든지 했다.
위 맹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딸을 위해서라면 무림맹도 마교에 팔아먹을 작자라고 흉볼 정도로.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과는 달리 아버지의 위치는 견고했다.
첫째로 위 맹주는 엄청난 딸바보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공명정대하고 능력 있는 맹주였기 때문이고,
둘째로 위 맹주의 아내이자 위연화의 어머니인 전대 군사가 무림 공적인 6주교의 목을 베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끝에 본인도 목숨을 잃었지만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위연화의 어머니 덕분에 목숨을 구한 자가 무림맹의 외벽을 두 바퀴는 돌 정도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광 덕택에 위연화는 전쟁 속 피어나는 꽃처럼 안온하고 평화롭게 자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진짜 위연화가 아니라 망정이지, 안하무인으로 자라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당분간은 무림맹에서 머무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