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드래곤의 엄마가 되었다 4권
아기 드래곤의 엄마가 되었다 4권
아기 드래곤의 엄마가 되었다
4권
아기 드래곤의 엄마가 되었다 4권
차 례
13
14
15
16
아기 드래곤의 엄마가 되었다 4권
13
“성녀님.”
황제의 침대 옆에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선홍빛 눈동자로 변한 성녀가 서 있었다.
“저는 괜찮은데, 폐하께서!”
변한 모습이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은 황제의 용태를 살피는 게 먼저였다.
냉큼 황제의 옆으로 간 에리카가 황제의 모습을 보기 무섭게 아무런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너무나 끔찍하다……. 이토록 잔인한 모습을 에리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만약에 이 시체의 주인이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토악질을 할 정도였다.
“삼촌….”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주먹을 말아 쥐며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으로 왜 폭발이 일어났는지, 폭발의 원흉은 무엇인지 알아보려 할 때였다.
폭발은 정확히 황제의 오른쪽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황제의 오른쪽에는 성녀가 서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고 불길함이 느껴졌다.
바로 완드를 휘둘러 보호막을 치자 강력한 힘이 에리카를 때렸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에리카는 당황했다. 괜찮아, 보호막이 있어! 안심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성녀는 주먹을 휘둘렀고 이내 보호막은 산산조각이 나 깨졌다.
고작 주먹 한 방으로 대마법사가 만든 방어막을 깼다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건…….
보호막이 채 흡수치 못한 충격이 고스란히 에리카를 덮쳤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죽여 줄게.”
신시아가 안광을 흩뿌리며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에리카는 자연의 마나를 끌어왔다. 황금빛 마나가 에리카의 몸 주변에 반짝이는 것도 잠시 고스란히 흩어졌다.
성녀의 성지에서와 똑같은 반응!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할 뻔했으나 에리카는 성지에서의 기억을 살려 심장의 마나로 다시금 보호막을 펼쳤다.
하지만, 급하게 만들어 낸 보호막으로는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해 피를 토해 냈다.
“이런 미친!”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네.”
주먹을 휘두르던 신시아가 야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상황일까, 에리카가 신시아를 노려봤다.
“성녀를 가장한 건가?”
하지만, 그랬다면 클라이네 변경백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하루 이틀 정도로 이루어진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중간에 바꿔치기가 이뤄진 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타락?”
“타락했다니, 표현이 너무하네. 이쪽 나름의 반항이라 해야 하나, 아님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야 하나. 음, 그냥 타락으로 하자. 지금 내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그게 제일인 것 같으니까.”
타락한 성녀, 신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분명히 전에 짓던 미소와 똑같을 텐데도 섬뜩하기 짝이 없다. 대체 무슨 일이 그녀에게 일어난 건가. 아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대체 왜…… 폐하를 죽인 거야? 폐하가 네게 뭘 했다고!”
“일종의 선언이지. 나는 더는 옛날의 순진무구하던 성녀가 아니다. 아니, 나는 ‘성녀’(聖女)조차 아니다! 라는 선언. 그러기 위해서 제국의 지배자를 죽이는 것만큼 수월한 방법은 없잖아?”
고작 그딴 이유로 폐하를……. 에리카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입술과 주먹에서는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온 거야?”
“응. 황제가 날 부르리라고 생각했거든. 다만, 알카이드의 등장은 예상치 못했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황제에 이어 황태자 역시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참 아까워.
이어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에 에리카는 내심 안도했다. 두베가 준 목걸이를 줘서 다행이야. 무사히 내 소공방에는 도착했겠지. 다른 위험은 없나? 혹시 클라이네 변경백도 이에 동참한 건가? 머리가 복잡하다.
에리카의 생각 하나를 눈치챈 것인지 신시아가 두 손을 가슴께에 꼭 모으며 말했다.
“클라이네 변경백은 모르는 일이야. 만약에 알았다면, 절대로 날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았겠지.”
그는 고집이 세고, 완고하니까. 목숨을 걸고 신시아를 방해했겠지.
그렇기에 신시아는 순진무구한 성녀를 가장했다. 속으로는 반드시 이 지긋지긋한 성지를 탈출하고자 하는, 더 나아가 이 세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숨기면서 환하게 웃었다.
성녀로서 자신을 보호해 줄 기사를 구원하고, 황제에게 복종하고, 자신의 감시자이자 보호자에게 웃어 보이며 그녀는 이 순간만을 오롯이 기다려 왔다.
“나는 순진무구했던 어머니와 다르게 반골이라서 말이야.”
“절대로 여기서 못 나가.”
황제를 죽인 범인이다. 그녀를 보냈다간 루크 백작의 이름이 울게 된다.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는 알카이드니까.”
해낼 수 없어도 해내야만 한다. 에리카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그래, 너는… 내 신경을 건드리네.”
신시아가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손에 흉흉한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타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의 기운이다.
“대가를 치르게 해 줄게.”
그 말과 함께 두 힘이 격돌했다.
* * *
싸움은 일방적이라 해도 좋았다.
타락한 성녀가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성녀의 공격 하나하나가 강력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으나 가장 큰 이유는 마나였다. 마나가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대마법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마나가.
그렇다고 대마법사의 권한이 사라진 것이냐? 그건 또 아니었다. 자신의 심장에 고여 있는 마나만큼은 황금빛으로 선명하게 물들어 에리카에게 복종했으니까. 그러니 자연 속의 마나를 끌어와 사용하지 못하는 건 모두 성녀의 영향이었다.
다른 불리한 요소가 있다면, 이곳이 황궁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걸 깨부술 각오로 공격을 해 대는 성녀와 달리 에리카는 황제의 시신이라도 온존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황궁을 지키기 위해 소극적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에리카는 지금 엉망진창이 됐다.
“쿨럭.”
피를 토해 낸 에리카가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그럼 이제 죽여 줄게, 대마법사.”
신시아의 주먹에 검은 기운이 어릴 때였다.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황태자를 피신시킨 이유가 이거야?”
신시아의 물음에 에리카가 피가 잔뜩 묻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물론이지. 노아를 보내며 황궁 소속의 상급 마법사들을 부르라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마법은 성녀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구리라도 까야지. 환하게 웃는 에리카를 보며 신시아가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황제 시해범입니다! 당장 잡아 족쳐요!”
거친 말투였으나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상급 마법사들이 스태프를 치켜들며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잔챙이들이라면 수백이 와도 상관없으나 상급 마법사는 결코 잔챙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나 대마법사도 함께 있는 이 상황이라면 싸우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낫다. 빠르게 파악한 신시아가 에리카를 노려봤다.
‘죽였어야 했는데.’
가장 큰 적이거늘. 주먹을 쥐었던 신시아는 이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리카는 붙잡기 위해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공격의 충격으로 인해 내장이 진탕이 된 상태에서 더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그대로 에리카가 주저앉자 마법을 준비하던 상급 마법사 하나가 에리카에게 다가왔다.
“에리카! 괜찮아?”
클라이네 가문으로 가야 해. 타락한 성녀의 다음 행선지는 거기일 거야.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뱉을 수 없었다.
입을 연다면 나오는 건 말이 아니라 검붉은 피가 될 게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을 멍하니 지켜보던 에리카는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피투성이가 된 에리카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황제의 시신을 수습하고, 폭발과 싸움으로 엉망이 된 황궁을 정리하고, 또 황제의 대관식 역시 준비해야 하리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제기랄.”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슬픔에, 앞으로는 자신이 정말 황제라는 두려움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함에 진흙탕 속에 가라앉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성녀. 그녀는 인간과 블레이크 두베의 계약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런 그녀가 사라졌으니 대체 블레이크 두베에게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거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마냥 막막하기만 하다.
답답함에 숨조차 쉬어지지를 않았다.
“폐하.”
집사장의 부름에 노아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가만히 앉아서 운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했었나.
「정신 차려, 노아!」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북돋아 주던 에리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너조차도 힘든 걸 참으며 싸웠는데 내가 싸우지 못한다고 찡찡댈 수는 없지. 있는 힘껏 제 뺨을 두들긴 노아가 집사장을 바라봤다.
얼마나 강하게 때린 건지 두 뺨이 다 빨갛게 물들 정도였지만, 노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장 귀족들을 불러 모아, 집사장. 마법사들에게는 증언을 부탁해. 황제 폐하를 치료하러 온 의원이 역심을 품어 황제를 살해했다고.”
“이를 막지 못했다고 루크 백작이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법사들의 증언이 필요한 거다.
루크 백작이 범인을 붙잡으려 했지만, 엉망진창이 되어 가면서까지 결국 못 잡았다는 증언을 해 줄 마법사들이.
에리카의 실력을 깎아내리는 게 내심 신경 쓰이긴 하지만, 황제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며 반역죄까지 뒤집어쓰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일단은 에리카에게 여론이 우호적인 것도 다행인 일이었다.
필연적으로 나올 안 좋은 말이 우호적인 여론에 묻히거나 막힐 테니까.
“루크 백작의 치료는…….”
“일단 랜돌프 알카이드께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고, 다른 빛 속성의 상급 마법사와 생명 속성의 중급 마법사가 응급 처치를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집사장이 명을 이행하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자신 역시도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괜찮을 거야.’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상황을 살피고 싶은데 그럴 여력이 없다.
주먹을 말아 쥐던 노아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주저앉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 * *
에리카가 눈을 뜬 건 그날 밤이었다.
힘겹게 눈을 뜬 에리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괜찮으냐?”
랜돌프의 물음에 대답 없이 에리카가 물었다.
“지금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어요?”
“아직 당일이다.”
슬쩍 시계를 보던 랜돌프가 정정했다.
“아니, 이제 막 어제가 됐군.”
멍청하긴! 왜 정신을 놓아선! 에리카가 냉큼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기엔 여전히 고통이 잔재해 있었으나 랜돌프의 치료가 아주 무의미하진 않았는지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