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1.
02.
03.
04.
05.
06.
07.
08.
01.
하…… 정말…….
길바닥 위의 삶이란.
[아니, 저것들이!]
진짜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유유히 눈 쌓인 담장 위를 걷던 로제는 우뚝 걸음을 멈춘 뒤 곧장 몸을 웅크리고 도약을 준비했다.
제 밥그릇을 노리는 적들을 발견해서였다.
[씁! 어딜 눈독 들여! 그건 내 거야!]
망설일 여유 따윈 없었다. 잠깐 멈칫하는 순간 귀중한 식량을 빼앗기게 될 테니까.
[아, 글쎄 꺼지라고!]
로제는 몸을 쓰기에 앞서 나름 신사답게 경고부터 날렸다.
이후 로제가 가볍게 몸을 띄워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동시에 적들의 시선이 로제에게 쏠렸다.
훗. 자식들. 넋을 놓고 쳐다보기는. 너네가 보기에도 멋있지?
잘 보고 배워. 이게 바로 이 구역을 한 달 만에 평정한 로제 님의 발길질이시다!
적들을 한껏 비웃은 로제는 우아한 몸짓으로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오른쪽 발을 곧게 뻗었다.
그런 로제의 발끝은 가장 덩치가 큰 까만 놈의 뒤통수에 정확히 꽂혔고, 녀석은 보기 좋게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으아악!]
[도망쳐!]
그 모습을 보고 로제의 발이 닿지도 않은 놈들까지 겁을 집어먹고 꽁지가 빠지라고 달아났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비키라고 했지? 어딜. 내가 찜해 놓은 생선에 눈독을 들여?]
로제는 멋들어지게 지켜 낸 생선 앞에서 가슴을 편 채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우와…… 점박이를 이기다니 대단하세요!]
[저 녀석 완전 깡패인데.]
여기저기 쏟아지는 찬사를 더해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어디서 고양이 새끼들이 시끄럽게 싸우나 했더니. 또 저 고양이가……! 썩 저리 가지 못해? 어휴. 저 눈 좀 봐. 징그러워 죽겠네, 정말.”
로제는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는 여자 때문에 멋들어지게 지켜 낸 생선을 입에 물고는 모양 빠지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로제가 생선 한 마리에 몸을 ‘날려 가며’ 싸우고 그 생선을 입에 ‘물고’ 도망쳤냐 하면…….
“요즘 집 주변에서 자주 보인다는 고양이가 저 고양이야?”
“맞아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서는, 원. 매번 저렇게 다른 고양이들이랑 쌈박질을 해 댄다니까요.”
그건 로제가 고양이였기 때문이었다.
적의 목에 정확히 명중시킨 곧게 뻗은 오른쪽 발이란 것도 실상은 ‘오른쪽 뒷다리’였고, 저기서 살벌하게 날린 엄포도 다 사실은 ‘야옹’이었으며…….
[달리기도 엄청 빠르시네요.]
[너무 멋있어요!]
쏟아지는 찬사도 다 고양이들이 던진 거였다.
‘하……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 * *
“내일 뵙겠습니다.”
“수고했어요, 재희 씨.”
그날도 별다른 것 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수강 신청에 장렬히 실패해 풀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수요일이었다는 것 빼고는.
허겁지겁 삼각김밥으로 배를 채워 가며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고양이?”
인적이 드문 넓은 대로변에서 흰색 고양이와 마주쳤다.
하얗고 풍성한 긴 털에 귀 주변과 꼬리 끝에 초콜릿색 포인트가 들어간 고양이 ‘렉돌’이었다.
‘랜선 집사 짬이 얼만데 품종 알아보는 정도는 껌이지.’
아무튼 이름대로 인형같이 생긴 고양이는 얼마나 관리를 잘 받았던지 털에서 윤이 날 정도였다.
“가출했나?”
어딘가 부티가 나는 게 길고양이 같진 않았다. 어디선가 이 고양이를 찾는 주인이 나타나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고양이가 도로로 뛰어들었다.
“야! 위험해!”
그리고 거기서…… 로제는 참으로 멍청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수요일만 아니었어도.’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서 그날이 수요일이었다는 걸 떠올린 덴 다 이유가 있었다.
피로감에 절어 뇌가 마비되어 있던 게 아니라면 그런 짓을 했을까 싶어서.
로제는 고양이를 살리겠다고 무려 왕복 8차선 도로에 뛰어들었고…….
쾅.
근처 정류장을 향해 달리던 버스에 부딪혔다.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도 도무지 제정신이라곤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우우우우우웅. 하악!”
“하악! 그우우우웅.”
아하하. 그리 힘들게 살다 이리 멍청하게 죽는구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던 그때. 갑자기 근처에서 고양이들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 얘들아,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는데 근처에서 싸우는 건 좀 아니지 않니?’
황망한 기분에 헛웃음 지으며 눈을 떴더니.
‘으잉?’
어느새 주변 풍경이 확 달라져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과 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 그리고 사이를 누비는 다양한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가진 사람들.
로제의 심장 속 웹소설 헤비 독자의 본능이 소리쳤다. 이게 말로만 듣던 책 빙의라고.
하필이면 좀 살 만해진 이때? 싶으면서도.
‘나도 멋있는 남주 만나 팔자 한번 펴 보자!’
오히려 좋아! 를 외쳤거늘…….
“언니, 여기 고양이가 쓰러져 있어.”
“고양이? 어머, 정말이네?”
“이름이 로제래. 목걸이가 달린 걸 보니 누가 키우던 고양인가 봐.”
로제는 고양이였다. 그것도 주인마저 잃은 채 홀로 나와 있던 길고양이.
‘그래. 내 인생이 그리 잘 풀릴 리 없지.’
한탄하며 어떻게든 현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를 쓰긴 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 빙의해 귀족 영애까진 아니더라도, 어디 멀쩡한 놈이랑 엮여 볼 가능성이라도 있는 하녀 정도는 될 수 있잖아. 그런데 고양이라니! 내가 고양이라니!’
애를 쓰면 뭐.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야, 이 거지 같은 인생. 어떻게 빙의를 해서도 똑같이 거지 같냐!’
로제는 그 자리에 드러누워 네 다리를 파닥여 가며 원망을 쏟아 놓았다.
‘고양이?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그러면 하다못해 귀족 가의 사랑받는 고양이 정도로는 빙의할 수 있는 거잖아!’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유일한 피붙이인 외할아버지도 한창 입시 준비로 바쁜 고 3 때 돌아가셔서는…….
정말 로제는 살아남기 위해 나쁜 짓 말고 안 해 본 일이 없었더랬다.
그러다 겨우 대학에 입학하고, 어디서 지원금도 받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진짜 이제 겨우겨우 살 만해졌는데.
‘고양이라니! 그것도 길고양이라니!’
그런 때 죽어 기껏 빙의한 게 길고양이라니!
분노에 휩싸여 한참 동안 바닥을 뒹굴던 로제는 철퍼덕 옆으로 돌아누워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뭐 언제는 쉬운 적 있었나.’
영혼에 불운이 새겨진 것처럼 내가 지지리도 운이 없는 인간인 걸 뭘 어쩌겠냐고.
필사적으로 생각의 전환을 이뤄 낸 로제는 꿋꿋이 네 다리를 딛고 일어섰다.
‘상황이 거지 같으면 뭐다?’
존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그런 인생이라 배운 건 있었다.
꺾여도 그냥 사는 마음이랄까. 어찌 됐든 버텨 내는 깡다구랄까. 내 몸 하나 지키는 건 익숙했다.
‘이 녀석도 가출한 걸 수도 있어.’
어쨌건 목걸이까지 걸어 둘 정도니 어디서 주인이 나타날 확률도 있어 보였다.
이번 생에서도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로제는 주먹을…… 아니, 냥발을 꽉 움켜쥐었다.
자세히 보니 이 고양이는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는 금으로 보였는데, 이런 걸 보면 어느 여유 있는 귀족 가에서 보통 이뻐한 고양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로제는 버티다 보면 돈 많은 집사가 절 찾으러 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 * *
그러나 그놈의 집사는 어디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다음!]
그 결말이 이거였다.
어딘지 모를 상점가 좁은 골목 끝.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올린 나무 상자 위에 앉은 로제는 제 앞에 모여드는 고양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느긋하게 배를 깔고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무슨 왕이라도 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니,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로제는 이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고양이들이 알아서 로제에게 먹이를 바쳤다.
[어이! 거기 새치기하지 말고! 줄 똑바로 서!]
[새치기한 거 아니에요. 제가 먼저 왔어요.]
[흠. 그래?]
하다못해 로제는 이런 말도 직접 할 필요가 없었다.
로제의 자리 한 단 아래 선 이 무리의 이인자 ‘턱시도’가 알아서 상황을 정리해 줬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디를 가야 신선한 생선을 구할 수 있는지. 어디가 볕이 잘 들어 낮잠 자기 좋은지.
놀라울 정도로 새 삶에 잘 적응해서는, 처음 깨어난 상점가에 자리를 잡고 한 달 만에 동네 고양이들을 평정한 것이다.
[뭐 가져왔어. 빨리 내놔 봐.]
그렇다고 진짜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다.
몇몇 덩치 큰 고양이들이 자꾸 앞에서 깐족대길래 혼쭐을 내줬더니 그 모습을 본 고양이들이 자연스레 로제 곁으로 모여든 거였다.
[대장! 이것 보세요! 제가 오늘 싱싱한 청새치를 물어 왔어요!]
[어, 그래. 고마워.]
엉겁결에 이렇게 됐지만, 뭐 편하긴 했다. 역시 권력을 쥐고 볼 일이랄까.
‘아, 뭘 또 뿌듯해하고 있어!’
제 앞에 쌓여 가는 먹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로제는 퍼뜩 정신이 들어 아무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명색에 사람이었는데 너무 빨리 고양이의 삶에 적응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로제 님, 다른 고양이들이 가져온 식량을 점검하기 전에! 특별히 제가 준비한 것부터 먼저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