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시그문드.
고귀한 첫 번째 기사가 검을 들었다.
고독한 영광의 검.
과거 성검이었으나, 그 이름처럼 영광스러운 자에게만 힘을 빌려 주는 무기다.
하지만 시그문드가 악몽의 기사로 전직한 뒤 고독한 영광의 검은 빛이 바래고 있었다.
“고블린 따위가…… 컥!”
벤다. 주인의 명에 따라 그저 마족을 베었다.
하지만 시그문드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검. 영광의 성검. 빛이 사라진 그것은 조금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에 지나지 않는다. 마(魔)에 물든 마족들이라면 보는 즉시 몸을 떨어야 정상이건만.
‘나는 영광스럽지 않은 건가?’
더 이상 고귀하지 않기에 빛나지 않는 걸까.
하르판 13세. 주인을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악몽의 기사로 전직한 게 영향을 끼친 것일지.
시그문드는 혼란스러웠다.
“기사여, 너에겐 소질이 있다.”
라카토르가 시그문드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방패를 다시 얻은 뒤 라카토르는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방패 자체에 붙은 옵션은 ‘더 많은 수하와 땅을 지배할수록 능력치가 증가한다’이지만, 라카토르는 랜스와 방패 모두 갖추지 않으면 전장에서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라카토르를 당해 낼 마족 역시 이곳엔 없었다.
과거 정복왕이라 불렸던 존재.
그가 시그문드의 그늘을 보며 다가온 것이다.
“짐은 종족을 불문하고 소질이 있는 자에게 가신의 자리를 내주지. 어떠냐, 나를 따르는 게?”
시그문드는 라카토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게 훨씬 중요한 탓이다.
“고블린 기사여. 나 역시 지금은 너의 주인에게 귀속되어 있으나, 그것은 아직 짐이 완전하게 힘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힘을 되찾거든 너의 속박 또한 풀어 주마. 그러면 그 성검도 힘을 되찾을 터.”
라카토르의 영혼은 현재 다이아몬드 룬에 봉인된 상태다.
전장에서 싸울 수는 있지만 자유롭진 못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라카토르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혼을 저당 잡혀 있을 생각이 없었다.
온전히 힘을 되찾으면 그때 스스로 룬을 만들어 봉인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때 자신을 떠받쳐 줄 강한 가신들이 필요하다. 시그문드는 단순히 소질을 넘어 그 이상을 바라볼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라카토르는 시그문드의 문제점을 단번에 꿰뚫었다.
“성검이 빛나지 않는 원인은 너에게 있다. 지금 너의 주인에게 품은 불만이 성검을 불발하게 만든 것이다.”
그오오!
동시에, 시그문드가 울부짖으며 라카토르에게 검을 휘둘렀다.
카앙!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라카토르가 방패를 들어 검을 막았다.
시그문드는 강렬한 적의와 함께 라카토르를 노려봤다.
주인에 대한 의문이나 불만은 없었다. 하나 그것을 유도하며 반역을 꾀하는 라카토르는 추후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충성심 하나는 대단하군. 그리고 묵직해.”
라카토르는 미소 지었다.
지금 시그문드와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은 반반이다.
시그문드는 영혼을 검에 실을 줄 알았다.
반면 자신은 전성기의 절반도 안 되는 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저 고집스러운 기사는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왕의 품격에 걸맞지 않은 개싸움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를 가뒀다고는 하나, 너의 주인에 대한 원망은 없다. 그러기엔 네 주인과 이 대륙은 꽤 재밌거든.”
마족의 침략.
지구의 인간들.
라카토르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김중혁은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종잡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그 행동 하나하나가 거대한 파장을 낳는 주제에 아직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김중혁은 왕이 될 자질을 지녔다.
대륙을 호령할 기세를 타고났다.
그러한 기질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타고난다 해도 다듬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뭐가 돼도 될 인간이긴 하지.’
정복왕이라 불렸던 자신이다.
혼자 강해서 대륙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게 아니다.
그가 인재를 보는 눈이 틀릴 리 없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김중혁은 둘 중 하나였다.
대륙을 호령하는 절대군주가 되거나.
한없이 떨어져 지옥왕 같은 존재가 되거나.
“그나저나 저 정령도 대단하구나. 마족과 비슷한 존재라서 그런가? 아주 씹어 먹는구나.”
베히모스.
저 거대한 고대의 정령은 마족의 정신체를 먹어 치우며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 시그문드가 고블린의 핵을 먹어 치우며 강해진 것과 같은 이치였다.
라카토르가 보기에 둘 다 어마어마한 ‘소질’을 갖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던 모든 가신들에게서도 찾지 못한 소질이었다.
시그문드는 아직 완전한 일체(一體)를 이루지 못했으나, 스스로의 역설을 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재해’의 레벨까지 강해질 것이다.
‘시그문드는 재해 레벨 이상의 소질을 갖고 있다.’
어쩌면 추후 ‘재앙’급으로 강해질지도 몰랐다.
재해, 재앙, 그리고 멸망.
최강자를 가르는 세 단계의 구분.
전성기의 라카토르는 ‘재앙’급의 강자였다. 멸망급의 강자는 용과 같은 존재들을 일컫는 말이니 평생을 가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했고.
‘재해는 왕국을 뭉개고, 재앙은 제국을 파괴하며, 멸망은 세계를 부순다.’
김중혁도 아직 재해의 레벨까지 이르진 못했다. 그것도 조만간 도달할 듯싶지만 그만큼 강자의 구분에 있어서 멸망급은 ‘규격 외’라는 것이었다.
‘……저 고대의 정령은 굉장히 꺼림칙하다.’
베히모스라 했던가.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있었다.
게다가 ‘읽히지’가 않는다.
자신의 소질을 보는 눈은 생명체와 비생명체 모두에게 적용된다.
값비싼 것을 알아보고 보물의 진정한 값어치를 평가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베히모스만은 읽히지 않았다.
‘저 정령은 내 소질을 파악하는 능력 바깥의 존재라는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럴 리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님에야.’
라카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꺼림칙한 걸 자신의 수하로 둘 수는 없었다.
다만, 시그문드는 너무 탐이 났다.
솔직히 김중혁도 자신의 아래로 두고 싶지만 놈은 이상하게 ‘용언’을 쓸 수 있었다.
진정한 몇 마리의 용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의 힘.
물론 김중혁은 용이 아니다.
그게 뭐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베히모스와 마찬가지로 꺼림칙한 놈이었다.
“생각이 바뀌면 말해라. 가신 1호로 너를 임명해 주마.”
시그문드가 뒤도 안 돌아보고 마족을 향해 뛰어들었다.
진짜 0.1초의 고민조차도 없었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라카토르의 자존심에 조금이지만 스크래치가 난 순간이었다.

* * *

대적자.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규율.
아스타로트는 진심이었다. 진정으로 나를 ‘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자신이 꺾고 넘어서야 할 존재로 나를 인정했으니 대적자의 자격이 떠오른 것일 터.
숨을 가다듬고.
검은별을 쥔다.
나 역시 놈을 넘어서야만 했다.
확실하게 넘어서서, 이곳을 넘보면 너희도 다치리란 메시지를 전달해야만 했다.
잔재의 뿔의 힘을 빌리면 한층 쉬울 것이나 이건 폭탄이다.
폭탄은 단발성이지만 강력한 무기다.
아스타로트와 함께 마계에 보낼 귀중한 선물.
스악!
아스타로트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화되어 사라진 게 아니다.
투악!
얼굴에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
보이지 않는 손이 반응하기도 전에 때렸다.
한 바퀴 돌며 겨우 착지하자 그 즉시 아스타로트의 연타가 이어졌다.
‘때려죽이겠다는 거로군.’
숨는 것도, 독무도 먹히지 않는다.
남은 건 육탄전이었다.
카르마를 덧대어 목뼈가 부러지는 것은 겨우 막을 수 있었다. 하나 계속 공격을 허용하면 몇 차례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스컹!